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알람이 울린다. 눈을 뜨는 순간부터 치열한 전쟁의 서막이다. 전쟁의 상대는 바로 나. 제일 치열한 전장은 역시 아침 운동이다.
‘오전에 헬스장 가기’라는 거창한 목표를 세웠지만, 내 안에서는 늘 이런 치열한 대화가 오간다. “일어나, 가서 땀 흘려야지!” vs “아냐, 10분만 더 자도 괜찮아! 잠깐만 눈 감고 있자…” 결과는 보나 마나였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는 게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사람이고, 오늘도 이 전쟁에서 처참하게 패배했다. 한 시간 동안 침대에서 굴러다니다 겨우 몸을 일으켜 운동을 다녀오면 이미 점심이다.
내가 이렇게나 의지가 약한 사람이었나, 매일 자괴감을 느끼며 하루를 시작한다. 정말 싫다, 이런 나 자신.
겨우 씻고 나와 점심을 먹는다. 점심 식사 후 혈당 스파이크를 정통으로 맞은 나는 미친 듯이 몰려오는 졸림을 참고 책상 앞 의자에 앉는다.
노트북을 펴고 계획했던 일들을 시작하려는데, 휴대폰 진동이 울리기 시작한다.
– “여보세요?” – “어, 딸. 마트 가서 계란이랑 우유랑 콩나물 좀 사 와.”
엄마의 전화였다. 이것이 ‘가족 집사’ 생활의 시작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집중 좀 해보려고 하면 이번엔 언니의 호출이다. 회사로 데리러 오란다.
언니가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미리 사다 놓으라는 카톡은 옵션이다. 맛집 웨이팅은 평일 낮에 노는(?) 내가 가서 포장해 오는 게 국룰이 되었다.
엄마의 병원 예약부터 치과 진료, 심지어 미용실 예약과 픽업까지 모두 내 담당이다.
언니가 아플 땐 내가 병원에 모셔다 드리고 모셔 오지만, 신기하게도 내가 아플 땐 나 혼자 운전해서 병원에 간다.
도서관에서 예약한 책을 찾고 반납하는 ‘도서 셔틀’까지 하고 나면 내 하루는 온데간데없다.
참다못해 비명을 지른다. “아!!!! 쫌!!!!! 나도 지금 일하고 있잖아!!!” 그러면 가족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모아 말한다. “너 집에 있잖아! 좀 해주면 안 되냐?!”
아, ‘집에 있다는 것’은 가족들에게 ‘언제든 소환 가능한 5분 대기조’라는 뜻이었나 보다.
앞에서 나의 무모한 시작을 그토록 지지해 주던 그 천사 같은 가족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서러움의 정점은 식탁에서 터졌다. 엄마는 회사 가는 언니를 위해 정성껏 도시락을 싸면서 내 반찬은 남겨두지 않았다. 양이 좀 부족하다는 게 이유였다.
심지어 “언니 오늘 반찬 뭐 가져감?” 언니한테 물어보면 나는 구경도 못 한 반찬이다.
– “엄마, 내 거는 왜 안 남겨 놨어?” – “너는 집에 있으니까 아무렇게나 대충 챙겨 먹으면 되지.”
이게 한두 번이 아니다 보니 서운함이 쌓여버렸다.
언니의 노동은 밖에서 하는 거라 ‘도시락’으로 대접받고, 집에서 컴퓨터 앞에서 하는 나의 노동은 ‘아무렇게나’ 때워도 되는 가벼운 것이었을까. 물론 지금은 시작 단계고 수입이 없으니 이해는 간다.
못 먹어서 서러운 게 아니다. 당연하다는 듯 내 존재를 순위 밖으로 밀어내는
엄마의 태도가 서운한 거였다. 내가 서운한 기색을 보이면
엄마는 오히려 나를 ‘먹는 거에 목숨 거는 애’로 만든다.
– “너는 집에 있으니까 아무렇게나 챙겨 먹으면 되지, 왜 먹는 걸로 그러냐.”
그놈의 ‘집에 있잖아’는 마법의 주문이다.
한 달에 한 번,
엄마의 흰머리를 가려주는 염색도 당연히 내 몫이 되었다. 거의 3주에 한 번씩 염색을 해야 하는 엄마는 미용실에서 돈을 주고 하는 게 아깝다고 나보고 해달라고 했다.
사실 한 달에 한 번 염색도 보통 일이 아니다. (지금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그게 뭐라고…’ 하실 분들도 계시겠지만 한번 해보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엄마는 분명 약속했다. 염색 세 번 해주면 수고비로 10만 원을 주겠다고.
나는 솔직히 그 돈을 엄마가 줄 거라고 생각은 안 했지만, 만약 준다면 꼭 받아야지! 그리고 모아서 내가 강의나 필요한 것들을 구입해야지 하며 정성껏 염색약을 발랐다.
하지만 세 번의 염색이 끝나고 약속된 10만 원을 청구하자,
“줄게, 기다려봐. 머리 염색 한 번 해주는 거 가지고 생색은~”
돌아오는 건 ‘줄게’라는 말뿐…진짜 준 적은? 없다.
나의 노동력은 ‘가족애’라는 이름으로
무한 할부 결제된 모양이다.
돈은 못 받았지만, 다행히(?) 엄마의 머리색은 아주 잘 나왔다. 하도 염색을 해주다 보니 이제 달인이 되어 간다. 예전에는 한 시간이 걸리던 염색 바르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요즘은 40분 정도?!
내 생활은 없어졌고, 내 일의 가치는 콩나물 심부름보다 낮아졌지만, 나는 오늘도 간장계란밥을 먹으며 노트북을 켠다.
이 집사 생활을 청산하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집에서 하는 이 일이 ‘진짜 일’이라는 걸 결과로 증명해 내는 것뿐이니까. 그것은 결국 수입이겠지…?! 하하
오늘도 나는 ‘집에 있는 사람’의 비애를 딛고, 아주 무모하게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