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과 태풍에 대비하는 방법
“너희는 취직하고 결혼해도 매달 50만 원씩 엄마한테 가져와.”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나와 아직 대학교 졸업이라는 과제가 남은 동생에게 엄마가 말했다.
엄마, 내가 지금 130만 원을 버는데 50만 원을 엄마 주고, 남은 학자금 대출을 갚고, 생활비도 드려야 되고, 그럼 나는 뭐가 남아? 그렇게 생각했었다.
나는 당시 대학원을 졸업 후 일본의 한 대학에 연구장학생으로 유학을 앞두고 있었고, 그 사이 몇 개월 동안 한 국립 문화재단에서 130만 원을 받으며 과학강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교구업체로부터의 파견근무 형식이었는데, 첫 달 월급을 받고 그다음 달부터 3개월간 월급이 밀렸다. 사회생활이 처음이었던 나는 양해를 구하는 업체 대표와 관리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학자금 대출이 밀려 내 코가 석자였는데도 말이다. 대학교를 다닐 땐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2학년 1학기까지 학자금 대출로 연명했고, 다음 학기부터는 우연히 좋은 기회에 한 장학단체로부터 전액 장학금을 지원받게 되었다. 단, 장학금을 받으려면 일정 이상의 성적 기준이 있어, 그때부턴 필사적으로 공부해 학점을 유지하며 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앞선 3학기 동안의 대출금은 30대 초반까지 나를 따라다녔다. 그 몫은 그대로 엄마의 빚이었다.
엄마는 10남매 중 막내여서, 앞서 태어난 형제자매들이 쭉쭉 뽑아가고 남은 외할머니의 기운을 겨우 쥐고 비틀어 껴안고 태어났다. 태생부터 몸이 약했지만 언제나 씩씩하고 발랄했다. 공부도 잘했고, 남들 앞에서 주눅 들지 않았고, 유머감각이 뛰어났고, 노래를 잘했고, 친구들이 많았다. 하지만 일곱 명의 외삼촌들에게 기가 눌려 대학 진학을 꿈꾸지 못했다. 그 시절의 어머니들이 대부분 겪는 그런 설움들을 엄마도 겪어왔다. 그래도 이런 그녀를 사랑해주는 남편을 만나 운명처럼 결혼했다. 지적이고 멋진 남편은 결혼을 해서는 돈을 다발로 들고 다니면서 물건 대금이라고 생활비 주는 것을 아까워했기 때문에, 엄마는 10원짜리, 50원짜리를 모아 가끔 아이들 껌 하나, 과자 하나를 사주기도 했고, 집에서 직접 술빵을 빚어 간식으로 만들어주기도 했다.
대부분 겪는다고 해서 그 억울함의 시절들이 당연해지는 것은 아닌데도, 그런 이야기를 자꾸 듣다 보면 측은지심이 무디어진다. 열변하는 엄마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반응을 보여줘야겠기에 주억거림에 가까운 의미 없는 끄덕, 을 하며 한비 올 때가 다 되었는데 저녁은 뭘 해 먹지 생각한다.
엄마의 남편은 내가 중학교 2학년이 되던 해에 음주운전으로 사고를 냈다. 5중 추돌사고를 내고 자기 자신도 죽음에 가까운 만신창이가 되었다. 오른쪽 귀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 상태가 되었고, 오른쪽 얼굴은 마비가 되고, 오른쪽 팔다리는 쓸 수 없었다. 뇌를 다쳐 매일 헛것을 보고 헛소리를 했다. 엄마는 그런 남편을 살리기 위해, 남편이 다치게 한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없는 살림에 한 푼 두 푼 저축해 아이들 학자금으로 쓰려고 했던 5천만 원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시험기간이었고, 엄마가 없는 어두운 방에서 티브이를 켜놓고 엎드려 문제집을 풀었다. 하루 종일 남편 병간호를 하고 집에 돌아온 엄마는 침대 앞에 앉아 매일 엉엉 울었다. 죽음을 준비하라는 말을 듣고 와서는 울다가 헛웃음을 쳤다. 그럴 때면 나는 문지방에 기대어 서서 엄마의 등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뛰어가서 엄마의 등을 안을 수도, 그렇다고 함께 주저앉아 같이 울 수도, 헛웃음을 칠 수도 없었다.
엄마의 남편은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큰 사고를 내 구치소에도 다녀왔다. 구치소에서 나온 엄마의 남편은 차를 타고 데리러 온 엄마의 옆자리에서 구치소 무용담을 끊임없이 늘어놓았다. 뒷좌석에 앉은 나는 처음으로 사람을 보고 정말 사람인지 궁금해하는 경험을 했다. 엄마는 묵묵히 그런 남편을 집으로 데리고 와 밥을 먹이고 잠을 재웠다. 그는 엄마의 지극정성으로 내가 고등학생이 될 무렵 정상에 가까울 정도로 몸을 회복했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술을 마셨다. 그리고 다시 엄마를 때렸다. 엄마는 폭행을 피해 새벽에 도망쳐 나가기도 했다. 날이 밝아도 술에 취해있는 엄마의 남편은 나와 동생을 러닝셔츠에 팬티 차림으로 창문 아래 세워두고 노래를 부르게 했다. 겁에 질려 울면서 동요를 불렀다. 술을 마신 밤에는 늘 베란다에 발을 걸치고 뛰어내린다고 소리를 질렀고, 엄마는 그런 남편의 허리춤을 붙잡고 엉엉 울었다. 나는 그런 엄마의 등을 붙잡고 엉엉 울었다. 또 다른 어느 날 밤, 멀찍이 들려오는 앰뷸런스 소리에 엄마는 불안해하며 잠을 자지 못했다. 그날 그 시간 엄마의 남편은 음주운전을 해서 혼자 상가 벽을 들이받고는 또다시 죽을 고비를 넘겼다.
엄마는 마트의 튀김 코너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매일 집에 돌아와 허리춤을 부여잡고 엉엉 울었다. 남동생이 일하는 엄마에게 들를 때면 몇천 원을 쥐어주며 밥을 사 먹으라고 했지만, 종종 그 아이는 빵과 우유와 함께 피시방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노란 유니폼을 손빨래해 널어놓고 끙끙거리며 잠드는 엄마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엄마 내가 얼른 어른이 되면 대학교 안 가고 취직할 거야. 돈을 많이 벌 거야.
남동생은 공부를 잘해서 수원이며, 대치동으로 엄마 차를 타고 학원을 다녔다. 나는 공부보다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엄마에게 동생도 학원에 가니까 나도 미술학원에 보내달라고 졸랐다. 어렸던 나는 막연히 커서 돈은 많이 벌거지만 그때의 돈은 어느 구멍에서 나오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던 것이다. 공부를 해야 미술학원에 보내준다는 엄마와 미술학원에 안 보내주면 공부를 안 하겠다는 나는 갈등을 빚었고, 결국 두 달 여만에 미술학원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때부터 공부를 안 하던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부터 계속 성적이 떨어지기만 했고, 수능을 보고 나서는 대학 가기를 포기했다.
그래도 당시의 수시제도 중 수능 점수를 반영하지 않고 주요 과목의 내신점수와 면접으로 입학이 결정되던 제도가 있었고, 해당 과목의 내신은 만점이니 면접 한 번만 보러 가라는 담임선생님의 설득으로 울며 겨자 먹기로 지원을 했다. 수많은 지원자들 중 맨 첫 번째로 면접을 보고, 지진과 태풍에 대비하는 방법에 대해 열심히 대답을 한 후 합격을 했다. 대학을 안 가겠다는 나의 말에 냉전 중이던 엄마와 나는 소리를 지르며 껴안았다. 그렇게 결국 스무 살엔 취직보다 취학을 택해 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대학 진학으로 엄마에게 기쁨을 가져다줄 수는 있었다.
내진설계를 하고 낮은 건물을 짓는다. 24시간 정보를 주시한다.
위험한 구조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 재난을 대비한 유지보수를 철저히 한다.
지진과 태풍을 대비하는 방법에 대한 정보는 전날 우연히 열어본 신문과 뉴스에 이미 흘러넘치고 있었다. 면접 질문이 나온 순간 나는 그걸 그저 주워 담아 잘 정리해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도무지 엄마 인생에 예고 없이 다가온 지진과 태풍을 엄마도 나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는 거다.
생각을 해보았다.
50만 원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엄마, 내가 지금 130만 원을 버는데 50만 원을 엄마 주고, 남은 학자금 대출을 갚고, 생활비도 드려야 되고, 그럼 나는 뭐가 남아?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은지도 심지어 얼마 되지 않았다.
엄마는 불안했던 거야. 엄마의 남편이 언제 다시 엄마 인생을 뒤흔들지 모르고, 엄마는 가족을 뒷바라지하느라 알맹이를 모두 내어주고는 스스로 빈 껍질이 되어 작은 바람에도 이리 휘날리고 저리 휘날려가고 있었다. 내가, 남동생이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고 엄마보다 각자의 가족을 돌보게 될 때가 오면 그 빈 껍질도 마르고 말라 가루가 되어 사라져 버릴까 봐 겁이 났던 거야. 엄마는 살고 싶은 거야.
늦게나마 무너진 엄마의 가슴에 단단한 축대를 세우고 24시간 엄습해오는 우울과 불안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했다.
엄마의 남편과 같은 위험한 구조물로부터 분리되어야 했고, 또 다른 재난을 대비해 엄마의 내실을 견고히 해야 했다.
술을 물컵에 따르는 엄마의 남편에게서 술병을 빼앗아 싱크대에 부어버리면서 그와 싸우고, 여전히 기력이 없는 엄마에게 독립만세를 외치길 권유하며 싸우고 또 싸웠다. 다 싫다고 우는 엄마를 일으켜 세워 노래하라고, 공부하라고, 대학에 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엄마의 동네 합창단에서 노래하기로 했다고 악보를 보여주던 날. 오랜만에 엄마의 눈웃음을 보았다. 반달 같은 눈웃음. 엄마의 친구들이 그렇게 시기 질투하던 엄마의 트레이드 마크, 그걸 오랜만에 보았다. 엄마는 동네 합창단에서 노래를 하고, 구청 합창단에서 노래를 하고, 전국을 누비며 합창대회를 다녔다. 그리고는 방통대에 진학해서 교육학을 공부했고, 장학금을 받았고, 자격증 다섯 개를 따냈다. 몸이 아파 울면서 공부하고, 엄마의 온몸에 오랫동안 붙잡혀 하나로 뒤엉킨 과거를 상처가 나도록 찢어냈다. 엄마는 그 후로도 어깨 수술을 두 번 하고 손가락 마비와 갑상선 질환과 건선을 함께 이겨냈다. 그리고 지금, 우리 집 식탁에서 장애인 봉사활동 도우미로 어떤 활동을 해야 좋을지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고민에 빠진 머리가 새하얀 우리 엄마.
그리고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도, 여섯 살의 생일 밤에 갖고 싶던 인형을 엄마 몰래 안겨주던 우리 아빠를 조용히 마음에서 떠나보내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지진과 태풍에 대비하는 방법을 들어주신 면접관은 우리 과 교수님이었다. 언제나 검도로 심신을 수련하시고 항상 오토바이를 타고 교내를 돌아다니셨다. 내가 대학에 올 수 있도록 해주신 분이라는 생각이어서인지, 평범한 스쿠터였지만 내 눈엔 할리데이비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