유리 금고 속의 가면무도회

7. 프라이버시

by NT
"The traditional banking model achieves a level of privacy by limiting access to information... The new model precludes this approach, but privacy can still be maintained by breaking the flow of information in another place..."
(기존 은행 모델은 정보 접근을 제한함으로써 프라이버시를 유지한다... 새로운 모델은 모든 거래를 공개해야 하므로 이 방식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 정보의 흐름을 차단함으로써 프라이버시를 지킬 수 있다.)
- Satoshi Nakamoto, Bitcoin Whitepaper Section 10


만약 내 월급 통장 내역이 인터넷에 실시간으로 공개된다면 어떨까?


내가 편의점에서 얼마를 썼고, 누구에게 용돈을 보냈는지 전 국민이 볼 수 있다면? 끔찍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은행을 쓴다. 은행은 "너와 나(은행)만 알고 있자"며 내 장부를 꽁꽁 숨겨준다. 이것이 전통적인 프라이버시다.


그런데 비트코인은 정반대다. 비트코인의 모든 거래 내역은 전 세계에 생중계된다. "A지갑에서 B지갑으로 10비트코인 이동" 이 사실을 숨기면 '이중 지불'을 막을 수 없기 때문에, 사토시는 장부를 '투명한 유리'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프라이버시는 포기해야 하는가? 내 자산이 얼마인지 동네방네 떠들고 다녀야 하는가?


사토시 나카모토는 여기서 '정보 차단벽(Firewall)'의 위치를 옮기는 천재적인 발상을 제안한다.


1. 기존 모델(은행)

차단벽의 위치: 은행 ↔ 대중(Public)

은행은 내 신원과 거래 내역을 모두 알고 있다. 다만 대중에게 보여주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은행이 해킹당하거나 직원이 유출하면 끝장이다.)


2. 새로운 모델(비트코인)

차단벽의 위치: 내 신원(Identity) ↔ 공개키(Public Key)

대중은 '거래 내역'을 훤히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지갑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이것은 마치 '가면무도회'와 같다. 광장(블록체인)에서 수만 명의 사람들이 춤을 추고 돈을 주고받는다. 누구나 그 광경을 볼 수 있다. "저기 빨간 가면이 파란 가면에게 돈을 줬네." 하지만 빨간 가면을 쓴 사람이 철수인지, 영희인지, 아니면 일론 머스크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토시는 이것을 주식 시장의 시세표(Tape)에 비유했다. 증권거래소 전광판을 보면 "삼성전자 100주 매수"라는 정보는 뜨지만, "군포사는 김철수가 삼"이라고 뜨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것을 가명성(Pseudonymity)이라고 부른다. 실명 대신, '1A1zP1...'같은 복잡한 문자열을 쓴다. 이 주소는 나의 '디지털 아바타'다.


사토시는 백서 10장의 끝부분에서 섬뜩한 경고를 덧붙인다.


"...linking could reveal other transactions belonged to the same owner."
(...만약 한 번이라도 키의 주인이 누구인지 밝혀지면, 그 주인이 했던 다른 모든 거래까지 줄줄이 엮여서 드러날 위험이 있다.)

가면무도회의 룰은 냉정하다. 내가 실수로 딱 한 번이라도 "이 빨간 가면, 사실 나 김철수야"라고 말하는 순간(예: 내 실명 인증된 거래소에서 지갑으로 출금), 사람들이 내 과거 동선을 모두 추적할 수 있게 된다.


"어? 3년 전에 파란 가면한테 돈 보낸 것도 김철수였어?"


그래서 사토시는 한 가지 조언을 남겼다.

"거래할 때마다 매번 새로운 키를 사용하라."


가면을 계속 바꿔 쓰라는 것이다. 그래야 하나의 가면이 들통나도, 나의 전체 자산이 드러나지 않는다.


나는 이 대목에서 '프라이버시'와 '비밀'의 차이를 생각한다. 비밀은 '아무도 모르게 숨기는 것'이다. 떳떳하지 못한 느낌을 준다. 프라이버시는 다르다. '내가 누구에게, 무엇을, 얼마나 보여줄지 스스로 결정하는 권리'다.


비트코인은 투명하다. 그래서 정직하다.(돈의 흐름을 속일 수 없으니까) 동시에 비트코인은 불투명하다. 그래서 자유롭다.(내가 누구인지 밝힐 의무가 없으니까)


사토시가 만든 이 유리 금고는 인류 역사상 가장 모순적이고도 아름다운 발명품이다. 그는 우리에게 숨길 필요 없는 정직함과 침해받지 않을 사생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선물했다.


당신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당신이 올바른 키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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