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를 읽고
산책클럽에서 읽은 시기: 2023. 2. 24~3. 3
아침이 밝아오는 것을 확인하고 요람으로 다가가 잠든 코요티토를 살펴보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었다. 사랑스런 아내 주애너는 이미 옥수수빵을 굽기 시작했고 따뜻한 냄새가 차올랐다. 멕시코만의 작은 오두막, 가난하고 억눌린 원주민의 삶이지만 이런 아침 이라면 가족의 노래, 따뜻하고 부드러운 노래로 감싸였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리라.
그런데 코요티토가 전갈에게 물리면서 순식간에 가족의 노래는 소멸되었고, 키노는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바다로 뛰어 들었다. 해초와 여러 바다 생물들과 바위 사이를 조심스레 헤아리면서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진주의 노래‘를 기원하면서. 카누 위로 올라온 그가 차례 차례 건져 올린 조개를 열고 마침내 세계 제일의 진주를 발견했을 때 아내 주애너가 소리쳤다. 코요티토의 부기가 가라앉고 있다고. 독이 사라지고 있다고. 그럼, 코요티토의 치료를 위해 진주를 찾았던 건데 코요티토가 낫게 되었으니 이제 진주는 필요 없는 걸까? 진주는 이 가족을 어디로 데려갈까? 어떤 노래를 들려줄까?
흥미진진하고 긴장감 넘치는 소설의 흐름에서 특히 두 장면이 마음에 남았다. 첫 번째는 괴한들의 습격을 받고 공포에 가득찬 아내 주애너가 몰래 진주를 버리려 했을 때였다. “키노, 이 진주는 악마예요. 우리를 파멸시키기 전에 우리가 없애 버리도록 해요. 돌로 쳐서 부숴버리자구요.”(p.111) 이미 지난 밤 주애너는 이렇게 간청했지만 키노의 결심은 더욱 확고해 졌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른 새벽 주애너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따라나와서는 진주를 내던지려는 그녀의 팔을 비틀고 주먹으로 얼굴을 치고 넘어진 그녀의 허리를 걷어찼다. 이런 키노의 모습은 진주 때문에 파괴된 집과 카누, 신변의 안전, 이웃과의 관계 보다 가장 비참한 것이리라. 주애너는 누구보다 용감하고 지혜롭고 성실하고 착한 아내였던 것이다.
이 첫번째 인상적인 장면에서 자연스레 ‘반지의 제왕’을 떠올렸다. 스미골이 반지를 소유했을 때 사우론의 지배를 받고 사악하게 되는 것처럼, 진주는 그를 강팍하게 했다.
부자가 되었으니 무엇을 할 것이냐는 질문에 그는 교회에서 결혼식을 하겠다고, 새옷을 입겠다고 했다. 쇠적살도 떠올렸다. 그리고 머뭇거린 후 ‘소총을, 소총을 살 것 같아요.‘라고 했는데 소설은 ’장벽들을 허물어 버린 것은 소총이었다. 감히 바랄 수 없는 것이기는 했지만‘ 이라며 수식하고 있었다. 소총은 비싼 가격 이상을 의미하고 아마도 지배계급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피지배계급 원주민으로서 글자를 읽지 못하고 정보가 없기 때문에 지배계급으로 부터 속임 당하며 살아온 매일들, 코요티토를 학교에 보냄으로써 그 분노를 제거하려는 키노의 바람이 과연 욕망일까? 소총을 소지함으로써 지배계급도 쉽게 무시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 욕심일까? 그것이 죄가 되어 키노를 괴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일까? 키노의 신분과 처지를 생각하자면 이러한 키노의 바람을 욕망이 아닌 정당한 권리 혹은 저항이라고 용인하고 싶다. 하지만 개인적 마음을 살펴 볼 때면 진주가 결코 중립적인 도구가 아닌 목적과 전부가 되는 것을 인정해야 하리.
두 번째 조마조마했던 장면은 진주의 제 값을 받기 위해 북쪽 도시로 향하는 키노 가족이 추격자들에게 쫓기고 있을 때였다. 은밀히 도망치는 것 자체가 숨막히는데 아기까지 있다면 이게 과연 가능할까. 긴박한 이동 중 잠시 머물 때에도 주애너는 울음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숄로 아기 얼굴을 덮었다고 했는데, 나는 혹시 그들의 실수로 아기가 질식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아기의 울음소리 때문에 잘못된 행동을 하게 되지는 않을까?
이 장면은 김종삼 시인의 시 ‘민간인’을 떠오르게 했다.
1947년 봄/ 심야(深夜)/ 황해도 해주(海州)의 바다
이남(以南)과 이북(以北)의 경계선 용당포(浦)/
사공은 조심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嬰兒)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水深)을 모른다.
한밤 중 미동 없이 탈출하는 작은 배, 그런데 그곳에서 아기가 울기 시작했다. 엄마는 이웃의 냉혹한 시선과 급박한 상황 때문에 반사적으로 아기의 입을 틀어 막았겠지. 그러나 인천항에 도착했을 때 아기의 몸은 이미 식어 있었다. 이 역사적 사실 보다 시에서는 엄마가 아기를 바다에 던진 것처럼 묘사되는데 무엇이든 그것은 더 할 수 없는 참담한 밤이었다.
키노는 아름다운 진주 표면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주애너와 자신을, 글자를 읽는 아들을, 희망과 안온과 평안을 보았다. 그러나 단 며칠 후 그 진주의 표면은 전혀 다른 것을 비추고 있었다. ‘진주의 표면은 회색빛이었고 궤양처럼 보였다. 악마의 얼굴들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고 활활 타오르는 불빛도 보였다. 그리고 진주의 표면에는 웅덩이에 빠진 사내의 미쳐버린 듯한 눈도 보였다. 작은 동굴 속에서 총알이 관통되어 누워 있는 코요티토의 모습도 보였다. 진주는 흉측했고 어둠침침했으며 악성 종양 같았다. 키노는 뒤틀리고 미친 듯한 진주의 노래를 들었다.‘(p. 170)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던 존 스타인벡의 질문과 절규는 무엇일까. 멕시코만의 불안정한 대기가 현실적인 사물은 몽롱하게 비추고 오히려 미신적인 것을 믿게 만들 듯 그의 시대가, 키노가 ‘진주‘의 모습을 왜곡하고 불투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나는 무엇에다가 소망과 바람을 투영하고 있을까. 어떤 욕망을 가장 소중한 것 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고 있을까. 흐릿한 시선과 완고한 마음으로 버티고 있을까.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아 줄곧 되풀이되는 이야기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이제 그 이야기 속에는 오직 좋은 것과 나쁜 것, 검은 것과 흰 것 그리고 선과 악만이 남아 있을 뿐, 그 사이의 것은 전혀 없었다.
“만약 이 이야기가 우화라면, 사람들은 어쩌면 이 이야기로부터 자신만의 의미를 찾아내고, 자신의 인생을 해석해보게 될 것 같다. 어쨌든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p.7
눈을 뜬 키노는 먼저 희미하게 밝아오는 사각형 문을 바라보고 코요티토가 잠들어 있는 요람을 살펴보았다. p. 10
집 안에서는 옥수수빵 반죽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요리판 위에서는 잘 구워진 옥수수빵 냄새가 짙게 풍겨왔다. p.12
키노는 주애너가 코요티토를 들어 내릴 때 요람을 매단 줄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주애너는 코요티토의 얼굴을 씻어주고 숄로 둥글게 감싸 품에 안았다. 키노는 직접 보지 않아도 그러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주애너는 부드럽게 옛 노래를 불렀다. 단지 세 개의 음조만으로 되어 있는 노래였지만 음정은 끝없이 변화할 수 있었다. 그것 역시 가족의 노래 중 한 부분이었다. 또한 모든 부분이기도 했다. 노래를 때때로 높은 음정으로 변하며 마치 이것이 안락함이며 따뜻함이며 또 모든 것이라고 말하는 듯 했다. p. 13
그들은 의사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무식함과 잔인함과 탐욕과 욕망과 죄악상을 낱낱이 알고 있었다. 그가 낙태수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과 동냥이랍시고 동전 몇 푼을 안색하게 던져준다는 것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그의 환자가 시체가 되어 교회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보았다. p.24
키노는 잠시 머뭇거렸다. 이 의사는 그와 같은 종족이 아니었다. 거의 4백여 년 동안 키노의 종족을 억압하고, 굶주리게 하고, 약탈하고, 경멸했으며 또한 겁먹게 만들었던 종족의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원주민들은 그 문 앞에서는 공손해야 했다. 그리고 그 종족 사람들에게 다가갈 때면언제나 그랬듯이, 키노는 무력감과 두려움과 분로를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의사의 종족은 마치 우직한 짐승을 다루듯이 키노의 종족에게 말을 내뱉었기 때문에, 의사에게 말을 거는 것보다는 차라리 의사를 죽이는 것이 더 쉬운 일이었다. p.25
비록 이른 새벽이었지만, 몽롱한 신기루가 나타났다. 사물을 크게 보이게도 하고 사라져버리게도 만드는 불안정한 대기가 멕시코 만 전체에 떠다니자 모든 풍경이 비현실적으로 보였고 눈에 보이는 것조차 신뢰할 수 없었다. 그로 인해 바다는 무척 명료했지만 육지는 꿈결처럼 흐릿했다.
그래서 멕시코 만에 사는 주민들이 영혼과 관련된 것이나 공상적인 것들은 믿지만 자신들의 눈에 보이는 먼 풍경이거나 분명한 사물의 윤곽과 같이 시각적으로 정확한 것들은 믿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p.33
키노는 진주 너머로 아기의 어깨에서 부기가 빠져나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기의 몸에서 독이 사라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키노는 손아귀의 진주를 힘껏 움켜 쥐었고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이 온몸을 휘감았다. p.44
마을은 군락을 이루며 살아가는 동물과 같다. 마을에는 신경조직이 있거 머리와 어깨와 발이 있다. 마을들은 서로 서로 독립되어 있는 것이어서 똑같은 마을은 없다. 마을은 저마다 완전한 감정을 지니고 있다. 새로운 소식이 마을에 어떻게 퍼져나가는지는 쉽게 풀 수 없는 비밀이다. 새로운 소식은 어린 소년들이 앞다투어 달려가 전해주거나, 여자들이 울타리 너머로 전하는 것보다 더 빠르게 퍼지는 것 같다. p.45
키노와 주애너가 다른 어부들과 힘께 오두막집으로 돌아오기 전에 이미 마을의 온 신경조직은 키노가 세계 제일의 진주를 발견했다는 소식에 흥분해 술렁이고 있었다. 숨이 목까지 차오른 소년들이 숨을 고르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어머니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p.46
진주의 본질과 인간의 본질이 뒤섞이자 기묘한 검은 찌꺼기가 침전되었다.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키노의 진주와 관계를 맺게 되었다. 키노의 진주는 모든 사람들의 꿈이며 사색 그리고 음모와 계획, 미래와 소원, 필요와 탐욕, 갈망이 되었으며 그것을 방해하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키노였다. 그로 인해 키노는 기묘하게도 모든 사람들의 적이 되어 버렸다. p.49
“내 아들은 학교에 갈 겁니다. 내 아들은 글을 읽게 될 것이고 책을 많이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글도 쓸 줄 알게 되어 책도 쓰게 될 겁니다. 내 아들은 셈도 할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렇게 해서 우리들은 자유롭게 해줄 겁니다. 이 아이가 읽고 쓰고 셈하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들도 이 아이를 통해 알게 될 겁니다.” p.54
의사는 유창한 언변으로 계속 말했다.
“때로는 다리가 바싹 말라버리거나 눈이 멀거나 등이 비틀어지기도 한다네. 여보게, 나는 전갈에 쏘인 증세에 대해 잘 알고 있고 또 잘 고친다네.”
키노는 분노와 증오가 서서히 공포가 되어감을 느꼈다. 자신이 모르는 것을 이 의사가 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신의 명확한 무지를 무기로 의사가 갖고 있을 수도 있는 지식에 맞서 겨루는 모험을 할 수는 없었다. 그의 종족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는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그가 언젠가 말했듯이 책에 있다는 내용이 실제로 책에 있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을 때까지 이런 일은 계속 될 것이었다. 그는 코요티토의 생명과 정상적인 몸을 걸고 모험할 수는 없었다. p.64
정확한 답변을 생각하던 키노가 마침내 말했다.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 p.75
“이건 악마에요. 이 진주는 죄악과 같은 거에요. 우리를 파멸시키고 말거에요. 그걸 버리세요. 돌로 쳐서 부숴버려요.” p.79
진주는 너무 아름답고 또 너무 부드러웠으며 진주 스스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것은 약속과 기쁨의 노래이며 미래의 안락함과 안정을 보장하는 노래였다. 진주의 따사로운 광채는 질병을 치료하는 습포와 수모를 막아주는 보호벽을 약속해 주고 있었다. 또한 진주는 굶주림이 문을 넘어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다. 진주를 바라보고 있자 키노의 눈은 한결 부드러워졌고 얼굴을 편안해졌다. p.81
이웃들은 한결같이 갑작스런 재산으로 인해 키노의 머리가 돌아버려 다른 부자들처럼 되거나 탐욕과 증오와 냉혹함으로 이루어진 악마의 팔다리가 그에게 들러붙지 않기를 소망했다. 키노는 모두들 좋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진주가 그를 타락시킨다면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토록 착한 아내 주애너와 예쁜 아기 코요티토,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아기들까지, 진주가 그들 모두를 타락시킨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p.86
“키노, 이 진주는 악마예요. 우리를 파멸시키기 전에 우리가 없애버리도록 해요. 돌로 쳐서 부숴버리자구요. 본래 있었던 바다 밑으로 던져버려요. 키노, 이건 악마예요. 악마라구요.”
그녀가 말하고 있는 동안 키노의 눈에는 다시 생기가 돌며 강렬한 빛을 내뿜었고 온몸의 근육과 함께 그의 의지도 단단해졌다. p.111
그녀가 팔을 들어 바다에 진주를 던지려 할 때 그가 달려들어 팔을 붙들고 그녀의 손을 비틀어 진주를 빼앗았다. 잔뜩 움켜쥔 주먹으로 얼굴을 때려 그녀가 조약돌 위에 쓰러지자 그는 옆구리를 발로 걷어찼다. 희미한 빛 속에서 조그만 파도가 그녀의 몸에 다가와 부서지는 것이 보였다.p. 115
그는 자신이 '사내대장부‘라고 말했고, 그 말은 그녀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그것은 그가 반은 미친 사람이며 반은 신이라는 걸 의미하는 말이었다. ~ 그녀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받아들였으며 또한 원하기도 했다. 그녀는 당연히 그를 따를 것이며, 그 점에선 아무런 의문의 여지도 없었다. 가끔은 분별력과 경계심과 보전 의식과 같은 여성의 특성이 키노의 남성성을 제지하고 나서며 그들 모두를 구할 때도 있었다. (p. 117
“그 진주 속에는 악마가 있어. 그걸 팔아서 그 악마를 넘겨줬어야 하는 건데. 어쩌면 지금이라도 그걸 팔아서 너를 위한 평화를 살 수도 있을 거야.”
그러자 키노가 입을 열었다. “형님, 내 목숨보다 더 가혹한 모욕을 당했어요. 해변에 있는 카누가 부서졌고 집은 불타버렸고 덤불 속엔 시체가 누워 있어요. 도망갈 길이 전혀 없어요. 우리들을 숨겨 주세요. 형님.”
“다만 아기가 울까봐 걱정이오. 아기가 울지 않도록 잘 지켜봐요.” p.157
키노는 아기가 칭얼대는 소리를 들었지만 소리가 약한 것으로 보아 주애너가 숄로 아기의 머리를 덮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p.158
진주의 표면은 회색빛이었고 궤양처럼 보였다. 악마의 얼굴들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고 활활 타오르는 불빛도 보였다. 그리고 진주의 표면에는 웅덩이에 빠진 사내의 미쳐버린 듯한 눈도 보였다. 작은 동굴 속에서 총알이 관통되어 누워 있는 코요티토의 모습도 보였다.
진주는 흉측했고 어둠침침했으며 악성 종양 같았다. 키노는 뒤틀리고 미친 듯한 진주의 노래를 들었다. p. 170
그러자 키노는 팔을 뒤로 젖혔다가 온 힘을 다해 진주를 내던졌다. p.171
#산책클럽 #진주 #존 스타인 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