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저만 힘든가요??
필사. 누구나 알고 있고 한 번쯤은 시도해 봤을 베껴 쓰기. 필사라는 단어에 머릿속을 스쳐가는 경험 하나쯤은 소장하고 계시죠? 저도 필사라는 단어에 떠오르는 경험이 있습니다. 캘리그라피 스승님 중 열정 만렙이셨던 분의 권유로 '캘리그라피 인문학'이라는 책을 필사했었죠. 잘 보이고 싶었던 마음에 한 번도 놓치지 않고 완주를 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한 챕터씩 필사를 하고 인스타로 인증하는 방식이었죠. 캘리그라피를 하는 분들이 참여하는 챌린지답게 인스타의 결과물은 아주 화려했습니다. 그때부터 이미 필사를 향한 고운 마음은 접힌 상태였나 봅니다. 갭이 크게 느껴졌고, 매주 뭔가 남다른 필사를 해야 할 것 같은 무게감에 짓눌리기 시작했습니다.
필사의 장점을 검색해 보니 잡념이 사라지고 집중력이 높아진다. 책의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있다. 등등 아주 많은 내용들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어느 것 하나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을까요? 저만의 문제인 걸까요? 필사에 대해 정말 궁금해졌습니다.
그때의 챌린지 이후 우후죽순처럼 인스타에는 함께 필사를 하자는 모집글들이 하루에도 몇 개씩 올라왔습니다. 몹시 피로함이 느껴졌고 그날 이후 4년이 넘도록 절대 필사는 하지 않았어요. 아이러니한가요? 글씨 쓰는 것을 좋아해서 캘리그라피가 직업이 된 사람이 필사를 싫어한다고? 저도 사실 이해는 안 됩니다. 그래서 굳이 누군가가 꼬집어 묻지 않으면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sns에 무언가가 유행처럼 일기 시작하면 저는 늘 한발 뒤로 물러나는 편입니다. 어설프게 따라가느니 그냥 빠지는 쪽을 선택하죠. 완벽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욕심이 시도조차 하지 않게 만드는 것 같아요. 단 한 번의 필사 경험은 노동이었고, 책의 내용을 집중하지 못하고 베껴 쓰기에만 급급했던 시간낭비라는 기억뿐이었습니다. 필사를 완주하고 아쉬운 마음에 책을 처음부터 다시 천천히 읽기 시작했어요. 베껴 쓰기에 집중하느라 놓쳤던 주옥같은 내용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때부터 필사는 NO!! 나만의 속도에 맞게 책을 읽고 공유하고 싶은 내용만 발췌해서 단정하게 엽서에 적기 시작했습니다. 인친들의 피드가 전부 필사로 파도타기를 하는 중에 혼자 유유히 엽서라는 잎새 위에 문장 한 줄 올려 띄워 보냈죠. 물론 소속감도 있어 보이고 단체로 움직이는 모습에 살짝 외롭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흔들림은 크지 않았어요. 다시 베껴 쓰기를 할 자신은 없었거든요.
그러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얼마 전 우연히 마주친 영어필사 챌린지 모집 피드를 보고 무의식의 손가락이 신청을 하고 있더군요. 영문캘리를 하면서 매일 영어명언을 찾아다니는 유목민 생활을 청산하고 싶었다는 궁색한 변명으로 면피를 해 보겠습니다. 다행히 필사단에 선정이 되었고 12월 1일 시작을 했습니다. 늘 그렇듯 우연히 인스타는 하필 그 타이밍에 왜 저에게 그런 피드를 보여 주었을까요?? 뇌를 읽는 알고리즘 녀석이 신기할 따름입니다. (anyway)
그렇게 시작한 영어필사는 그동안 배웠던 서체들을 일상에서 활용할 수 있게 일반 펜으로 굴러다니는 노트에 써야겠다 생각했습니다. 첫날이니까 첫 문장은 의미 있게 닙으로 살짝 힘 좀 주고, 본문은 노멀 하게 가기로 나름의 플랜을 세웠죠. 그런데 알파벳 하나하나 간격과 기울기를 생각하고, 오타방지를 위해 입 속으로 웅얼거리며 읽다 보니 묘하게 집중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 필사하는 책은 넥서스북에서 나온 '성공하는 리더들의 영어필사 100일의 기적'이라는 책입니다. 문장의 길이가 비교적 짧고 사용한 단어들이 무난해서 인지 따라 쓰기도 수월하고 입에서 웅얼거리며 발음도 해 보니 은근히 재미있었습니다. 천천히 쓰면서 웅얼거리는 것이 교복 입던 시절 깜지 쓰며 쪽지 시험 준비하던 기억도 나고 단어가 외워지는 경험을 하는 중입니다.
필사가 이런 건가? 잔잔한 명상음악을 깔고 스톱워치를 켜 놓은 채 단어와 문장이 주는 의미를 혼잣말로 속삭이며 집중하는 시간. 중간중간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파파고를 돌려 옆에 주석도 달아봅니다. 평균 40분 정도 걸리는 시간 동안 잠시 세상과 단절된 채 글씨와 글에 몰입하는 경험에 문득 이런 게 마음 챙김 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글책 필사 챌린지를 할 때는 시간 안에 베껴쓰기를 해 내야 한다는 부담으로 노동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는데 이번 영어필사를 통해 다른 경험을 해 봅니다.
무엇을 하든 내가 해 낼 수 있는 만큼의 속도와 양으로 산책하듯 즐겨야 그 가치를 만날 수 있는 것 같아요. 저는 그렇습니다. 누군가의 속도에 맞춰 함께 하는 것이 때론 포기와 두려움을 줄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함께 가야 할 때와 혼자 가야 할 때를 구분해서 진정한 나를 위한 길이 무엇인지 고민해 보는 것이 롱런의 지름길이 아닐까요?
혼자인 듯 혼자 아닌 혼자 같은 마이웨이
동행해 주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