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기문 Mar 26. 2020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나의 세계문학 정복기 네 번째 이야기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도 이 제목만큼은 어디서 들어봤을 만큼 유명한 책이다. 미국의 대문호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작품으로 이것을 읽어보려 한 계기는 작년 스페인 여행에서 내가 '론다'라는 지역을 갔고 '헤밍웨이 산책로'를 걸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헤밍웨이는 스페인 내전에 참가했는데 내전이 끝나고 이 작품을 론다에서 집필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사진은 론다의 유명한 누에보 다리인데 스페인 여행에서 제일 맘에 들었던 여행지를 꼽으라면 론다를 꼽고 싶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어니스트 헤밍웨이, 김욱동 옮김, 민음사


내가 군대에 있었을 때다. 어느 깜깜한 밤, 초소 안에서 난 차가운 총을 손으로 매만지며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난 이 총을 쏠 수 있을까. 만일 갑자기 전쟁이 난다면 이 총을 난 쏴야 되는 걸까.'

좀 억울했다. 내가 자원해서 군인이 된 것이 아닌데, 난 총으로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은데 말이다. 그 어떤 것이 나에게 살인을 강요할 수 있는 걸까. 그러다가 이건 나약한 생각에 지나지 않는 건가 싶었다. 그럼 수많은 독립운동가들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사람들은 뭐가 될까 싶은 것이다.

'전쟁이 나면 나라를 지켜야지.'

모르겠다. 그 상황이 오기 전까지는 나는 잘 모르겠다. 사람은 자신과 자신이 속한 사회를 위해서 끊임없이 싸워야만 하는 존재인 걸까.


어떤 사람도 그 혼자서는 온전한 섬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대륙의 한 조각, 본토의 일부이니.
흙 한 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면, 유럽 땅은 그만큼 줄어들기 마련이다.
한 곶이 씻겨나가도 마찬가지고.
그대의 친구나 그대의 영토가 씻겨 나가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의 죽음도 그만큼 나를 줄어들게 한다.
나는 인류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알려고 사람을 보내지 마라.
그것은 그대를 위하여 울리는 것이니.
  - 존 던

여기서 말하는 종은 조종을 의미한다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뜻으로 치는 종)

이 시는 이 책의 첫머리에 실려 있는 구절이다. 어떤 사람이라도 완벽한 혼자는 될 수가 없나 보다. 전쟁이 난다면 내가 속해 있는 사회 전반이 뒤틀려 버리겠지. 가기 싫어도 나는 '나'를 위해서 전쟁에 나가야 할 것이다. 의무나 강제를 떠나서 '그렇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도 이 전쟁에서 제외되지는 않았어. 누구 하나 제외된 사람이 없어.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 이 전쟁에 참가했으니까.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가 휘말려버린 전쟁에서, 나는 도망칠 수 있을까. 도망칠 곳이 있을까.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여기에 있는데 여길 떠난다면 '나'라는 존재는 사라지고 말 텐데 말이다.


"그런 짓을 하고 나니 어찌나 쓸쓸한지 견딜 수가 없었어."

작 중 배신자 파블로는 혼자 도망갔다가 다시 돌아오면서 이런 말을 한다. 그가 살던 세계에서 자신을 위해 살고자 도망친다면 그는 참을 수 없을 만큼 고독해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너도 사람 죽이는 건 즐겼다고 인정해. 안셀모가 살생을 좋아하지 않는 건 그가 사냥꾼이지 군인은 아니기 때문이거든. 그러니 그 노인을 우상화하지 마. 사냥꾼은 짐승을 죽이고 군인은 사람을 죽인다.

작품에서 전쟁 내 살인에 관해 인물들의 여러 시점이 나타난다. 안셀모는 어떤 경우든 반대하며 어쩔 수 없이 적군을 죽이는 입장으로 사람을 죽이는 건 죄악이라 말한다. 주인공인 로버트 조던은 사람을 죽이는 것은 싫으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파블로는 사람을 죽이는 것에 큰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며 심지어 자신이 살기 위해서 아군을 총으로 쏴 죽이기도 한다. 아구스틴은 전투가 일어나기 직전 적군을 쏴 죽이고 싶은 강렬한 감정에 휩싸인다. 내전이 일어나자 스페인의 작은 마을에서는 알고 지내던 사람들끼리 서로 믿고 있는 이념이 다르다고 하여 서로를 참혹하게 학살한다. 정치라고는 잘 아는 사람이 없는데도 말이다. 그러고는 반대 진영의 잔혹함에 대해 '짐승'이라고 한다. 대체 누가 짐승이 아닌 걸까. 난 꽤 많은 사람들이 평온한 일상에서 광기를 감추고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전쟁 같은 상황에서 그 숨겨졌던 광기는 봇물 터지듯 뛰쳐나오는 것이 아닐까. 군대에서 '과연 난 총을 쏠 수 있을까' 생각했던 나지만 방금 전까지 같이 있던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걸 보면 아무런 감정의 요동 없이, 혹은 분노에 휩싸여 적에게 방아쇠를 당기게 되지 않을까. 비이성적인 상황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광기란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너라는 존재는 없어. 절대 아무 일도 당하지 않는 사람은 없지. 나도 이 노인도 따지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야. 다만 네 임무를 완수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거든. 세상에는 꼭 필요한 명령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건 네 탓이 아니야.

로버트 조던은 자신에게 내려진 '다리 폭파 임무'가 현실적으로 꽤나 힘든 것이며 자신과 임무를 같이 수행하는 사람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임을 느끼곤 이런 생각을 한다. 어쩔 수 없이, '나'를 지키기 위해서 전쟁에 참여했지만 그때부터 나는 정말 '도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전쟁에서는 승리가 중요하지, 승리를 위해서 희생되는 병사 하나의 목숨이 중요할까.


그럼 이런 폭풍과도 같은 운명과 슬며시 보이는 자신의 죽음 앞에서
 우린 어떻게 해야만 할까.


어제라는 것도 없고, 내일이라는 것도 없지. 도대체 몇 살이나 되어야 그것을 안다는 말이냐? 오로지 현재만 있을 뿐이야. 만약 그 현재가 겨우 이틀뿐이라면, 그 이틀이 네 모든 인생이며, 그 속의 모든 것은 그 비율로 존재하거든. 이게 네가 이틀 동안에 일생을 보내는 방법이야.
영원히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어쩌면 난 사흘 동안 모든 인생을 살았는지 몰라, 하고 그는 생각했다.


로버트는 임무 중에 만난 마리아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며칠 뒤면 임무 중에 죽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는 낭만적인 사랑을 하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를 통해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인 만큼 그에게 남은 시간만큼 그녀와 뜨거운 사랑을 한다.


그러니까 이제는 걱정하지 말고 현재 네가 갖고 있는 것을 누리고 맡은 일이나 해. 그러면 넌 긴 인생을, 그것도 아주 즐거운 인생을 보낼 수 있을 거야. 뭘 그렇게 불평만 늘어놓고 있는 것이냐? 이런 일이라는 게 그런 거지, 하고 그는 자신을 타이르고, 그런 생각에 아주 만족했다. 그리고 중요한 건 네가 배운 것이 아니라 네가 만난 사람들이지. 이렇게 농담을 하고 나니 기분이 좋았고, 그래서 그는 마리아한테로 돌아갔다.
"당신을 사랑해, 토끼."

그는 마리아와 결혼하여 평온한 일상을 살아가는 것을 갈망하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에 만족하는 것이다.


겁쟁이 파블로

로버트와는 반대로 운명에서 도망치려고 하는 인물이다. 그는 내전이 일어나자 수많은 적군들을 물리쳤다. 하지만 어느샌가 그는 술주정뱅이가 되었고 패배주의자가 되어버렸다. 그는 수많은 '사람'을 죽인 만큼 죽음에 대해 점점 두려워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계속 자신의 운명에서 도망치고자 한다. 곧 다가올 '다리 폭파'라는 운명에서 말이다. 사람들은 그를 겁쟁이라고 말하며 그의 아내 '필라르'는 더 이상 그가 대장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녀는 소설에서 로버트의 손금을 보며 그의 죽음을 예감하는데(어쩌면 확신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로버트가 불리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것을 보며 그가 대단하다고 여긴다.

파블로는 임무 하루 전에 결국 폭파장치와 뇌관을 강물에 내던져버리고는 동료들에게서 도망쳤다가 '쓸쓸함에 못 견뎌' 다시 돌아오고 만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군을 더 모아 왔지만 다리 폭파가 끝나고 난 뒤 그 아군 세 명을 쏴 죽인다. 이유는 도망칠 때 필요한 말들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자신이 살기 위해 정말 그는 '살인'을 저지른다. 난 그가 정말 끝까지 도망자였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목숨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는 사람이다.


로버트의 죽음과 마리아

로버트는 결국 죽는다. 이게 결말이다. 그는 죽으면서 자신이 사랑하는 마리아에게 말한다.

"이젠 당신이 곧 나야. 당신도 확실히 그것을 느껴야 돼, 토끼. 내 말 잘 들어, 정말로 나도 가는 거야. 당신에게 맹세해."
"고마워. 당신은 이제 무사히, 빨리, 멀리 가는 거야. 그리고 당신 속에서 우리 둘은 함께 가는 거지."

로버트는 죽어가는 자신에게 남으려는 마리아를 도망치도록 떠나보내고는 그녀와 동료들을 추적하는 적군들에게 총을 겨누면서 소설은 끝이 난다. 마리아는 단순히 로버트의 사랑하는 여인이라고만 볼 수 없는 것이 소설 속에는 이러한 구절이 있다.

저 세 사람만큼 스페인이 만들어 낸 모습을 더 잘 보여주지는 못하리라. 그 여자(필라르)는 마치 산과 같고, 젊은이(호아킨이라는 젊은 청년)와 아가씨(마리아)는 싱싱한 나무와도 같아. 이 두 젊은이는 지금까지 참혹한 일을 겪어왔지만, 마치 불행이라는 건 들어 본 적도 없는 듯 싱싱하고 깨끗하고 새롭고 아무 상처도 입지 않은 듯한 모습이거든.

마리아는 전쟁 이후의 미래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로버트는 그 미래를 위해 자신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면서도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곤 자신을 희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소설이 전쟁을 다룬 만큼 죽음이 많이 등장한다. 로버트의 아버지와 카슈킨이라는 군인 동료는 자살을 선택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작가는 죽음을 삶의 완성이라고 보는 것 같았지만 자살에 대해서는 '도망'이라고 표현하는 것 같았다. 자살 또한 자신의 운명과 책임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하지만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과연 그런 것일까 하는 의문이 계속 들었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며 우린 그러한 운명은 받아들여야 하는 건가. 이것이 '헤밍웨이의 낙관론'이라는 건가.


결국, 로버트와 안셀모는 죽었고 파블로는 살았다.

파블로가 다른 사람을 마구잡이로 죽인 것은 그가 결코 긍정적인 인물은 될 수가 없는 것인데 이는 헤밍웨이의 시선이 로버트와 같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헤밍웨이는 로버트처럼 '자신의 신념을 위해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긍정적으로 본 것이다. 나는 생각이 다르다. 일단 로버트의 신념 자체가 나에게 잘 와 닿지 않는다. 로버트는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외국인(미국인)이다. 그는 휘말려도 되지 않을 전쟁에 휘말렸다. 물론, 스페인 내전으로 인해 그 결과가 미국이나 다른 국가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그런 거대한 공동체 의식이 잘 와 닿지 않는다. 그 자체가 어떠한 '이념' 같다. 그리고 파블로가 말했듯이, '다리 폭파 임무'로 인해서 영향을 받는 것은 결국, 그 근방에 살던 사람들이다. 그 내전은 그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이며 '위'에서 내려온 임무를 도구가 되어 수행해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맘에 들지 않는다. 그 임무로 인해 생겨날 결과들을 왜 파블로와 마리아, 필라르 그리고 그들의 동료들이 맞이해야 되는 건가. 만약 로버트가 죽지 않고 살았다고 하면 더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가 있다. 로버트가 살았다면 그는 어쨌든 그 임무를 마치고 다른 곳으로 갈 테고 나머지 사람들은 자신이 살던 곳에서 쫓겨나는 셈이다. 로버트는 추상적인 '대의'를 따른 인물일 뿐이지, 인류애를 따른 인물로 볼 수가 있는 걸까. 그의 '대의'라는 것이 너무 커다랗기에 실제론, 눈으로 보이지도 않는 쓸데없는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냐고, 그럼 누구를 위해 다리를 폭파하는 건가. 로버트는 소설 내에서 그렇게 끊임없이 고뇌하면서도 왜 끝까지, 용감하게 운명을 받아들이기만 했는가.

나는 로버트보다 파블로가 더 인간처럼 느껴진다. 죽음 앞에서 자신의 동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보며 '왜 받아들이냐, 왜 저 공화국 놈의 죽음과 같은 임무를 그냥 받아들이기만 하느냐' 묻고 싶다.

물론, 이러한 내 감상은 당시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은 탓이 크기는 하다. 하지만 이 작품을 지금 읽는 내겐 당시의 '이념'이 잘 와 닿지 않으며 희생도 잘 와 닿지 않는다. 인간은 물론 혼자서 온전한 섬이 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공동체 의식이 개인을 집어삼키는 일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난 군대에 있을 때에도 느꼈지만 군인과는 참 맞지 않는 사람인 건가.

두 번째로, 로버트는 자신의 운명을 진정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는가. 그는 단지 며칠 뒤에 있을 자신의 죽음을 느끼고는 마리아와의 쾌락적 사랑에 빠져버린 것이 아닌가. 그는 자신이 살기 위해, 그리고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기 위해서 더 노력했어야 했다. 마리아와 밤을 보낼 시간에, 소설에서 그가 잠시 생각했듯, 그는 자신을 도와줄 아군들을 더 모집했어야 했다.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쾌락주의는 비관주의의 또 다른 형태이다. 삶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건 여러 이유가 있을 테지만 곧 있을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것이 그 이유이고 그로 인해 자신의 4일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자신의 운명을 긍정적으로, 낙관적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난 죽음이 삶의 완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죽음은 아름답지가 않다.

현재는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현재에 너무 집착하기 시작하면, 현재의 아름다움에 집착하기 시작하면 그건 오히려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나를 세상에 버려두는 것이라 생각한다. 로버트 조던은 전쟁 상황에서, 자신의 죽음을 앞두곤 쾌락이라는 비관에 빠져든 비참한 존재일 뿐이다. 이 책에 대한 비평을 보면 비관주의에서 낙관주의로 헤밍웨이의 세계관이 발전했다고 하는데 난 헤밍웨이가 비관주의를 새롭게 현실적으로 그려낸 것이라 생각한다.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룬 소설가들은 많지만 내 맘에 딱 들게 그려낸 사람은 아직 없다. 헤밍웨이도 아닌 것 같다. 그가 이후에 쓴 노인과 바다를 읽어봐야겠다. 그의 시선은 변했을까.


2020년 3월 26일

유기문



    


작가의 이전글 깨어나세요 용사여, 달과 6펜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