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한 이상이 던지는 비릿한 배신감
인생은 대개 내가 던진 질문에 세상이 엉뚱한 답을 내놓는 과정이다. 내가 진심을 다해 '하고 싶은 일'이라는 미끼를 던질 때마다, 돌아오는 것은 비릿한 생선을 손등으로 문지른 것처럼 불쾌하고 축축한 실패였다. 반면, 적당히 고개를 숙이고 내 기질과 세상의 요구 사이에서 비겁하게 타협한 선택지들은 의외로 질긴 생명력을 발휘한다.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사회복지라는 업(業)이 바로 그 서글픈 교집합 위에 놓여 있다.
이 일은 내게 형벌도 아니었으나 딱히 축복도 아니었다. 그저 매일 아침 몸을 일으켜 타인의 고통과 행정적 서류 사이의 간극을 근면하게 메우는 일이다. 스스로가 이 분야의 탁월한 인재라고 믿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나, 기이하게도 세상은 내게 후한 점수를 매긴다. 내가 공들여 쓴 문장보다, 무심코 건넨 연민의 찌꺼기가 누군가의 가슴에 더 깊이 박히는 것을 볼 때면 생의 아이러니를 느낀다. 밥벌이의 성실함이란 결국 내가 잘하는 것과 내가 견딜 수 있는 것 사이의 서늘한 영토에서 발생하는 법이다.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식당에서 미혼 남성 사회복지사의 자리는 대개 구석진 곳에 배치된다.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기르는 풍경을 상상할 때마다, 자존감은 습기 찬 장판지처럼 낮게 가라앉는다. 누군가에게 다가가려 할 때마다 '경제적 자격'이라는 검문소가 나를 멈춰 세운다. 그럴 때면 내가 쥐고 있는 이 직업적 소명이 사실은 타인의 결핍을 증명해야만 겨우 유지되는 가난한 평화는 아닌지 자문하게 된다.
게다가 요즘은 인공지능이니 AGI니 하는 것들이 신탁(神託)처럼 쏟아진다. 한때 견고해 보였던 전문직의 성벽조차 모래성처럼 허물어질지 모른다는 흉흉한 소문이 돕는다. 미래라는 짐승이 어떤 이빨을 가졌는지 알 수 없는 시대에, 불확실한 안개 속으로 섣불리 닻을 올리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눈먼 만용에 가깝다. 지금은 무언가를 새로 시도할 때가 아니라, 내가 가진 패를 조용히 확인해야 할 때다.
내가 요리를 좋아하고 철학을 아낀다는 이유로 식당 주방에 들어가 칼을 잡겠다는 상상을 해본다. 그러나 들려오는 소식은 냉혹하다. 장사가 안되어 가게를 접고 다시 옛 회사로 기어 들어오는 이들의 뒷모습이 골목마다 가득하다. 절실한 각오도, 배수의 진도 없이 그저 ‘취향’이라는 미끈한 수식어만 들고 전장에 뛰어드는 것은 요리가 아니라 ‘어리석음’이라는 이름의 메뉴를 주문하는 행위다. 그 주방에서 내가 마주할 것은 철학적인 사유가 아니라, 매일 씻어야 할 기름진 불판과 짓무른 채소들의 비명일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오늘도 내가 서 있는 자리를 지키기로 한다. 이것은 패배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를 보전하기 위한 가장 정교한 후퇴다. 낮에는 사회복지사로서 타인의 삶을 보살피고, 밤에는 AI와 플랫폼이라는 도구를 빌려 나만의 작은 영토를 가꾸는 일. 거창한 혁명은 아닐지라도, 내 안의 요리와 철학을 박제하지 않고 가끔씩 꺼내어 온기를 불어넣는 이 현실적인 타협이야말로 지금 내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우아한 생존법일지 모른다.
인생이 반드시 정답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때로는 잘 정돈된 오답을 붙들고도 충분히 먼 길을 갈 수 있는 법이다. 아니, 어쩌면 우리가 정답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가장 지루한 오답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