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준비 1년차입니다.

프롤로그

by 온행


│마흔이 되었더니, 저절로


이번 달에 운동을 시작했다. 과장 없이 최근 10년 정도는 초록불이 깜빡이는 횡단보도 앞에서도 뛴 적이 없으니 내 몸이 꽤나 놀랐을거다. 평소 ‘운동을 해서 아픈거지, 운동을 안하면 아플 일도 없다’는 개똥철학을 설파하고 다니던 나였기에, 운동을 시작했다는 나의 말에 사람들은 심심치 않게 반응을 해주었다.


“갑자기 어떻게 마음을 바꾸셨어요? 무슨 특별한 계기가 있으세요?”

내 나이쯤이면 이런 질문에 “건강검진 결과가 처참했어.”라던지 “뱃살이 너무 늘었어.”라는 말로 응답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나는 “그냥 그런 마음이 들었어.”라고 퉁쳐버릴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그랬다. 그냥 그런 마음이 들었다. 나도 뛰고 싶다. 나도 햇살과 바람을 잔뜩 받고 싶다. 발 닿는대로 지치지 않고 걷고 싶다. 그런 생각 뿐이었다.


때로는 특별한 계기 없이 인생의 방향이 바뀌기도 한다. 올해는 특히 그런 해였다. 마흔이 되었다는 사실이 내 남은 시간을 실감하게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지만, 숫자는 나름의 힘을 가지고 있다. ‘40’이라는 숫자는 뭔가가 다르게 느껴졌다. 더이상 2~30대에 속할 수 없어 젊은 척은 못하게 되었지만, 자유에의 갈망과 도전정신이 아직은 남아있는 팔팔한 나이이다. 그 숫자가 주는 힘으로, 안하던 일들을 하기 시작했다.




│그냥 해본 일들


가장 우선은 글을 써야지. 어릴 때는 글짓기 대회를 휩쓸던 나였는데. 오랜 기간 작가가 되기를 꿈꿨고, 다른 직업을 가진 후에도 언젠가는 책을 쓸거라 생각했다. 막연히 생각했던 그 때가 바로 지금이다. 인플루언서가 멘토로 활동하는 글쓰기 커뮤니티에 가입했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이었다. 떠밀리는 마음으로 블로그도 적어보고, 적성에 안맞는 SNS도 이것 저것 가입해 보았다. 운좋게 연결된 인연으로 여럿이서 전자책을 함께 쓰기도 했다. 아직 내세울만한 성과는 없다. 하지만 나는 이미 작년과는 다른 사람이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내가 그렇게 정했으니까.


수영 강습을 듣는 딸아이를 체육센터에 모셔다 두고 연습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행복이었다. 나와는 달리 연습에 성실한 딸. 선생님의 조언을 들으면 금세 움직임을 다듬는 센스있는 딸. ‘너는 뭐든 할 수 있어. 어디든 갈 수 있어.’라는 말을 세뇌시켜 놓았다. 너는 나와는 다르게 태어났어. 나와는 다르게 키워지고 있고. 넌 나와는 다른 인생을 살거야. 힘차게 발을 차고 팔을 휘젓는 아이를 보는 것만으로 나는 내 바람이 다 이루어진 것 같이 뿌듯했다. 그리고 갑자기 생각했다. 나도 운동을 할래. 그 다짐으로 나는 주3회 규칙적인 운동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


근육과 지방만 신경쓸 게 아니라, 몸 안의 장기들도 챙겨줘야지. 탄수화물을 줄이고 단백질을 챙겨 먹기로 했다. 애 둘 키우는 워킹맘이 도시락 챙겨 다니는 건 언감생심이라 생각했었는데, ‘나는 도시락 싸는 사람’이라 정하자 간단한 일이 되었다. 3일에 한 번씩 야채를 잔뜩 손질해서 소분해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매일 아침 한 봉지씩을 덜렁덜렁 들고 출근한다. 매일 점심은 같은 메뉴, 감자와 고구마를 잔뜩 넣은 야채찜이다.


거울 앞에 서면 항상 어두운 낯빛의 지친 얼굴을 한 여자가 있었다. 운동을 시작하고서는 땀을 많이 흘려서 인지 얼굴이 조금 밝아져 보였다. 남편은 나더러 운동하고 온 날에는 눈이 반짝인다며 추켜세웠다. (내 운동을 지속시키려는 가족들의 의지가 하늘을 뚫을 기세다.) 땀을 깨끗이 닦아낸 뽀얀 얼굴을 보고 있자니, 앞으로 이렇게 거울 앞에 서서 내 모습을 응시하는 시간이 늘어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날에는 만족감으로, 어떤 날에는 연민으로 그러할 것이다. 이제는 목에도 로션을 발라야겠다. 나를 더 보살펴줘야겠다. 그래야 수십년 후에 거울 속 나를 연민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성장이 곧 은퇴 준비가 되는 나이


마흔이 되었을 뿐인데, 이전과는 다른 내가 되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격언은 나이에 구애받지 말고 무엇이든 도전하라는 속뜻을 담고 있으니, 내 상황과 맞닿아 있기도 하다. 마흔이라는 나이까지 살아온 인생을 한번 되짚어 볼 때가 되었다. 그리고, 남은 인생을 설계하기에 딱 좋은 시점이기도 하다.


운명에 이끌리듯 인생의 방향이 조금은 틀어졌다. 그리고 이렇게 지내다보면, 몇 십년후에는 내가 나를 더 좋아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존재하는 진한 의미를 찾아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살아야, 내 노후가 행복할 것 같다.


그래, 이 모든게 결국은 은퇴 준비구나.


운동화 끈을 다시 묶고 운동을 시작한 것도, 오랫동안 미뤄두던 독서와 글쓰기를 습관으로 만든 것도, 모두 다가올 시간을 단단히 살아내기 위한 준비였다. ‘노후 준비’라는 말은 그저 통장 속 돈을 늘려가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깨달았다. 내 삶 전체가 이미 은퇴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마흔의 은퇴 준비는 매일의 생활 속에서 쌓아가는 힘이다. 이 글은 그 작은 기록들을 모아두려는 나의 시도이다. 그리고 언젠가 비슷한 길 위에 설 누군가에게, 나의 흔적이 작은 지도 한 장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