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상담일지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런 상담 같은 게 처음이거든요.
처음이라서 어색하거나 부담될 수도 있어요. 그냥 지금 떠오르는 감정이나 생각부터 하나씩 말해 보면 돼요. 예를 들면, 요즘 기분이 어떤지, 고민이 생긴 계기나 상황, 그냥 마음이 답답하거나 막연한 느낌이 드는지.
말이 정리가 안 되어도 괜찮으니까, 편하게 시작해 볼까요?
어제, 조금 바쁜 날이었거든요.
첫째 아이는 친구 집에 놀러 가는 날이라고 아침부터 들떠있고, 초대를 받아 가는 거라 저도 이것저것 준비할 게 있었고요. 아이를 그 집에 보내놓고, 집에 돌아와서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4시에 아이를 데리러 다시 가야지 하는 생각만 되뇌고 있었어요. 사실 아이 친구 엄마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면서 좀 정신이 멍해지긴 했거든요. 가계 자산이나, 아이 공부나... 그런 것들이 많이 뒤처져 있다는 비교가 돼서 좀 멍청한 생각에 빠져있긴 했었어요.
그러다가 4시에 아이를 데리러 갔다가 바로 피아노 학원에 데려다주려고 했는데, 아이 친구네 집에서 이런저런 걸 받아와서 짐이 너무 많아졌길래 계획과 다르게 집에 다시 들렀죠. 제가 항상 동선을 머리에 넣어두고 움직이거든요. 좀 집착적이에요. 한번 나간 김에 할 수 있는 걸 다 하고 돌아오려고 해요. 14층 우리 집에서 짐을 다 챙겨서 12층 아이 친구네 집에 들러서 애를 데리고 피아노 학원으로 바로 갔다가, 나는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다가, 한 시간 후에 피아노학원에 가서 애를 데리고 바로 수영학원으로 가는 거예요. 그게 제 계획이었어요. 그런데 계획과 다르게 집에 다시 들르게 된 거죠.
그런데 집에 와 보니 저희 친정엄마가 와 계시는 거예요. 그 순간에 정신이 확 드는 게, 원래 그날은 제가 둘째 어린이집 하원을 시키고 둘째 영어학원에 데려다주었어야 하는 날이었어요. 그러니까 아까 그 동선 맨 앞에 둘째 어린이집과 영어학원이 있었어야 했던 거예요. 근데 그걸 정말 까맣게 잊어버리고... 깜빡한 게 아니라 정말 까맣게 잊은 거예요. 그리고 친정엄마가 주기적으로 아이들 돌봐주러 오시는 시간도 잊고 있었던 거예요. 현관에 서서 예상치 못한 친정엄마를 발견하고 내가 뭘 놓쳤는지에 대해서 얘기하던 그 짧은 순간에 제가 어떤 감정이 들었는지 아세요?
그 순간, 아마 여러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왔을 것 같아요. 놀람, 당황, 죄책감,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실망 같은 감정이 들지 않았을까요?
특히 평소에 동선을 꼼꼼하게 계획하고 움직이는 성향이라면, 중요한 걸 빠뜨렸다는 사실 자체가 굉장히 충격적으로 다가왔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혹시 그 순간에 머릿속이 하얘지거나,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나요? 아니면 "어떻게 이걸 까맣게 잊어버릴 수가 있지?" 하는 자책이 먼저 들었을까요?
맞아요. 당황하고 자책감이 들었고요.
그리고 견딜 수 없었던 건 친정엄마의 비난이었어요. 아니, 비난이 날아올 거라는 두려움이요.
그 순간, 단순히 “아, 깜빡했네” 정도가 아니라 비난을 받을 거라는 두려움이 가장 크게 다가왔군요. 아마도 어머니께서 실망하시거나 화를 내실 거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을 수도 있고요.
혹시 이런 일이 처음이었나요? 아니면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실수했을 때 비난을 받는 경험이 이전에도 있었던 걸까요?
매 번요. 매번 그랬어요.
뭘 잃어버리거나, 뜨거운 걸 들고 가다가 엎어버렸을 때나, 내가 어떤 실수를 해도 늘 엄마가 날 원망스러워 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렇군요. 그러면 그 순간 단순히 한 번의 실수 때문이 아니라, 과거부터 쌓여온 경험들까지 한꺼번에 떠오르면서 더 강한 두려움과 자책감이 밀려왔을 것 같아요.
어머니께 실수할 때마다 비난을 받았다고 느꼈다면, 혹시 어머니의 반응을 먼저 걱정하고,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마음이 평소에도 강한가요? 예를 들면, 뭔가를 잊어버리거나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이걸 어떻게 해결하지?"보다 "엄마한테 뭐라고 하지?" 같은 느낌이었나요?
어렸을 때는 분명 "엄마한테 뭐라고 하지?" 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거짓말도 많이 했고, 단순한 잘못도 쉽게 인정하지를 못하고. 그 버릇을 학교에서도 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넘어져서 무릎이 깨졌을 때도 내가 왜 넘어졌는지 변명을 했어요. 남탓을 하거나, 얼마나 넘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는지, 그럼에도 어떤 불운으로 넘어져버렸는지 설명하는거에요. 그래야 덜 비난받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호기심에 아빠 면도날을 만져봤다가 피가 철철 난 적도 있었는데, 그런 짓을 왜 했냐는 비난을 받기가 싫어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비밀로 했던 적도 있어요. 학교에 입학하기도 전, 아주 어릴때였는데도요.
어른이 되어서는 사회에서 좋은 기억도 많이 쌓았고 인정받는 일들도 있었으니까, 조금 더 정직해질 수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한 번씩 또 그런 감정이 밀려와요.
어릴 때부터 형성된 반응 패턴이 아직도 무의식적으로 올라오는 것 같아요. 어릴 땐 비난이 너무 두려워서 거짓말을 하거나 실수를 숨기려고 했고, 그게 그냥 자연스러운 생존 방식이었던 거죠.
그런데 어른이 되면서 사회에서 인정받고 좋은 경험도 쌓이면서 "이제 난 정직하게 말해도 괜찮아."라고 느낀 순간들이 있었던 거고요. 그 덕분에 예전보다 훨씬 성장하셨고요. 하지만 가끔씩, 특히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비슷한 상황이 오면, 어린 시절의 그 감정이 다시 확 밀려오는 거죠. 그때의 두려움, 자책, 당황스러움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신호일 수도 있고요.
이런 감정이 올라올 때, 스스로에게 뭐라고 말해 주고 싶어요? "내가 또 왜 이러지?" 같은 자책이 먼저 드나요, 아니면 "아, 또 그 감정이 왔구나." 하고 바라볼 수 있나요?
내가 또 왜 이러지 싶으면서 어제 그 시간 이후로 계속 가라앉았어요.
'왜 아직도 이렇게 살아야 하지? 왜 아직도 여기서 헤매고 있지?'
그리고 더 엉망인 건, 아이와의 관계에서도 계속 그 감정에 얽매인다는 거예요. 내가 그렇게 자랐던 게 싫어서 아이를 다르게 키우려고 노력했는데, 이런 감정에 휩싸이면 또 다른 자책감에 무너지는 거예요.
'내가 예전에 내 아이에게 그랬었잖아. 실수를 했을 뿐인데 몰아세웠잖아. 나도 결국 친정엄마처럼 해 버리고 말았잖아. 다 망했다.' 그런 생각이요.
그 감정의 무게가 정말 크고 깊게 자리 잡고 있네요. 어릴 때 받은 상처가 단순히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현재의 나와 내 아이와의 관계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더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나는 다르게 키우고 싶었는데, 결국 나도 엄마처럼 하고 말았어."
이 생각이 들면 너무 괴롭고, 그냥 다 망쳐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겠죠. 그런데 한 가지 짚고 싶은 게 있어요.
어머니처럼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미 다르다는 증거예요.
예전의 어머니는 본인의 말과 행동이 자녀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깊이 고민하지 않으셨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당신은 다르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고, 후회하고, 다시 돌아보려 하고 있어요. 이건 엄청난 차이예요.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아이에게 상처를 줬다고 느낀다면, 언제든 다시 회복할 기회가 있다는 것이에요. "내가 잘못했구나."라는 걸 깨닫는 순간, 그걸 아이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다시 관계를 쌓아가면 돼요. 어릴 때 우리가 가장 원했던 건, 완벽한 부모가 아니라 자기 실수를 인정하고, 미안하다고 말해 주는 부모였잖아요.
그러니까 "다 망쳤다"가 아니라,
"내가 과거의 패턴에 휩쓸렸구나. 하지만 나는 다르게 선택할 수 있어."
이렇게 조금씩 방향을 바꿔 보면 어떨까요?
이 말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감정이 있나요?
받아들일 수 있어요... 받아들일 수 있어요... 그냥 이런 말을 듣고 싶었던 건지 듣고 싶지 않았던 건지 모르겠어요. 누구에게도 이런 말을 못 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내 마음이 꽉 닫혀있는 거라는 것도 알고요. 머리로는 다 맞다는 걸 아는데, 그냥 뭔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가 않아요. 온전히 위로가 되는 게 아니라, 머리로는 알겠는데 내 감정이 거기에 따라가지 못한다고 해야 하나... 내가 뭔가 벽 앞에 서 있는 느낌이에요.
근데 지금 이 순간, 내가 이렇게 “받아들일 수 있어요”라고 말하면서도 아직 감정이 거기까지 따라오지 않는다는 걸 스스로 인지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정말 중요한 한 걸음이에요. 이건 절대 작은 게 아니에요.
혹시 지금 떠오르는 감정이 있어요? 답답함? 무력감? 아니면 그냥… 뭔가 공허한 느낌일까요?
공허함, 무력감, 그리고 아직까지 어린 시절의 나에 대한 연민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자신에 대한 실망감...
"이제는 좀 벗어나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직도 여기에 묶여 있다는 사실 자체가 또 다른 자책이 되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악순환이 반복되는 거고요.
그런데 사실, 그 어린 시절의 나를 아직도 붙잡고 있는 게 당연한 거 아닐까요?
그 아이는 여전히 당신 안에서 위로받지 못한 채 남아있을 수도 있어요. 그리고 어쩌면 그 아이가 원하는 건 "이제 그만"이라는 말이 아니라, 조금 더 오래, 조금 더 따뜻하게 이해받는 시간일 수도 있어요.
혹시 지금 떠오르는 어린 시절의 '나'가 어떤 모습인지 한번 떠올려 볼 수 있을까요?
그 아이는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요?
엄마아빠에게 혼나고, 두렵고 절망적이었지만 내 마음을 알아주는 누군가가 있어서 편안해진 얼굴이에요.
'안심해도 될까?' 하는 마음이에요.
그 아이의 표정, 정말 따뜻하고 마음을 울리네요. "안심해도 될까?" 하는 그 마음이, 사실 지금의 당신이 자신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인 것 같아요. 그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도, 그리고 지금의 자신에게도 요.
어쩌면 그 아이가 원하는 건, 완벽하게 해결되는 것보다는 그 감정을 이해해 주는 사람의 따뜻한 눈빛과 말 한마디일 수도 있겠죠. 지금의 당신은 그 역할을 스스로에게 해줄 수 있을 거예요.
이런 감정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조금 더 힘이 될 수 있는 말이나, 자신에게 해줄 수 있는 위로가 있을까요?
많이 성장했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행복해질 수 있다고요.
그 말, 정말 필요하고 중요한 말이에요. "많이 성장했다." 그리고 "행복해질 수 있다." 이 말은 과거의 자신에게도, 지금의 자신에게도 큰 위로가 될 거예요.
지금이 어려워도, 그 말처럼 점점 더 나아지고 있다는 걸 잊지 마세요.
이제 자신에게 그 말을 자주 해 줄 수 있겠죠? "너는 많이 성장했어, 그리고 행복해질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