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겨울이 오면 뒷방에 둔 짚으로 짠 아이들이 두서너 명은 들어갈 커다란 바구니에 가득 담아둔 고구마를 온 가족이 끼니때마다 먹었다. 그리 긴 겨울을 나다 보면 고구마가 강추위에 얼어 썩어나는 것들이 생긴다. 이때 어머니는 그 고구마들을 모두 골라내어 고구마 단술을 담그셨다. 썩은 부분을 도려내고 남은 볼품없는 고구마들을 가마솥에 넣고 찌면 끼니로 먹던 것보다 더 처량하다.
고구마를 찌는 동안 술 담글 준비를 마쳐야 한다. 가을에 만들어둔 누룩을 꺼내 탕을 닦아내고 잘 빻아야 한다. 그리고 깨끗이 씻어둔 항아리를 짚에 불을 붙여 연기로 소독한 후 검댕을 모두 닦아내면 얼추 준비가 끝이 난다. 가마솥에 김이 나기 시작하면 뚜껑을 다시 잘 덮어 고구마가 속까지 푹 익도록 하고 이후 불을 줄여 뜸을 들여 포근포근하게 쪄야 해서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다.
고구마가 다 쪄졌으면, 이제 솥에서 꺼내 커다란 소쿠리에 널어 한 김 식혀둔다. 너무 뜨거우면 일하기도 어렵고 누룩이 익어버려 제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옆에서 어머니를 거든다고 기웃거리며 마루를 지나다니면 먼지 난다고 한소리 듣기 알맞다. 누나는 벌써 물 한 동이를 이고 거름 밖에서 들어오며 받으라고 나에게 소리친다. 물동이를 받아 마루에 내려두면 어머니는 식은 고구마를 으깨서 누룩과 섞는다.
대략 고구마 한 말에 누룩 한 되 분량을 섞은 데 골고루 잘 섞어야 술이 잘 빚어진다. 누룩과 섞인 고구마를 항아리에 넣고 물을 고구마 양에 서너 배를 넣는다. 물, 고구마, 누룩이 잘 섞이게 손으로 쭈물거리며 저어주면 일이 거의 끝난 것이다. 항아리 위에 깨끗한 무명천을 덮고 줄로 동여매면 이제 아버지 몫이다. 안방 아랫목까지 조심히 항아리를 옮긴 후 뚜껑을 덮고 이불로 한 번 더 싸준다.
아랫목을 차지한 고구마 단술은 이제부터 상전이다. 되도록이면 가까이 가지 않는 게 좋다. 괜스레 항아리를 건드렸다가는 할머니의 꾸중을 들어야 한다. 술이 잘 익으려면 그저 따듯한 온기와 가만히 두는 게 상책이라는 것이 할머니의 오랜 경험의 잔소리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겨울 매서운 바람이 잔 어두운 밤 항아리에서 뽀글뽀글하는 술 익는 소리가 나면 기다림은 얼마 남지 않았다.
어린아이가 술 익기를 기다린다는 것이 지금의 상식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시절에는 집집이 술 익기를 기다리는 또래들이 많았고 먼저 만든 집에 가서 한두 잔 얻어 마시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고구마 단술은 말이 술이지 막걸리보다 낮은 도수이다. 하지만 달다고 무심코 여러 잔 마시면 술이라서 취해 아이들은 얼굴이 불콰해지고 어지러워 넘어지기도 해 어른들이 적당히 마시라 잔소리가 따라온다.
우리 집에도 이제 곧 고구마 단술이 익을 것이기에 어머니께 하루에 몇 번이고 언제 술을 거를 거냐고 채근을 하다 할머니께 얻어듣기 일쑤였다. 할머니 말씀은 “술이 익으면 어련히 걸러줄 것인데 이리 보채면 익던 술도 쉬어버린다”라며 큰소리로 나무라시며 항아리 뚜껑을 열고 무명천을 걷어 항아리 속을 들여다보신다. 보글보글 잔거품이 쉴 새 없이 올라오며 뽀옥 뽀옥 한알 한알 익어간다.
술 담근 지 서너 날이 지나면 이제 본격적으로 달크작작한 술내가 방안을 가득 채우고 이 술 향내에 어른들마저 군침을 삼키면 술 거를 때가 머지않았다는 뜻이다. 날을 잡아 커다란 항아리를 씻어 마루로 가져오고 잘 익은 고구마 단술 단지를 열어 노오랗게 익어 뽀글거리는 술을 물과 섞어 한 바가지씩 채에 부어 거르면 새 항아리로 떨어지는 금빛 고구마 단내가 온 집안을 가득 채운다.
어머니는 술과 지게미로 걸러진 고구마 단술 한 주전자와 김치전 두어 장을 함께 내어 할아버지와 아버지께 먼저 드리고 우리 형제들 몫으로는 물을 많이 섞은 고구마 단술을 한 보시기씩 주신다. 물을 많이 섞는 것은 양을 늘리는 것도 있지만, 알콜의 도수를 낮추려는 어머니의 염려가 섞인 배려이기도 하다. 고구마 단술에도 취하기에 술맛보다는 단맛을 좋아하는 아이들을 위한 생각이신 것이다.
고구마 단술은 단맛의 간식이기도 하지만, 마시면 포만감을 주어 허기진 배를 달래준다. 약간의 술기운은 기분까지 조금 상기시켜서 나른한 포만감이 퍼지면 추운 겨울 찬바람을 조금은 이겨낼 힘을 주는 것 같았다. 마치 학교에 다녀온 나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길처럼 부드럽고 달콤하다. 꼭 그랬다! 어머니의 따듯함이 우리를 보듬듯 술기운이 온몸에 퍼지면 아랫목 따뜻함에 이불 속으로 녹아든다.
술을 모두 걸렀으면 이제 한소끔 끓여야 한다. 술을 끓여야 더는 발효되지 않아 쉬이 쉬지 않기 때문이고 끓이면 알콜이 날아가 아이들이 더 마시기 편하기 때문이다. 어른들 용으로 두어 되 소주 됫병에 담아두고 나머지는 끓여놓는다. 이제 한참 동안은 군것질할 단것을 찾으면 고구마 단술로 무마할 수 있어 좋다. 온 가족 추운 겨울나기를 위한 어머니의 지혜! 이제는 마시기 어려워져 더 그리운 맛! 새큼하고 달달구리한 어머니의 손맛! 고구마 단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