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과 달리기의 연관성
둘째 아이가 올 초에 뮤지컬 학원에 다니고 싶다고 했다. 9살 먹은 아이 꿈은 뮤지컬 배우이다. 내가 보기에는 딱히 재능과 끼가 있어 보이지 않는데 가족들과 몇 번 보러 다녔던 뮤지컬이 너무 인상적이었나 보다. 초등 2학년은 딱 그런나이다. 뮤지컬을 재미있게 봤다면 뮤지컬배우가 되고 싶은 나이
"그래 열심히 하면 될 수 있을 거야."이런 말로 대충 넘기려고 했는데 둘째 아이는 제법 집요하다. 같은 학교 언니가 출연하는 어린이 영어 뮤지컬 팸플릿을 가져와서 보러 가자고 했다. 어린이 영어 뮤지컬은 영어 말하기 대회의 화려한 버전 같았다.' 어린 나이에 어떻게 저 많은 대사를 영어로 외웠을까?' 하는 경이로움과 '아이들 노래지도는 안 하셨나 보다 음정 박자가 엉망이네' 하는 것이 나의 감상평이었다.
나에게는 최악이었던 공연이 딸아이에게는 멋져 보였 나보다. 자기도 저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싶다는 욕망이 눈빛에 가득했다. 영어 뮤지컬 학원에 보내달라고 떼쓰는걸 도저히 거기는 아닌 것 같아서 안된다고 했지만 딸아이의 열정에 감동한 남편이 결국 정통 뮤지컬학원을 찾아냈다.
우리 집에서 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대구 수성구에 위치한 학원
학원비도 비싸고 무엇보다 맞벌이하는 우리 부부가 황금 같은 토요일에 일찍 일어나 학원 셔틀을 해야 하는 일정이지만 9살 딸아이의 열정에 우리 부부는 1년 간의 토요일 아침을 희생하기로 했다.
그렇게 3월부터 주 1회 토요일마다 뮤지컬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재미있어하는 것 같더니 시간이 흐를수록 딸아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드디어 깨달은 것이다. 뮤지컬이라는 장르와 자신이 가진 기질의 부조화를
둘째 아이는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이다. 조용히 앉아서 무언가를 사부작사부작하는 걸 좋아한다. 만들기, 그림을 잘 그리고 공부도 곧잘해서 친구들에게 제법 인기가 있다.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 약간 공주병인 것 같다.
그런데 대구 수성구 뮤지컬 학원이 어떤 곳인가? 그 대단한 수성구 맘들이 공부 이외에 예체능적인 소양을 길러주기 위해 선택하는 곳 아니겠는가. 그리고 부러 뮤지컬학원을 찾아오는 아이들은 얼마나 끼가 넘치겠는가
여기서는 적극적으로 본인이 나서서 끼를 발산하고 친구들에게도 먼저 다가가야 할 텐데 우리 아이는 아마 거기서부터 어긋나기 시작한 것 같다. 평소처럼 가만히 있어도 다른 아이들이 다가와주겠지하는 착각에 빠져있었던 것도 같고...
점점 뮤지컬 학원 가는 것을 싫어하는 기색을 내비치더니 급기야 오늘은 학원에 가까워지면서부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이 뮤지컬 학원은 2월의 공연을 끝으로 1년의 학기가 마무리된다. 지금 우리 아이에게 배역도 주어진 상태였다. 무엇보다 뮤지컬 학원은 학원비를 분기별로 납부해야해서 학원비와 2월 공연비도 미리 다 납부한 상태다.(이게 그만 둘 수 없는 진짜 이유다)
오늘 나는 딸아이를 학원에 들여보내면서 "세상에는 이것보다 더 힘들고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하는 순간이 얼마나 많은 줄 아니. 그때마다 울면서 도망치는 건 세상을 사는 올바른 방식이 아니야"라는 아홉 살은 못알아듣고 중년인 나만 알아듣는 말을 하면서 아이를 학원에 보냈다.
우리 딸아이는 지금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는 중이다. 한번 시작하면 중간에 빠져나올 수 없는 프로젝트가 세상 살아가면서 분명히 있다. 좋든 싫든 괴롭던 힘들던 내가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해 무대를 완성 지어야 하는 임무가 우리 아이에게 부여된 것이다.
처음 시작할 때, 학원을 보내달라고 울고 불면서 매달릴 때, 내가 "잘 생각해 봐. 뮤지컬 같은 건 내가 맡은 배역이 있기 때문에 중간에 싫다고 그만둘 수 없어. 넌 공연에 올라갈 때까지 끝까지 완수해야 해"라고 말할 때 그때 막 1학년을 벗어난 어린아이가 무엇을 알 수 있었겠는가 뮤지컬의 주인공이되어 사람들의 발수갈채를 받는 핑크빛 미래만 꿈꾸었을거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11월 토요일 아침, 생경한 동네 한 복판에서 울고 있는 딸아이에게 단호하게 말하며 학원을 보내고 커피숍으로 향했다. 우리 아이가 하는 일이 마라톤을 뛰는 것과 너무 비슷한 것 같다고 느끼며
나도 달리기를 하면서 힘들 땐 그저 오른발 왼발만 생각한다. 멀리 나갔기 때문에 돌아올 수밖에 없을 때 힘들어도 울고 싶어도 계속 '오른발 왼발 오른발 왼발' 되뇌며 달려야 한다. 그러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사랑하는 딸이 내가 지금 글을 쓰고 저지방 라테를 먹는 이 순가에 '오른발 왼발'을 되뇌며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집중하며 그 순간을 견뎌내었으면 한다. 뮤지컬 학원에서 배우는 것이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다른 소외감을 견디는 것과 재능이 없는 일을 지속하는 괴로움이라도 견뎌내면서 완수하는 것을 그 자체로 아름답고 위대하다.
이렇게 대범한 척하지만 결국 마음이 아파서 해야 노트북을 켜고 그럴싸한 말로 자기 위로를 하는 나는 어쩔 수 없는 딸바보 엄마이다. 3개월 뒤 공연이 끝나고 모든 것을 마무리 짓고 다시 게으른 토요일을 맞이하게 되는 날, 그땐 딸아이랑 동네 산책이나 하면서 디저트나 먹으러 가야겠다. 이것이 내가 꿈꾸는 핑크빛 미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