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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기문 Apr 10. 2020

부조리에 대하여, 시지프 신화

나의 세계문학 정복기 05. 시지프 신화 - 알베르 카뮈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카뮈의 이방인을 읽었는데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설을 읽어보니 카뮈의 '부조리 주의'에 대해 먼저 공부할 필요가 있었고 그에 따라 '부조리'에 대하여 다룬 이 '시지프 신화'를 읽기로 했다. 이 책은 우선 '이방인'이나 '페스트'로 잘 알려진 알베르 카뮈의 철학적 에세이이다. 그렇기에 소설보다는 읽기가 조금 퍽퍽하다. 하지만 카뮈가 가진 생각을 좀 더 직접적으로 알 수 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소설보다 쉽기도 하다. 이 시지프 신화를 읽은 후, 소설 이방인을 해석해보려고 하니 뭔가 더 난해한 느낌이 드는 걸 보면...


물론,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몸짓을 그만두지 않고 계속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중 첫째 이유가 습관이다. 고의적으로 죽음을 택한다는 것은 이와 같은 습관의 우스꽝스러운 면, 살아야 할 깊은 이유의 결여, 법석을 떨어가며 살아가는 일상의 어처구니없는 면 그리고 고통의 무용함을 본능적으로 인정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재미가 없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난 '이방인'보다는 이 '시지프 신화'가 더 재밌었다. 도입부부터 꽤나 충격적인데, 이 책은 '자살'에 대하여 계속 언급한다. (이건 스포지만 그렇다고 이 책이 아주 어두운 감정을 얘기하고 있으며 자살을 부추기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다.)

정확히 하자면, 어떤 갑작스러운 감정적인 동기에 의한 자살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고 감정에 휩쓸림 없이, 인생의 무용성, '사는 것에는 딱히 의미가 없다'는 결론, 세상의 비합리성을 깨달은 인간이 깊은 논리적 숙고 끝에 '자살이라는 결론'에 다다를 수 있는가를 묻는다.

즉,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만일 없다면 우린 스스로 삶을 끝내야 되는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이 낯선 세계로의 유배에는 구원이 없다. 그에게는 잃어버린 고향의 추억도 약속된 땅의 희망도 다 빼앗기고 없기 때문이다. 인간과 그의 삶, 배우와 무대 장치의 절연, 이것이 다름 아닌 부조리의 감정이다.

먼저 부조리의 감정에 대하여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카뮈에 표현에 의하면 '일상의 판에 박힌 행동을 이어주던 끈이 툭 끊어지면서 마음이 그 끈을 다시 이어 줄 매듭을 찾으려 해도 헛일이 되는 기이한 상태가 부조리의 첫 징후'라고 한다. 즉, 계속 이어지던 삶의 습관이 끊어지고 문득 '왜?'라는 의문과 권태가 시작되는데 그 권태에 따라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얼마나 우리에게 닫혀있는가를 알아차린다. 세상이 얼마나 비인간적인 것으로 뒤덮여있는가. 인간은 언젠가 죽고 우리가 이 세상에 남아있는 시간은 영원하지 않다.


죽음이라는 모험의 초보적이고도 결정적인 측면이 부조리의 감정의 내용을 이루며 이 숙명의 치명적인 조명을 받으면서 무용성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렇게 말하니 말이 어렵게 되었는데 내가 이해한 바에 의하면, 때때로 우리는 살다가 우리가 추구하던 어떤 이상이 차가운 세계에 의해 좌절되고 우리가 믿고 따르던 바는 사실 틀렸구나를 깨달을 때의 감정이 바로 부조리의 감정인 듯하다. 살다가 가끔 세상의 버거움을 느끼며 '인생에 대체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부조리의 감정이다. 언젠가 자신에게 있을 '죽음의 숙명'을 느끼곤 인생의 무가치함을 불현듯 느낀 적이 있다면 그 또한 부조리의 감정이다.


인간의 입장에서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세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환원시켜서 거기에 인간의 낙인을 찍는 것이다. '모든 사고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라는 자명한 이치는 바로 그런 의미이다. 만약 이 세계도 인간처럼 사랑하고 괴로워할 수 있다고 인정할 수 있게만 된다면 인간은 안심할 것이다.

이러한 '부조리'가 생기는 이유는 바로 인간이 뭔가를 이해할 때는, 인간적인 것으로 환원시켜 이해하기 때문이라고 카뮈는 말한다. 하지만 그러한 것은 바로 인간의 무지이다. 세상은 결코 인간적이지 않으니 말이다.


오늘날 우리 모두는 참된 인식에 대하여 절망하고 있다. 인간 사고의 유일하고 의미 있는 역사를 써야만 한다면 우리는 사고의 연속적인 후회와 무력의 역사를 기록해야 할 것이다.


이성과 합리, 명확함에 대한 인간의 열망은 비합리적인 세계와 부딪힌다. 바로 이러한 '차이'가 부조리다. 카뮈는 이러한 부조리가 진실이며 인간은 이 부조리한 '사막'에서 살아갈 수 있을지를 묻고 있다. 인간은 이 부조리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1. 희망, 철학적 자살

카뮈는 이 부조리를 해결하기 위한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결론과 희망을 '도피'라고 본다. 부조리는 우리가 그것에 동의하지 않음으로써, 반항함으로써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부조리한 상태에서 인간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은 채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며 실존파의 이성은 '스스로를 부정함으로써 정신이 흐려진 이성'이라 말한다. 그와 대조적으로 부조리의 이성은 자신의 한계를 확인하는 명철한 이성이라 한다.

그리고 카뮈는 자기가 관심 있는 것은 이러한 철학적 자살이 아닌 '자살' 그 자체라고 한다. 부조리한 세상을 버티며 사는 것과 자살을 하는 것 그 둘 외의 태도는 '속임수'이며 '뒷걸음질'치는 것이다.


2. 부조리에 맞서기

그는 산다는 것은 곧 부조리를 살려놓는 것이라 한다. 부조리를 계속 주시하며 반항하라 말한다. 자살은 그 속에 동의의 의미가 전제되므로 반항과는 정반대라고 하는데 그것은 비약과 마찬가지로 한계에 이르러서 수용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살은 부조리를 죽음으로 끌고 들어가 그것을 해소해버리는 것이라 한다.


중요한 것은 죽더라도 화해하지 않고 죽는 것이지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죽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서 카뮈는 부조리의 자유를 역설한다.


이리하여 부조리의 인간은 자신이 실제로는 자유롭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보다 분명하게 말하면 나의 미래에 대하여 희망을 가짐으로써, 나만의 진리, 존재하는 방식 혹은 창조하는 방식에 부심함으로써, 그리고 끝으로 나의 삶에 질서를 부여하고 그리하여 삶에 의미가 있다고 시인한다는 것을 입증함으로써 나는 스스로에게 온갖 울타리를 만들어 놓고 그 속에 나의 삶을 가두는 것이다.
부조리는 나에게 이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즉 내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제부터 이것이 바로 나의 깊은 자유의 이유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몇 번 읽어보니 이 세상에 '어떤 가치와 질서, 의미'를 부여하고 그에 따른 삶을 산다는 자체가 자기 자신을 가두는 것이기에 그들을 부정하고 세상의 부조리를 주시할 때만이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롭다는 말로 해석된다. 즉, 우리는 항상 내일을 바라보고 꿈꾸며 삶을 살아가는데 이 태도 자체가 자신을 가둔다는 말이다. 그는 그래서 '내일이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어느 이른 새벽 감옥의 문이 열릴 때 그 문 앞으로 끌려 나온 사형수가 맛보는 기막힌 자유, 삶의 순수한 불꽃 이외의 모든 것에 대한 엄청난 무관심, 죽음과 부조리야말로 단 하나의 온당한 자유의 원리, 즉 인간의 가슴이 경험하고 체현할 수 있는 자유의 원리임을 우리는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삶이 의미가 있다는 것은 어떤 가치와 척도, 선택 등의 '선호 태도'를 전제로 한다. 그와 반대로 '부조리'를 말하는 것은 이러한 '가치, 선호 태도'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삶의 질을 따질 수 없게 된다.

즉, 어떤 삶을 살 지보다 '많이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카뮈는 말한다.

그럼 어떻게 살아야 많이 사는 것이냐, 그건 '자신의 삶, 반항, 자유를 최대한 많이 느끼는 것'이라고 한다. 즉, 그에 따르면 이 부조리를 계속 주시하며 반항하면서 자유를 느끼는 것이 많이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부조리가 내포하는 덤으로서, 삶은 인간의 의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죽음'에 달려있다고 한다. 오로지 운의 문제라고 말한다. 그는 운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고 한다.


오직 의식의 활동을 통해 나는 죽음으로의 초대였던 것을 삶의 법칙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래서 나는 자살을 거부한다.


인간은 인간 자신의 목적이다. 그의 하나밖에 없는 목적이다. 그가 무엇인가가 되고자 한다면 그것은 바로 삶 속에서다.


남은 것은 운명이다. 오직 그 출구만이 숙명적인 운명이다. 죽음이라는 그 유일한 숙명을 제외하고는 기쁨이건 행복이건 모든 것이 자유다. 인간만이 유일한 주인인 세계가 남는다. 그의 사고가 가야 할 운명은 스스로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들로 재도약하는 것이다.


시지프 신화

신들은 시지프에게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끊임없이 굴려 올리는 형벌을 내렸다. 그런데 이 바위는 그 자체의 무게 때문에 산꼭대기에서 다시 굴러 떨어지곤 했다. 시지프가 산꼭대기로 바위를 올리면 떨어지고 올리면 떨어지고 하는데 이것이 마치 우리의 삶과 같다. 카뮈는 오늘날의 노동자의 삶도 시지프에 못지않게 부조리하다 말한다.


부조리를 발견하면 우리는 모종의 행복의 안내서를 쓰고 싶은 유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세계는 오직 하나뿐이다. 행복과 부조리는 같은 땅이 낳은 두 아들이다. 이들은 서로 떨어질 수 없다. "내가 판단하건대 모든 것이 좋다." 오이디푸스는 이렇게 말한다. 이 말은 신성하다. 이 말은 인간의 사납고 한정된 세계 안에서 울린다. 이 한마디가 운명을 인간의 문제로, 인간들 사이에서 처리해야 할 문제로 만드는 것이다.


카뮈는 시지프의 운명은 그의 것이라고 말하며 그의 소리 없는 기쁨을 이야기한다. 인간은 그의 삶으로 되돌아가는 이 미묘한 순간에 의해 '자신의 운명'을 가진다고 말한다. 그는 '깨어있는 의식'의 자유를 통해서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갖게 될 수 있으며 그에 기쁨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카뮈는 부조리한 세상에 대해서 도피하지 말고, 수용하지도 말고 지속적으로 주시하면서 반항하라고 말한다. 그러한 삶을 살 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되고 우리의 운명을 갖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굉장히 어렵다. 이렇게 어려운 태도가 있을까. 이건 마치 친구가 고민이 있다고 찾아왔는데

"그게 바로 세상이야. 도망가려고 하지 마. 희망도 갖지 말고 계속 버텨. 그럴 때 비로소 넌 자유로운 거야."라고 말하는 느낌이다. 물론, 우리는 삶이 힘들어도 버틴다. 하지만 버티는 데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이유에는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의미'가 존재한다. 힘들어도 참고 자신의 인생에서 완성하고자 하는 어떤 가치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하다. 그러한 가치를 완성한 미래를 상상하면서.

글쎄 이러한 희망이 도피라고 볼 수가 있을까. 카뮈는 '가치와 선택의 척도, 의미'가 자신을 가두는 것이라 말했지만 그것이 바로 삶의 이유가 아닌가 싶다. 인간에게 자유가 삶의 의미보다 중요한 것인가. 인간이 애초에 부조리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 바로 그들이 추구하던 '삶의 방향'과 세상이 맞지 않기 때문이 아니던가. 그만큼 중요한 것이 삶의 의미와 가치인데 그것을 버리라는 것이 맘에 들지 않는다. 그것이야말로 '삶'의 회피가 아닌가. 과거를 돌아보면 삶이 쉬웠던 적은 없지만 무언가를 위해 열심히 달릴 때는 마음이 충만했던 것 같다. 힘들 때는 내가 추구하는 것들이 잘 이뤄지지 않았을 때, 잘 돼가지 않을 때였다. 그리고 잘 안될 때는 방향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바꾸기도 했다. 난 인생에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없다고 생각한다. 카뮈의 말대로 이 비인간적인 세상에서 어떻게 인간적인 해답을 얻을 수 있을까. 하지만 살다 보면 뭔가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조리가 죽음을 명하는 것은 아님에도 동의하고 부조리에 맞서 계속 재도약해야 한다는 카뮈의 말에도 동의하지만 '삶의 의미'를 설정하지 말라는 말에는 결코 동의할 수가 없다.

우리는 부조리의 감정을 통해서 계속 '삶의 의미'를 성찰하고 고쳐나가며 자신만의 답을 찾아나가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인생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님을 스스로 증명하는 길이라고 본다. 언젠가 인간은 죽게 되어 있지만 죽음은 삶의 결론이 아니며 종착점이 아니라고 보기에 인생은 무용하지 않다.


2020년 4월 9일


유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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