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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사원 김무명 Mar 23. 2021

#8. 단 하루만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오늘이 내 인생에서 가장 가난한 날이다

네 개의 일을 시작하다



2018년 중순, 부모님의 주거문제를 해결하고 내 대출 원금은 1억 3천만 원으로 늘어났다. 빚은 늘어났지만 우리 부부의 수입은 여전히 3백만 원 남짓이었다. 월세를 내고 이자, 원금 상환 등을 하고 나면 수중에 돈이 거의 남지 않았다.


재테크 책을 읽고 이것저것 시도했다. 통장 쪼개기, 가계부 작성, 예적금 가입을 비롯하여 각종 짠테크를 하면서 생활비를 절약했다.


하지만 수입에 비해 고정지출이 월등히 큰 상황에서 크게 바뀌는 것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부부의 수입으로는 일상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결정이 났다.


아내는 프리랜서 일을 그만두고 경력직으로 취업했다. 다행히 아내는 적당한 급여를 받는 중소기업에서 경력직으로 일을 시작했다.


나는 부업을 시작했다. 첫 번째로 시작한 부업은 과외였다. 주말에 주변 아파트 단지를 돌면서 과외 전단지를 붙였다. 그렇게 저녁 7시부터 8시 30분까지 학생 집에 방문해서 과외를 시작했다. 월요일, 목요일에 한 명, 화요일, 금요일에 한 명, 총 두 명의 학생을 가르쳤다.


퇴근 후에 항상 과외를 하러 가야 했기 때문에 회사에서 야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과외를 시작하면서부터 회사에 아침 7시 전까지 출근해서 그날 할 업무를 미리 준비했다. 부업이 본업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했다.


종종 회식이 잡히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다. 당연히 상사들에게 좋게 보이기가 어려웠고, 회사에서 단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토요일, 일요일에는 아침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피시방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주변 아파트 단지에 있는 약 120석의 PC방이었다. 손님들은 컴퓨터로 간편식품과 음료들을 끊임없이 주문했고, 나는 열심히 뛰어다녔다.


© fabrizioverrecchia, 출처 Unsplash


그렇게 나는 회사와 두 개의 과외, 피시방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일주일에 쉬는 날은 하루도 없었다. 아내와 나의 월급, 부업을 모두 합쳐 한 달에 5백만 원 중반의 돈을 벌었다. 우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기 위해 열심히 달렸다. 아기를 준비하는 것은 꿈도 꾸기 어려웠다.




보리 서 말도, 자존심도 없어서



2018년 말, 살고 있는 월세집의 주인분에게 전화가 왔다. 얼마 남지 않은 계약 기간이 끝나면 월세를 전세로 전환하고 싶다고 하셨다. 전세금을 준비할 수 없었던 우리는 계약이 끝나면 집을 비워드리기로 했다.


당장 이사를 준비해야 하는데 갈 곳이 없었다. 아내와 나의 회사 출퇴근과 과외, 피시방 아르바이트 등을 생각하면 외곽으로 이사하기도 어려웠다.


모아놓은 돈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결국 또 월세로 이사 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또다시 빚의 구렁텅이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그러던 중 아내가 처가에 일단 들어갔다가 돈을 모아서 나오는 것은 어떻냐고 제안했다. 신혼집과 가까운 곳에 처가댁이 있었고, 아내가 살던 방이 비어있었다. 감사하게도 장인어른과 장모님께서는 흔쾌히 허락해주셨다.


장인어른, 장모님께 민폐 끼치는 게 정말 부끄러웠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최대한 돈을 빨리 모아서 독립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마음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매달 일정 생활비를 드리기로 말씀드리고, 우리는 처갓집으로 들어갔다. 이 선택으로 7천만 원의 전세대출을 상환할 수 있었다.


© markusspiske, 출처 Unsplash


고등학교 졸업 이후 계속 독립된 생활을 해오다가 어른들과 지내려니 어색했다. 청소, 빨래, 식사 등 나에 관련된 모든 것에 도움을 받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과일도 깎고 화장실 청소도 도맡아 했다.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하려고 했다.


감사하게도 처갓집 식구들이 모두 다 잘 대해주셨지만, 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불편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집안에서도 집 밖에서도 마음을 편히 먹기가 어려웠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일에 치여 돌아와도 늘 밝은 모습으로 지내려 애썼다.


내가 처갓집에 들어가서 살게 됐다고 회사 사람들에게 이야기했을 때, 어떤 선배가 "옛말에 보리 서 말만 있어도 처가살이 안 한다던데 너 정말 대단하다. 난 죽어도 처가살이는 못할 것 같은데."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그 농담을 받아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냥 웃으면서 "그러게요."라고 말했다.




단 하루만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회사를 마치면 과외를 하러 달렸다. 토요일, 일요일에는 PC방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르바이트를 했다. 200원의 교통비를 아끼기 위해 조조 버스를 탔고, 식사는 모두 회사에서 해결했다. 처갓집에서 살았기 때문에 집에서도 마음 편히 쉬기가 어려웠다.


회사에서는 퇴근 후에 회식하러 가자는 말을 매번 거절하는 일이 힘들었다. 또 어쩔 수 없이 야근을 한 날에 과외 학생과 학부모에게 죄송하다고 사과하는 일도 결코 적응이 되지 않았다.


나는 늘 변명하고 사과해야 했다. 언제나 그럴 일이 생겼다.


그 시절, 현실을 살아가는 일이 힘들어질 때마다 공상에 빠지곤 했다. 로또에 당첨되는 상상, 대학생 시절로 돌아가서 비트코인이나 주식에 투자하는 상상, 많은 돈을 벌어서 부동산을 통해 나오는 임대수익으로 전 세계를 누비는 상상 등을 했다. 


대부분의 경우 이렇게 비현실적인 생각들을 하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하던 일을 했다.


하지만 유난히 현실이 버거운 날에는, 굳이 공상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오히려 현실로 돌아오려 할 때 일부러 상상 속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 grakozy, 출처 Unsplash



...


상상 속의 나는 초등학교 2학년 시절로 돌아간다. 아버지가 지인에게 보증을 서주겠다고 이야기하는 바로 전날의 내 몸으로, 현재의 기억이 옮겨간다. 나의 대부분의 공상에서, 현재의 기억이 초등학생의 몸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단 한 시간 정도다.


나는 초등학교 2학년의 모습으로 아버지에게 말을 건다. "아빠, 내일 누가 아빠한테 보증을 서달라고 하면 절대로 해주면 안 돼요. 지금 당장은 믿기 힘들겠지만. 나는 이 일을 막기 위해서 미래에서 왔어요. 내 말을 명심해서 들어야 해요."


그렇게 이야기하면 아버지는 당황하면서도 일단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한다. 반신반의하는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 나는 우리 가족에게 앞으로 벌어질 냉혹한 현실들을 하나하나 이야기해나간다.


앞으로 아빠, 엄마는 30년 넘게 그 사람의 빚을 대신해서 갚게 될 거고, 장사가 잘 되건 안 되건 버는 돈은 전부 다 빚을 갚는데 쓰일 거예요. 1년 365일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게 될 거예요. 빚쟁이들은 가게에 손님들이 있건 없건 매일같이 찾아와서 이자를 받아 갈 거예요.


간신히 빚을 다 갚을 때쯤에 아빠는 칠순의 나이가 돼요. 모든 걸 다 팔아서 빚은 다 갚지만, 수중에 한 푼도 없기 때문에 다시 경비원이나 청소부로 일을 계속하게 돼요. 어머니는 만두피를 반죽하는 일을 너무 오래 해서 손목과 어깨가 좋지 않아요.


맨날 물김치랑 밥만 먹어서 고혈압이랑 당뇨에 걸리게 될 거예요. 일하지 못하면 생계를 이어가기 힘들기 때문에 몸도 아프면 안 되는, 그런 힘든 삶을 살게 될 거예요.


아버지는 크게 충격을 받고 나에게 너는 어떻게 지내냐고 물어본다.


나는 그래도 엄마, 아빠가 많이 사랑해 주고 잘 키워줘서 그냥 잘 지내고 있어요. 회사도 잘 다니고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랑 결혼도 했어요.


그런데 내가 요즘 좀 많이 힘들어요.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 치다 보니까, 하늘에서 나에게 이렇게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준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제발 후회할 행동하지 마세요.


그리고 나는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다시 돌아온 현실은 많이 달라져있다. 아버지는 어린 나의 이야기를 듣고 보증을 서지 않았고, 원래도 잘 살았던 우리 집은 더욱 더 부유해졌다. 나는 회사를 잘 다니면서 돈을 모으고 투자한다.


아내에게 깜짝 이벤트도 준비하고, 처가 식구들에게 해외여행 티켓도 선물한다.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남편이 되고 사위가 된다.


...




이 시기에 이러한 공상에서 깨어나기 힘든 순간이 참 많았었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할 때, 점심시간에 혼자 산책할 때, 주변 동기들이 나완 너무나도 다르게 앞서나간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공상을 했다. 내가 나에게 줄 수 있는 휴식이 그것 하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약 1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1억 3천만 원의 대출금은 2천만 원으로 줄어들었다. 처갓집에 들어가면서 전세 대출금 7천만 원을 갚았고, 아내와 일한 돈으로 신용대출 4천만 원을 상환했다. 남은 대출금은 학자금 대출 2천만 원 정도였다. 위에 적어놓은 내용처럼 특별한 방법 없이, 열심히 일하고 절약해서 대출금을 갚았다.




오늘이 내 인생에서 가장 가난한 날이다



이곳에 나의 기억을 정리하다 보면, 나의 글을 보고 혹시 누가 나를 알아보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된다. 부모님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에게 나의 기록을 들키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다. 만약 현실의 나를 알게 되더라도 그냥 모른척해주면 고맙겠다.


하지만 먼 훗날에 언젠가, 내 스스로가 만족할 정도로 성공하게 된다면 나의 글을 부모님께도 보여드리고 싶다. 언제나 날 응원해 주는 부모님이, 너무 마음 아파할까 봐 말하지 못했던 내 이야기들을 한 번 들려드리고 싶다.


갑작스럽게 밤중에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서 나는 잘 지내고 있다고 이야기할 때, 사실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전화했던 적이 많았다고 말하고 싶다.


대학생 때 돈이 없어서 라면을 한참이나 불려 먹었던 이야기, 아르바이트로 너무 지쳤던 어느 비 오는 날에, 버스비가 없는데도 버스를 타고 카드를 찾는척하면서 두 정거장을 지나 내렸던 이야기, 자판기 거스름돈 통을 뒤적이며 돌아다녔던 이야기.


시간이 흘러, 이런 기억들이 아름다운 추억이 되는 날이 오면, 이 모든 과정들이 나를 만들었다고 자랑하며 가족들과 밤새 이야기해 보고 싶다. 가난도 내 성공을 위한 한낱 과정이었다고 말하게 될 순간을 기다리며, 오늘을 산다.


© hb5__, 출처 Unsplash


이제 공상은 많이 하지 않지만, 힘들때마다 나는 다짐한다. 오늘이 앞으로의 내 인생에서 가장 가난한 날이다. 




... 9편에서 이어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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