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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뉴스 Aug 15. 2023

안개 낀 밤의 거리들

하늘의 푸르스름한 색깔을 확인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걸었다. 하루가 끝나 간다는 즐거움이 몸 안 가득 차올랐다. 오늘은 푸르스름해졌으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는 것을 택하기로 했다. 하지만 여전히 골치 아픈 일들을 처리해야만 했다. 먹고 자고 만나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 등, 나의 개인적 사건들이 날개를 펴는 구역을 일상세계라고 한다면, 이러한 일상 세계를 벗어난 일의 영역―나는 교수들의 연구 용역을 도와서 정책 연구 보조원으로 일하고 있다―곧, 행정과 권력의 사건들이 솟아오르는 곳을 공적세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공적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이 세계의 여러 일들을 처리해야만 했다. 이 세계의 일들이란 사람들의 삶에 옅은 영향을 끼치거나 때로는 그들의 운명에 굵은 선을 그어 버리는 것이었으므로 나는 이 공적 세계가 다소 두렵게 느껴졌다. 물론 타인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 일은 없겠지만, 그럼에도 사람의 생활 규칙을 지배하는 무언가를 다룬다는 것에서 무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도 규칙이나 규율, 법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의 삶에 간섭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니까 말이다. 이것이 일이다. 법률가의 일은 이렇게 타인의 삶을 결정지어 버리는 악마적 힘을 보유하고 있다. 타인의 삶을 규율하는 문장과 글을 만들어 내는 것, 나는 이것이 법률가의 일임을 분명하게 알고 있다. 나는 이러한 일들 앞에서, 일을 대하는 전문가가 되고 싶었다. 공은 공, 사는 사로 분명하게 분리된 이원적 세계를 평탄하게 유지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원적 세계의 진실에 더 다가가 말해 보자면, 사실은 일상세계의 팽창을 기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먹고 자고 만나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개인적 사건만이 나의 온 세계를 차지할 수 있다면, 그것은 행복한 일이 되지 않을까? “하고 싶은 것을 한다.”는 것, 몇 글자 되지 않는 이 단순한 문장을 현실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이 글자의 수 억 배에 달하는 글자가 또 다른 글자들, 예컨대 정신과 몸을 달련하기 위한 수많은 글자가 필요할 것이다.  


 아파트로 진입하는 초입 부근에 작은 공원이 있다. 이 공원 옆으로는 꽤 큰 상가가 한 채 있다. 그 상가 일층에는 여러 술집이 모여 있다. 춥지 않은 11월 초순, 아마도 마지막 노상음주를 즐기기 위하여 사람들은 테이블을 끄집어냈고 담배를 피워대며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길목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 이 거리, 이 거리에 낯선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뜯어보았다. 단호한 표정, 분명한 목적지로 향하는 표정, 그리고 피곤한 표정, 아무래도 지쳐 보이는 표정, 통화를 하는 사람의 표정, 밥을 먹기 위한 것인지 상가로 향하는 사람의 표정  길가에는 많은  표정이 떠다니고 있었다. 푸르스름한 바다에 떠다니는 파도들, 끊임없이 유영하는 파도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들을 바라보고 있다. 표정들이 오고가는 길목, 파도들이 주름잡은 이 길목에서 나의 옛 그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다들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 공원 벤치에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글쎄, 나는 어디로 가고 있었던 걸까? 공원에 한참을 앉았다. 별로 춥지 않은 날씨였기 때문에 가만히 음악을 들었다. 세상의 고요함이 나의 대지 위에 펼쳐진다. 그리고 파도들과 표정들이 분주하고 오고 다녔다.   언젠가 공적세계가 일상세계와 마음 속 내면세계를 압도하는 때가 있다. 인간은 노동 할 수밖에 없고 노동을 통해 보람을 얻는다는 고전적인 노동법의 시각을 통해서는 노동은 해야만 하고 없어서는 안 되는 무엇이 된다. 노동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노동자와 고용인과의 관계는 불균형이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노동자를 보호하는 노동법의 출현은 정당화 된다. 하지만, 나는 노동이 꼭 필요하다는 전제에 대해 의심을 품어 보았다. 노동하지 않지만, 일상 세계를 유지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완벽한 세상일 것이다. 노동 없이 사는 세상, 그러나 무료함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을 상상해 보았다. 그러다 몇 년을 한 회사에서 일한 친구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지금의 이 체제 이후에 어떤 체제가 시작 될지, 그때의 노동은 어떤 모습일지 근거 없는 이야기들을 서로 늘어놓았다. 꽤 긴 대화가 오고 갔다. 친구의 근황을 묻고 최근에 겪었던 어려운 점을 이야기했다. 서촌 어느 고기 집에서 철판 위에 올려둔 삼겹살을 뒤집으면서 술을 마시고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구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걱정하고 있는 듯 했다. 몇 개월 후 결혼을 앞두었지만 막막한 세상살이의 어려움을 동시에 안고 있었으므로 그는 행복한 고통 속에 놓여있는 듯 했다. 나는 그를 위로할 수 없지만, 그래도 오랜 시간 지켜보았던 친구를 보며 말했다. 너는 정말 괜찮은 놈이라고, 너의 좋은 점과 스스로 좋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점까지 사랑받을 수 있을 만큼 정말 괜찮은 놈이라고 말했다. 친구가 어려움을 토로할 수밖에 없었던 그 어려움을 생각해 보았다. 혼자가 아닌 둘이 된다는 것, 혼자만의 일상 세계가 아니라, 타인의 일상 세계까지 하나의 세계로 통합한다는 것, 그것은 정말 어려운 일일 것이다. 두 개의 공적 세계가 만나는 지점, 두 개의 일상 세계가 결합하는 지점을 찾기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님을 잘 알기 때문이다. 친구도 내게 이야기 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어려움들, 늘 그랬듯 이 시간 끝에 좋은 것들이 찾아올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그와의 대화가 늘 좋다고 생각했다. 물음은 물음을 낳고 다시 물음을 낳아서, 물음의 과정으로 이어지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했다. 잠시 후 오랫동안 만나던 연인과 얼마 전 이별한 친구가 도착했다. 친구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수척해진 친구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친구지만, 부쩍 열심히 술을 마시며 다닌다는 소리를 들었다. 입술 위로 거뭇거뭇 자란 그의 수염이 보였다. 그래도 그는 공적 세계에서 살아간다. 애도할 시간을 갖지 못한 채 일상 세계를 탐닉하지 못하면서도 힘껏 일하는 친구를 보며 어떤 역치 같은 것을 느꼈다.  요란한 음악 소리에 때문에 문득 문득 잠에서 깼다. 버스를 타고 졸아 보는 것이 얼마만인지 헤아릴 수 없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고요한 풍경들, 창경궁과 창덕궁을 지나면서 가을 사이로 쓰러져 내린 낙엽들이 보였다. 서울대학교 병원 암센터가 보였다. 아픈 사람들의 도시, 그들은 쾌유를 기원하고 있겠지. 불 꺼진 병동 사이로 몇몇 사람이 지나다니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픈 그들의 삶에는 낮과 밤이 따로 존재할까. 잠을 자다가도 약을 먹거나 주사를 받아야 하는 일상 세계, 아마도 그들은 공적 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간절히 꿈꾸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잃어버린 반쪽의 삶을 어떻게 여실히 느낄 수 있을까. "엔딩 노트"라는 일본 다큐 영화를 본 기억이 떠올랐다. 즐거운 죽음을 맞이하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인간, 죽기 전에 해야 할 리스트를 하나씩 채워가는 주인공을 보면서 알렉산더에게 햇빛을 가리지 말 것을 명령했던 디오게네스가 떠올랐다. 아픈 삶이지만, 더 나아간다는 것을 꿈꾸는 것 그것은 크나큰 용기다. 물론 죽음이 곧 뒤 따라 올 때, 잃어버릴 것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조금은 남을 것이다.  계속해서 잠에 들었다가 깨어나고 다시 잠들었다가 깨어나고를 반복했다. 남양주로 향하는 버스를 타기 위해 내렸고 곧장 뒤이어 온 경기도 버스에 다시 올라탔다. 이제 줄지어 가는 버스들은 차고로 돌아가 짧지만 고요한 몇 시간의 휴식을 취할 시간이다. 온 시내를 뒤적이고 부딪쳐온 이 금속 덩어리들에 우리의 운명이 실려 간다. 차안에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지친 표정들, 나와 같이 술을 마셔서 불그레한 얼굴들, 조용하게 고개를 숙이고 가는 사람들, 그들의 표정과 안면을 자세히 보고 싶어졌다. 그렇게 뚫어져라 보고 나면, 그들의 삶이 마치 영화관 스크린처럼 밝게 켜질 것만 같았다. 다들 어떤 생각에 잠겨 있을까. 그들의 집은 어디 일까. 그들은 무슨 일을 하는 사람들일까. 막연한 호기심, 그들을 향한 이름 없는 호기심이 솟았다. 버스에서 내리고 주유소를 지났다. 조금 더 가까운 길을 택하지 않았다. 술기운이 올라왔지만, 걷고 싶었다. 걸음을 옮기면서 습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적당한 온도, 약간은 습하지만 기분 좋은 냄새가 났다. 


 생각에서 깨어났다. 평소와 같은 가로등이지만, 평소와는 다른 은은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시선을 하늘로 쏘아 올려 보았다. 짙은 구름층 사이로 달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리고 드러냈다가 드러내지 않기를 반복했다. 핸드폰을 켜고 날씨를 찾아보았다. 오전은 먹구름, 오후엔 비, 아마도 내일 동원될 예정인 구름들의 집합인가 생각했다. 그 구름들이 곧 무언가를 던지고 달아갈 것만 같았다. 하늘을 자세히 보니 빛이 포개지고 있었다. 대낮에 햇볕이 부셔지는 것처럼 빛이 산란하고 있었다. 숨을 크게 들이 쉬면서 깨달았다. 날씨가 습하고, 그렇게 춥지 않은 탓에 옅은 안개가 끼어 있음을 느꼈다. 공원 옆길 상가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야구에 흠뻑 빠져 있었고 술잔을 들었다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사람들이 앉아있는 장소, 상가들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불빛은 즐겁게 춤추고 있었다. 밤에 취하고 이 계절의 마지막 노상에 취한 사람들의 즐거움이 내게도 전해졌다. 즐거운 사람들, 저 멀리서 나의 시야에 사로잡힌 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공적 세계로 돌아가는 것은 신경 쓰지 않고서 지금의 일상 세계를 충실히 수놓는 그들의 모습이 부러웠다. 지금 몰려든 이 구름이 자신을 흩뿌려 비가 되고 나면, 이제 더 이상 노상에서 술을 마시기 어려운 날씨가 될 것이다. 사람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찰나의 순간에 부셔지고 있는 일상 세계, 그 일상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바쁘게 즐거워야 함을 그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축제는 그렇게 시작 되었을 것이다. 옅은 안개가 낀 밤의 거리들에서 축제는 이렇게 흘러가고 있다. 대화와 제스처, 온갖 소리로 가득한 축제, 잔과 잔의 충돌, 울려 퍼지는 경쾌한 음악으로 떠들썩한 사람들, 마치 확신에 찬 축제, 겨울을 맞이하는 축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이유 모를 충동이 들었다. 이름도 모르는 그들의 향연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욕망이 내 안에서 솟구치고 있었다. 아마도 그들은 이름 없는 나의 삶 또한 환대하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를 품었다. 그러한 축제의 타자가 때로는 커다란 선물이 되곤 하니까 말이다. 우리의 세계가 오직 일상 세계로서 매일 매일, 매 시간 축제로 가득 차 있다면, 세계는 평화로울 것이다. 호모 사케르(Homo Sacer) 마저도 그들의 축제를 축하하는 유쾌한 손님이 될 것이다. 안개 낀 밤의 거리에서 축제를 벌이는 사람들, 그들을 몇 분 동안 바라보다가 나의 세계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 곧 있으면 잠자리에 들어야할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공적 세계를 재로 만들고 일상 세계에 불을 지피는 나의 축제는 어디서 시작되는가? 나 홀로 몸을 누이는 이 딱딱한 돌침대 위인가? 아니면 정갈하게 책들이 자리 잡은 작은 서재 위인가? 삶을 향한 환희에 찬 사랑과 삶에서 불어오는 깊은 절망, 그 모든 것이 어우러지는 승화의 시작은 아마도 나의 글쓰기에서 시작되고 끝나고 있는 것이다. 시작되고 끝나기를 반복하는 나의 축제, 사람들은 저마다의 운명을 타고나는 만큼, 저마다의 축제를 타고난다. 그러한 축제의 운명은 각자의 삶을 따라 피어나고 진다. 어떤 축제는 더 화려하게 피어나고, 어떤 축제는 본래 그러한 것 보다 더 작게 피어나고, 어떤 축제는 급하게 파산을 맞은 은행처럼 쓰러지고 만다. 안개 낀 밤의 거리처럼 아득하고 불분명하게 흔들리는 축제 또한 존재할 것이다. 나의 축제는 어떠한가, 내가 벌이는 축제, 내 글쓰기의 운명을 생각했다. 


 이 작은 방안을 채운 꿉꿉한 냄새를 떠 올린다. 며칠을 손대지 않고 쌓아 두어 바짝 말라버린 냄비와 그릇과 식기들, 언제 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아도 바짝 비틀어져버린 귤껍질들, 하얀 종이컵 안면을 가득 매운 담배꽁초들, 몇 주 째 버리지 못한 맥주 캔과 소주병, 그래도 가끔은 고요함을 얻고자 줄기차게 지져댔던 초의 흔적들, 이 모든 것들이 내 뿜는 공기로 퀴퀴해진 이 방안의 냄새가 내 가슴을 가득 메운다. 이 가슴에 가득 찬 무언가가 말을 뿜는다. 나의 축제를 위한 말들, 삶을 위해, 그리고 삶을 위하는 것을 포기하기 위해 오르내리는 말들, 피에서 태어난 말들, 피를 타고, 피를 태우고, 피를 적시고, 다시 피로 돌아가서 이 세계 위를 적시고 마는 말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글쓰기의 축제, 글쓰기의 운명을 생각한다. 쉼과 분주함 사이를 오가는 이 모든 축제를 떠올린다. 누군가에겐 투쟁이고 누군가에겐 사치이고 누군가에겐 유희의 도구인 글쓰기의 운명, 아득한 이 운명을 받들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축제이자, 동시에 저주인 이 운명에 엮인 족속들, 그들은 언제나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이 세상과 저 세상 양편을 정처 없이 헤매는 광인(狂人)으로서 이 세계를 장식하고 있다. 축제의 광기, 저주의 광기를 동시에 품고서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는 사람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곧 또 다른 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안개 낀 밤의 거리들을 서성이며 그 축제로 향했다가 다시 빠져 나오고 마는 그들의 모습을 나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피를 타고 목구멍으로, 손끝으로 튀어나오는 그들의 반란(反亂)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행위의 주인공들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들의 어리석은 반복, 구원도, 해방도 없는 그 무한의 순환을 나는 결코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은 저녁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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