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에 굴복 않고 세상을 바꾼 기자 - <베로니카 게린>
일회용 주사기가 널려있는 공터, 마약에 중독된 청소년들의 초점 없는 눈동자. 1994년, 아일랜드 더블린의 뒷골목 풍경입니다. 어린 아이들마저 마약에 노출되어 있고, 폭력이 횡행하는 그곳은 마치 지옥과 같습니다. 하루에 1만 5,000명이 마약 주사를 맞고, 총기로 사망하는 사람도 많은 그곳을 보면서 과연 국가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제대로 된 국가라면 국민의 안전과 행복을 위한 제반 조처들을 마련하고 시행하기 위해 법적 및 제도적 장치들을 취해야할 텐데, 당시의 아일랜드는 불의가 판치고 있는 세상 같이 보였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베로니카 게린>(2003)에서 아일랜드 유수의 신문사 기자인 '베로니카 게린'은 사회 문제를 심층 취재해서 고발하는 기사를 씁니다. 그런 그녀를 보고 다른 기자들은 수군댑니다. 인기를 위해 선동적인 기사를 쓴다고도 합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저널리즘의 본분에 충실합니다. 적당히 타협하거나 불의에 한 눈 감지 않습니다.
마약 밀매 조직과 맞선 아일랜드 기자
아일랜드는 오랜 세월 동안 영국에 예속되어 있다가 독립한 나라입니다.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처지에 있어 실업률도 높습니다. 이런 곳에서는 악의 꽃이 음지에서 곰팡이처럼 피어납니다. 마약이 바로 그것입니다. 마약 거래로 폭력집단은 엄청난 폭리를 취합니다. 그들은 어린아이들마저 이용합니다. 동심의 세계에 빠져 있어야 할 어린이들이 장난감처럼 주사기를 가지고 노는 모습은 충격적입니다.
이런 나라에 미래가 있을까요? 청소년들이 마약에 젖어있는 나라에 미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이 문제에 대해 나서지 않습니다. 문제를 제기하는 언론도 없습니다. 돈에 매수되고 폭압이 두려워서 알면서도 모른 체합니다.
사회 저변에 깔린 부조리한 사항들을 심층 취재하는 베로니카는 이 문제에 대해서 고민합니다. 초점 잃은 청소년들의 눈망울에서 절망을 본 그녀는 이 문제에 매달립니다. 그리고, 그녀의 전쟁이 시작됩니다. 그것은 겉으로 보면 거대 폭력 조직과의 전쟁이었지만 또 어찌 생각하면 자신과 싸움일 수도 있습니다.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자신을 향한 위협과 협박을 넘어 사랑하는 가족에게까지 폭력이 미칠 것 같은 두려움에 그녀는 갈등했을 겁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겁이 나고 갈등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죽을 수도 있는데,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녀는 도망가지 않습니다. 집요하게 파고들어 마침내 마약밀매 조직의 우두머리와 대면합니다.
“Be not Afraid, 두려워하지 마라”
마약 밀매 조직의 우두머리는 자신을 절대 노출시키지 않습니다. 언론으로부터 철저하게 몸을 숨깁니다. 그래서 그의 존재를 아는 이가 없습니다. 설혹 안다고 해도 그의 이름조차 입에 올리기를 꺼립니다. 무자비한 보복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베로니카는 마약상들의 카르텔을 추적해 들어갑니다. 그러자 곧 ‘더 이상 알려고 하지 말라’는 뜻의 공격을 받습니다. 그녀의 집에 총탄이 날아 들어옵니다. 그래도 그녀는 멈추지 않습니다. 복면을 한 사람이 쏜 총에 맞아 크게 다치기도 합니다. 가족과 지인들은 말립니다.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니 여기서 그만두라고 합니다.
베로니카는 어릴 때부터 남다른 근성과 승부욕을 가졌던 아이였습니다. 한 번은 남자 아이들과 축구를 하다가 무섭기로 소문난 할아버지 집 마당에 공이 들어가 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무서워서 아무도 공을 찾으러 갈 생각을 못합니다. 그때 베로니카가 용감하게 나서서 공을 찾으러 갑니다. 그때 일을 떠올리며 그녀의 어머니는 말합니다. “너는 두려워도 내색을 하지 않지. 베로니카, 때로는 미친 영감이 공을 가지도록 두는 게 현명한 거야. 그리고 때로는 그냥 도망을 치는 게 더 용감한 행동일 수도 있어.” 하지만 잠잠히 그 말을 듣던 베로니카는 “그래도 공을 돌려 받았잖아요”라고 답합니다. 어머니의 말이 뜻하는 의도는 알지만, 기자로서의 사명감이 그녀에겐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불의 앞에서 숨거나 물러나지 않고 당당하게 싸우는 그녀를 보면서 과연 기자정신이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은 게 좋은 거라며 통상적으로 지켜야 할 ‘선’을 넘지 않는 게 과연 기자정신일까요. 불의에 타협하여 한 쪽 눈을 감는 게 과연 현명한 삶의 태도일까요. 그러나 그것은 저널리스트에게 부여된 소명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협박을 받으면 그 누구라도 두려울 겁니다. 더구나 그 위협이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에게까지 뻗칠 것을 생각하면 무서워서 몸을 사릴 것입니다. 실명을 거론하면 명예훼손죄로 고소를 당할 위험이 있어 악당의 이름을 알면서도 밝힐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위험을 무릅쓰고 탐사 취재를 합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부여된 기자로서의 사명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불의를 보고도 눈을 감을 때가 많습니다. 괜히 나섰다가 귀찮은 일에 휘말릴 것 같아 피하기도하고, 나와 상관없는 일에 나설 필요가 있겠나 하는 마음에 나서지 않기도 합니다. 공익제보자들이 겪는 어려움을 언론을 통해 볼 때마다 왜 나서서 저렇게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됐을까 하는 마음을 갖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들의 제보 덕분에 불의한 세력들이 처단되고 사회 정의에 한 발 가까워졌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생각을 합니다. 과연 나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의문입니다.
베로니카는 마약 밀매단 두목의 협박에 굴복하지 않고 기사를 씁니다. 신문에 기사가 난 다음 날 그녀는 괴한의 총에 맞아 죽습니다. 그녀의 죽음을 본 사람들은 분노합니다.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나옵니다. 마약퇴치를 외치는 그 함성은 거대한 물결이 되어 정치권을 움직입니다.
마약상들은 체포됩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축적한 돈을 몰수하는 법도 만들어집니다. 국외로 도망쳤던 마약 밀거래 우두머리도 아일랜드로 송환되어 28년 형을 선고받습니다. 베로니카를 사살한 자에게는 종신형이 선고되었습니다.
범죄 집단에게는 감옥에서 형을 사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게 재산 몰수일 것입니다. 돈이 곧 권력인 세상에, 돈으로 모든 것을 포섭해서 법망을 빠져나오고는 하던 그들에게 재산 몰수는 가장 큰 형벌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법을 개정한 아일랜드는 참으로 대단한 나라입니다. 범죄 용의자들의 출처가 불분명한 재산을 조사하고 몰수할 수 있도록 <범죄 자산 관리국>을 발족했습니다. 또 헌법을 개정하여 마약 용의자들의 재산 압류를 승인하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사회를 바꾼 용기있는 행동
마약 밀매 조직의 두목인 길리건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승마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리는 사람만 8천 명이 넘을 정도로 승마장은 큽니다. 길리건을 찾아 그곳으로 간 베로니카도 기가 질릴 정도로 악의 축인 길리건의 힘은 대단합니다.
길리건의 승마장을 보니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불법으로 축재한 재산하며 그 재산을 바탕으로 행사하는 거대한 '힘'이 떠올랐습니다. 그녀의 힘은 돈에서 나왔습니다. 그 돈을 빼앗아야 합니다. 더 이상 법과 정의를 유린하지 못하도록, 그녀가 속해있는 집단이 불법적으로 모은 그 많은 돈을 국고로 환수해야 합니다. 악의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2017년에 더불어민주당 안민석 국회의원이 발의한 법안이 하나 있습니다. ‘최순실 재산몰수 특별법’입니다. 베로니카 게린의 죽음 이후 아일랜드에서 만들어진, 범죄 용의자들의 출처가 불분명한 재산을 조사하고 몰수할 수 있는 법과 비슷한 법입니다. 그러나 이 특별법은 아직도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특별법이 만들어지지 못한 걸까요. 그러나 고위공직자의 직무 관련 부정부패를 수사 기소하는 공수처법이 2020년에 만들어졌습니다. 이로써 부정부패가 없는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한 발자국을 뗀 셈입니다.
흔히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합니다. 펜이 칼보다 강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베로니카 게린은 두려움을 넘어서는 용기를 보여줍니다. 진실 앞에 비겁하지 않았던 그녀의 용기가 세상을 바꾸었습니다. 베로니카 게린의 용기 있는 행동이 시발점이 되어 마침내 사회가 정의롭게 변화했습니다.
아일랜드 수도인 더블린의 광장에는 그녀를 기리는 동상이 서 있습니다. 그 동상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Be not Afraid.” 불의 앞에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녀가 아일랜드 국민에게 남긴 말입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도 해당합니다. ‘불의에 굴복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마라. 정의가 세상을 구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베로니카 게린(VERONICA GUERIN, 2003년)
감독 : 조엘 슈마허(Joel Schumacher)
출연 : 케이트 블랑쳇(Cate Blanchett), 제라드 맥솔리(Gerard McSorley), 키애런 하인즈(Ciaran Hinds), 브렌다 프리커(Brenda Fricker)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