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이 정도면 이제 그래도 돼요.
엄마가 변했다.
엄마는 스물다섯에 시집을 와 눈이 말똥한 두 살의 여자아이를 맡아 기르며 연년생인 나와 남동생을 낳았다. 고작 스물일곱에 애가 셋이라니. 게다가 그중 한 명은 남편의 조카라니. (어쨌든 사연은 길지만, 타인의 사정이기에 생략해야 한다.) 시작부터 나는 못할 일이다. 그 당시 책을 많이 읽고 목소리가 멋지고 말을 잘하는 엄마의 남편에게 홀랑 반해 반대하는 결혼을 강행했다. 그리고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들른 마지막 휴게소에서 눈앞이 캄캄했던 게 지금도 생생하다고 한다.
그렇지, 결혼은 현실이지. 식탁 앞에 앉아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며, 자동차 안에서 고개를 끄덕이던 불독 인형같이 절반은 자동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 시절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38년 전 휴게소에 멍하니 앉았던 엄마를 갑자기 이해했다.
그때 나는 자연스레 7년 전 나의 신혼여행을 떠올렸다. 오키나와 여행의 마지막 날 새벽 세시. 나는 갑자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엉엉 울었다. 깜짝 놀란 남편이 같이 울었다. 이유는 남편의 코골이가 온 세상 잡음을 잡아먹고 나도 잡아먹을 것 같아서였다. 이제 평생을 이렇게 잠도 편히 못 자고 살아야 하다니 너무 서글펐다. 한비를 낳고서는 잠을 자는 게 너무 힘이 들어 한비와 나는 안방에서 자고 남편은 작은 방에서 따로 잤다. 남편의 코골이 때문에, 늘 통잠을 못 자던 어린 한비 때문에, 하루에 한두 시간은 제대로 잘까 싶었다. 무릎까지 내려와 덜렁거리는 다크서클을 옥잡아매고 새벽 네시 반에 일어나 출근하는 나에게 어머님은 "얘, 나는 그냥 안 듣고 잤다." 하셨다. 내향형에 원칙주의형인 나의 INFP성향이 여기서 드러났다. 싫은 소리를 잘 못하고, 어른에게는 대들면 안 된다. 그래서 나는 "네, 아무튼 저는 못 자요."라고 절대 말씀드리지 못하고, 혼자 삐걱거리다가 입을 다물었다. 아. 이런 것도 시집살이라고 할 수 있나? 근데. 아니, 우리 엄마를 보면 할 수가 없겠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다음날부터 엄마의 남편은 음주로 외박을 했고, 엄마는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면서 내버려진 어린 조카를 거두어 키우다 우리를 낳았다. 내 손가락 밑 가시에 부들부들 떨며 거품을 물다가도, 문득 그런 엄마를 떠올릴 땐 나는 정말 편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엄마가 제정신을 붙들고 살아계신 게 신기할 정도로.
엄마는 매일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할머니 할아버지가 드실 수프를 끓이고 뒤이어 일어난 애 셋을 차례로 화장실을 다녀오게 하고 손을 씻긴 뒤 밥을 차려주었다. 어쩌다 엄마가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퍼드고 남은 수프에 후추를 조금 뿌려 밥을 말아주면 그게 그렇게 맛있었는데, 할머니는 애들한테 개밥을 주냐고 하셨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장사를 하러 나가시며 점심 메뉴를 주문하면, 엄마는 조카를 챙겨 등교시키고 청소를 하고 매일 새로운 점심 도시락을 준비했다. 우리는 자주 할머니 할아버지가 좋아하시는 김밥을 먹었다. 김밥이 손이 그렇게 많이 가는 음식인 줄은 결혼을 하고 나서야 알았다. 그걸 엄마는 점심 도시락으로 거의 매일 산더미같이 준비해야 했다. 김밥을 4단 찬통에 담아 들고 나와 남동생을 데리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일하시는 시장으로 나섰다. 버스에 타서 우리 둘은 의자 한 칸에 끼어 앉고, 엄마는 그 앞에 찬통을 들고 흔들흔들 서서 20분, 30분을 갔다.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께 찬통을 전달해 드린 후 다시 걸어 나와 버스를 타고, 우리는 의자 한 칸에 끼어 앉고, 엄마는 서서 20분, 30분. 흔들흔들.
그 사이 엄마의 남편의 삼 형제 중 막내가 스무 살의 숙모와 결혼을 했다. 신혼집은 엄마의 남편의 조카, 나, 그리고 남동생이 쓰던 놀이방이었고, 이제 식구는 아홉 명이 되었다. 엄마는 매일 아침 신혼집 침대에서 껴안고 자는 둘을 깨워 아침을 해 먹였다. 둘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가 살던 건물의 1층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갔고, 엄마는 가끔 쌍꺼풀 테이프를 눈두덩이에 붙이고 우리 집으로 올라오는 숙모에게 점심을 해 먹였다. 밥을 다 먹은 숙모와 어린이 셋은 장난을 치며 티브이를 보았고, 엄마는 주방에서 끝나지 않는 설거지를 했다.
그 시절의 엄마는 나를 임신하고도 아기띠를 둘러메고 젖먹이인 엄마의 남편의 조카를 안아 산이며 계곡이며 나들이를 다녔다. 그 옛날엔 체벌도 어느 정도 있었는데, 엄마 말을 잘 안 들으면 나와 내 동생은 사랑의 매나 청소기 봉으로 궁뎅이를 맞았다. 그래도 그녀는 친딸이 아니라 늘 조심스러웠는지 화를 낼지언정 체벌하지 않았다. 엄마는 왜 우리만 때려. 왜 우리한테만 화내. 가끔 억울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럴 땐 조용히 가서 한대 더 맞고 그랬었다.
어느 날의 엄마의 남편의 조카는 문방구를 털다가 잡혀오기도 했고, 담배를 피우다 걸리기도 했다. 하루는 늦은 시간까지 연락이 안 되어 온 가족이 난리가 났었는데, 돌아온 그녀는 납치를 당해 지하실에 갇혀있다가 창문으로 탈출해 나왔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정말 다행히도 진실은 아니었다.) 걱정되어 울던 엄마에게 아이 하나 제대로 못 챙긴다고 엄마의 남편과 할머니에게 갖은소리를 들었다. 그건 정말, 정말 갖은소리였다.
그랬던 엄마의 남편의 조카가 나는 좋았다. 나에게 잘해주기 따돌리기를 반복했지만 그건 그 나이 때의 여자애들이 충분히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담배를 피울 땐 그러지 말라고 그녀에게 편지를 썼고, 그녀는 조금 커서는 안 입는 예쁜 옷이 있으면 나에게 이것저것 나누어주기도 했다. 첫 손녀인 그녀를 할머니는 늘 가여워하셔서 어릴 적 그녀는 침대에서 늘 할머니 가슴을 만지고 잤다. 첫 손자인 남동생에게 국을 퍼주실 땐 항상 고기 건더기를 많이 주었다. 둘째 손녀인 나는 남자도 아니고 첫째도 아니어서인지 그리 환영받지 못했다. 내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할머니가 하도 지우라고 성화여서 엄마는 울면서 병원으로 가다가, 또 같이 울면서 매달리는 엄마의 남편 때문에 병원 앞에서 다시 돌아와 나를 낳았다. 어쨌든, 할머니는 내 국을 퍼주실 땐 국자에 고기 건더기가 걸리면 걷어내었고 내가 할머니랑 같이 자고 싶다고 울면 할머니방 방바닥에서 자게 하셨다. 어두운 방. 방바닥에서 잠이 들었던 그때. 맞은편 침대 위엔 창문이 있었는데, 할머니와 그녀가 한 덩어리가 되어 자고 있는 실루엣을 달빛이 어스름히 비추고 있었다. 나는 우두커니 앉아 그걸 바라보았다. 나도 저기 침대에 올라가서 자고 싶어. 여섯 살의 나는 생각했다.
엄마와 엄마의 남편, 나와 남동생은 내가 열 살이 되던 해에 분가를 했다. 엄마의 남편의 조카는 우리를 따라 같이 살지 않았고 할머니를 선택했다. 엄마는 약간 서운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분가 후, 명절마다 할머니 댁에 가는 게 너무 신이 났다. 살던 집인데도 어딘가 놀러 가는 기분이었다. 할머니는 살가운 경상도 사투리로 "왔나~" 하시고는 밥을 차려주셨다. 어느 날, 김치통에 조금 남은 김치를 주시며 "김치가 이것밖에 없어 우야노, 그래도 많이 무라." 하시고는, 뒤이어 첫 손녀가 놀러 오면 남은 김치를 뒤적이는 내 앞에서 애잔한 눈빛으로 새로 담근 김치통을 꺼내어 주셨다. 엄마는 그 모습을 보시고 다음 해부터 나를 할머니 댁에 보내지 않으셨다.
어느 날 엄마는 새로 이사한 집에 할머니를 초대했다. 할머니는 우리 집에 오셔서 식사를 다 하시고는, 그 자리에서 토를 하며 너희들만 궁궐같이 으리으리한 집으로 이사를 갔다고 화를 내셨다. 그리고는 엄마의 남편에게 도둑놈이라고 소리치고 떠나셨다. 이사한 집은 17평 정도의 주공아파트였다. 10년 동안 갖은 시집살이와 세 번의 병원행에도 꼼짝없이 버티던 엄마는 주섬주섬 통장을 꺼내 들고 할머니 댁으로 갔다. 그리고 엄마도 그다음 해부터 할머니 댁에 가지 않았다.
열네 살의 나는 그런 엄마를 보고 울다가, 우는 나를 구경하는 담배 피우는 아저씨에게 구경이 났냐고 소리를 치고 나서야 생각했다.
그래요 엄마. 이 정도면 이제 그래도 돼요.
내가 열네 살이 되고 나서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