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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기문 Mar 12. 2020

깨어나세요 용사여, 달과 6펜스

나의 세계문학 정복기 03. 달과 6펜스

난 취미로 사진을 찍는다. 카메라를 들고 있지 않을 때에는 신경 쓰지 않고 지나쳤던 것들이 카메라의 뷰파인더로 들여다볼 땐 뭔가 알 수 없지만, 아름답게 느껴진다. 횡단보도의 규칙적인 하얀 줄무늬와 푸른빛을 슬쩍하고 내던지는 신호등, 그리고 무심히 멈춰 서있다가 또 무심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며 걸어 나가는 사람들. 지하철의 열차 안에도 그러한 표정을 한 사람들은 두 열로 앉아있고 그들의 머리 위에는 그들을 위한 손잡이들이 또 두 열로 나란히 매달려 흔들리고 있다. 글쎄 여기서 무엇이 아름답다고 꼬집어 말하긴 어렵지만, 카메라의 뷰파인더로 언젠가 이들을 담아보면 당신도 고개를 끄덕일 순간이 오지 않을까 하고 난 생각한다.

(물론 사람들의 얼굴은 매너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찍지 않는다)

 카메라로 이들을 찍은 뒤에는 '라이트룸'이라는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보정을 한다. 보정은 사진을 찍을 때와는 또 다른 재미인데 사진이 그 순간을 기록하는 재미라면 보정은 그 순간을 창조하는 재미랄까. 보정을 마치고 난 사진을 보면 그때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시간을 만들어 낸 기분이다. 그렇게 보면 난 사진을 기록하려는 목적으로 찍는 것은 아닌 거 같다. 사진으로 그때의 모습을 찾아보면 딱히 어떤 감흥이 나지 않는다. 그 시간은 이미 지나갔고 카메라에 남아있는 것은 그냥 그 당시를 잘 묘사한 그림일 뿐이다. 그런데 이런 그림에 새로운 색을 첨가하면 그때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아름다움이 생겨난다. 그래서 가끔 과도한 보정을 할 때가 있다. 바로 이러한 사진이다.

낮에 낙산공원에서 도심을 바라본 사진

 그렇게 완성된 사진은 나의 인스타그램에 올린다. 여기서 가끔 귀찮아질 때가 있는데 이 귀찮음이란, '난 왜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지?' 하는 의문이 들 때 생겨난다. 이 질문은, 날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인데, 내가 생각보다 상당히 타인의 관심을 받고 싶어 한다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 완성된 사진을 누군가에게 공유할 일이 없다면 애초에 사진을 찍으러 가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날 인정하면서도, 나는 스스로 '타인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다. 타인의 관심은 받고 싶은데 시선은 신경 쓰지 않은 사람이라니. 이렇게 글을 쓰는 지금도, 이 글이 다른 이들에게 읽힐 것을 바라는 걸 보면, 나라는 존재는 참 모르겠다. 대부분사람은 이럴 것이라는 일반화를 고 싶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수 있으니 일반화는 하지 않아야겠다. 아무튼 서두가 꽤 길었는데,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에는 타인의 시선과 평판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 한 명 나온다. 오늘은 그에 대해 얘기해보려고 한다.



달과 6펜스

서머싯 몸, 송무 옮김, 민음사


이 소설의 화자는 어느 작가로, 런던에서 스트릭랜드 가족에 대해 알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그 가족은 중산층의 평균적인 가정이었다. 특이한 점이라면 부인이 문학계의 명사들을 사귀고 싶어 하는 갈망이 있는 여인이었다는 점이었고 남편인 '찰스 스트릭랜드'는 그냥 따분한 남자였다. 여기까지가 초반부로, 솔직히 재미없었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찰스 스트릭랜드는 갑자기 부인과 가족을 버리고 파리로 떠난다. 소문에는 그가 바람이 나서 부인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것이었다. 이에 부인은 화자인 '나'에게 그를 설득해달라며 자기 대신에 파리로 가 달라 부탁을 한다. 이에 '나'는 부담스럽기도 하면서 어쩐지 모험적인 데가 있어 설레 한다.


"골치 아픈 일을 맡았죠?"
"글쎄요."
"여보시오. 거 빨리 끝내버리고 우리 기분 좋게 저녁이나 합시다."


찰스 스트릭랜드와 '나'의 대화는 정말 너무나도 재밌는데 소설을 읽을수록 찰스 스트릭랜드라는 인물에 빠져들게 된다.


"부인께 무슨 잘못이라도 있나요? 그렇게 대하시니 말입니다."
"없어요."
"그럼 부인께 무슨 불만이라도 있으십니까?"
"없소."
"그렇다면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십칠 년이나 같이 살아온 사람을,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이런 식으로 버리다니 말입니다."
"심하지요."


"아주 몰인정하군요."
"그런가 보오."
"전혀 창피하지도 않고."
"창피할 것 없소."
"세상 사람들이 아주 비열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라지요."
"사람들이 미워하고 멸시해도 상관없단 말인가요?"
"상관없어요."


이런 대화가 이어지다 '나'는 지치게 되고 찰스가 하는 말은,

"자, 이제 그만큼 했으면 속이 후련할 테니, 가서 저녁이나 합시다."

였는데 둘의 대화가 되게 유쾌한 재미가 있다. 그들의 대화가 6페이지 정도 되는데 다 옮길 수 없어서 조금만 따려다 보니 그런 재미를 옮겨오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 여담이지만 이 책은 정말 재밌다. 재밌어서 하루 만에 빠져서 다 읽은 책이다. 만일 책 한 권 추천하라고 하면 당장 추천할 책이다


그럼 찰스가 자신의 가족을 버리고 파리로 오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였다. 나이가 사십이 된 '따분한' 증권 중개인이 갑자기 그림을 그리겠다며, 자신의 모든 생활을 내던지고 아무런 연고가 없는 파리의 지저분한 거리에 있는 조그만 호텔의 비좁은 방으로 온 것이다. 찰스는 어떤, 불타는 창조 본능으로 자신이 속해 있던 '현실'을 너무나도 쉽게 버렸다. 찰스 스트릭랜드라는 인물은 그리고 남들의 평가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인물로 그려지는데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전혀 없다. 소설의 마지막까지 그는 타인의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래서인지, '도덕의 한계를 넘어선 자유'를 누린다. 그가 아팠을 때, 그를 간호해주던 친구 '더크 스트로브'의 부인인 '블란치 스트로브'와 바람을 피우고 그런 그녀가 그 때문에 자살을 했을 때도 찰스는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그럼에도
찰스 스트릭랜드라는 인물은 되게 매력적으로 다가오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로, 찰스 스트릭랜드는 현실을 너무나도 쉽게, 후회 없이 버렸고 자신의 꿈을 좇는 화가였다. 우리는 모두 현실을 살면서 이룰 수 없는 꿈이 있다. 인생의 목표 말고 그냥 단순한 꿈이랄까. 내가 뭔가가 되고 싶거나 하고 싶지만 현실적으로는 포기해야 할 것이 너무 많기에 이룰 수 없는 꿈. 그것을 위해 자신의 삶을 한 순간에 내던진 찰스는 매력적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찰스는 주변의 평판에 휘둘리지 않았다. 남들이 자신의 그림에 대해 무슨 평을 하든 아무런 상관을 하지 않았고 그는 순수하게 예술을 추구하는 정신이 있었다. 그는 내가 되고 싶었던, '남들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인 것인데 이는 현실적으로 정말 있을 수가 없지만, 그를 매력적으로 만들어주었다. 세 번째로, 그는 도덕을 버렸다. 여기서 말하는 도덕이란,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평범한 윤리의식'을 말하는데 그는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그런 '윤리의 경계선' 상에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악인이라고 쉽게 평할 수는 없다. 그는 '우리가 때론 버리고 싶지만 남들 시선에 의해 따르는 윤리'를 버렸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언젠가 '가족'이라는 단어가 해체되는 날이 온다면, 그때 우리는 찰스 스트릭랜드를 나쁜 사람이라 말할 수 있을까. 내가 그를 쉽게 악인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것에 기인한다. 난 어쩌면 언젠가 가족이라는 것이 완전히 해체될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러한 바는 작가도 이 책의 서두에 몰래 암시하고 있다.


때로 어떤 사람은 자기가 살았던 시대를 넘어서 전혀 낯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오랫동안 살아남는 수가 있다. 그러면 호기심 많은 사람들은 인간 희극 가운데서 가장 기이한 광경 하나를 목격할 수 있게 된다. 가령, 오늘날 누가 조지 크랩을 기억하겠는가? 그는 자기 시대에 유명한 시인이었고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의 천재성을 인정했었다. 현대인의 삶이 훨씬 복잡다단해져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일은 이제 아주 드물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는 앨릭잔더 포프의 문하에서 시 작법을 배워 2행씩 압운시키는 형식으로 교훈시를 썼다. 그러자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이 터졌고 시인들은 새로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크랩 씨는 계속해서 2행 압운의 교훈시를 썼다. 그도 세상을 온통 뒤흔들어놓고 있던 젊은이들의 시를 읽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크랩 씨는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2행 압운의 교훈시를 썼던 것이다.
하기야 나도 이제 한물 간 사람일지 모른다. 그래도 나는 계속해서 2행 압운의 교훈시를 쓰겠다. 내가 나 자신의 즐거움 아닌 어떤 것을 위해 글을 쓴다면 세상에 둘도 없는 바보가 아니겠는가.


달과 6펜스를 읽은 많은 이들은, 오늘날 아니면 먼 미래에, 자신이 찰스처럼 살기를 꿈꿀지도 모르겠다. 아니, 이미 찰스가 평범한 사람이 되는 날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면서도 찰스 스트릭랜드는 있을 수 있는 사람인 걸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찰스 스트릭랜드는 남의 평판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인데 그렇다면 자신의 그림을 아무도 안 봐주고 인정 안 해줘도 신경을 안 쓴다는 것인가. 그와 대조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예술적 교양을 추구했던 그의 부인이다. 그녀에게 찰스는 '교양이 없는 따분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정작 진정한 예술을 추구한 것은 찰스 스트릭랜드인데 아무도 그를 알아주지 않았던 것은 그는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는가'를 정말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작품을 남기는 사람이 '남들에게 보여지는 바'를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는 정말 나와는 차원이 다른 진정한 예술가이기 때문일까. 예술가는 어떤 '아름다움'을 보고 예술작품에 그것을 담는 것일까, 아니면 감각적으로 무언가를 창조하고 나서야 그 아름다움을 그도 그제야 보게 되는 것일까. 만일 전자의 경우라면 작품을 남기는 행위 자체가 그 '아름다움'을 남들에게 전하기 위함이 아닌가. 난 찰스처럼 될 수 없는 범인이라 그런지 그를 이해하기란 어렵다. 소설 속 '나'도 그런 찰스에게 그에 대해 묻는다.


"명성을 바라지 않나요? 명성이야말로 대개의 예술가들이 무관심할 수 없는 거 아닙니까?"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당신의 작품을 보고 감동을 받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미묘하면서도 격렬한 감동을 말이에요. 기분이 썩 좋지 않겠어요? 누구나 힘을 행사하기를 좋아합니다. 사람의 혼을 움직여 연민이나 공포의 감정을 일으킨다면, 그보다 더 멋진 힘의 행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전 이런 생각을 합니다. 무인도에서도 글을 쓸 수 있을까 하고요. 제가 쓴 글을 저밖에는 읽을 사람이 없는 게 확실하다면 말입니다."


이런 그에게 찰스는 이렇게 답한다.


"나도 때로 생각해 보았소. 망망한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외로운 섬, 그 섬의 아무도 모르는 골짜기에서 신비스러운 나무들에 둘러싸여 조용히 살아볼 수 없을까 하고. 거기에서는 내가 바라던 것을 찾을 수가 있을 것만 같아서."

그리고 소설의 끝자락에 가서 그는 정말 타히티의 사람 없는 한적한 곳에 가서 그림을 그린다. 물론 아무도 없는 곳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세상에 진리를 얻으려는 욕망이 지나치게 강한 사람들이 있잖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진리를 갈구하는 나머지 자기가 선 세계의 기반마저 부숴버리려고 해요. 스트릭랜드가 그런 사람이었지요. 진리 대신 미를 추구했지만요. 그 친구에게는 그저 한없는 동정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그런 그에게 어느 정도 공감을 하면서도 그를 온전히 이해하지 할 수 없는 나는 스트릭랜드 부인과 같은 범인인가 보다. 찰스는 어쩌면 자신의 욕망을 알아줄 수 있는 이는 세상에 얼마 되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그가 속한 현실을 송두리째 내던졌는지도 모른다.


더크 스트로브와 그의 부인 블란치 스트로브

이 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더크 스트로브는 남들에게 속없이 베풀기만 하는 인물이다. 그런 그의 품성을 아는 친구들은 그의 돈을 마구 빌려 썼으며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었지만 앙심을 품는 사람이 아니었다. 더크 스트로브는 유일하게 찰스의 예술성을 알아봤으며 그가 아팠을 때, 그의 부인인 블란치를 설득하여 찰스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한다. 문제는 이후에 블란치와 찰스가 눈이 맞으면서 발생하게 되는데 이 더크 스트로브라는 인물을 분석하려 해 보았으나 이 인물도 찰스만큼 특이하기에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우선, 남들에게 계속 베풀기만 하는 인물인데 이 호의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면 정말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호의를 베푼다는 것이 가능할까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호의는 말 그대로 좋은 뜻으로 남에게 베푸는 것이지만 그 행위를 하면서 우린 상대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된다. 어떤 이들은 그 영향력을 행함 자체에 의미를 두기도 하지만 더크를 지켜보면서 느낀 것은 그는 상대가 자신을 좋아해 줬으면 하는 마음에서 남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크는 블란치가 그를 버리고 찰스와 눈이 맞았음에도 그녀가 찰스의 허름한 집에서 사는 것이 걱정되어, 그녀와 찰스를 자신의 집에 살게 하곤 그가 밖으로 나온다. 이쯤 되면 속이 없는 걸 넘어 그의 존재 자체가 의심스럽다. 이후 찰스와 '나'의 대화를 통해 블란치의 행동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그 여자는 어느 로마 왕족 집안의 가정교사였소. 그 집 아들이 그 여자를 유혹했지. 여자는 남자가 자기와 결혼해 줄 거라고 믿고 있었소. 그런데 갑자기 거리로 내쫓겨버리고 말았지 뭐요. 애를 가지고 있던 몸이라 죽어버리려고 했다는구먼. 그때 스트로브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던 거고. 그래서 두 사람이 결혼을 하게 된 거요."

그렇게 된 둘의 결혼은, 어쩌면 블란치에게 있어서는 도피처가 아니었을까 싶다.

게다가 블란치는 처음부터 찰스 스트릭랜드를 싫어했고 그를 집에 데려와 간호하는 것에 대해 계속 반대하였다. 그런데도 더크는 그녀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이런 말을 했다.

"당신도 딱한 처지에 빠진 적이 있었지 않소. 누군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주었기에 망정이지. 당신도 그러한 도움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알겠지. 이제 당신에게도 기회가 왔으니 이번에는 누군가를 도와주고 싶지 않소?"

내가 블란치였으면 오만정이 다 떨어졌을 것 같다. 그녀는 이런 말을 한다.

"여긴 당신 집 아녜요? 물건도 다 당신 거고. 당신이 그 사람을 데려오고 싶다면, 내가 어찌 막을 수 있겠어요?"

그녀의 결혼 생활은 그녀의 것이었을까, 더크의 것이었을까. 겉으로 보기엔 평화롭던 그들의 생활은 결국, 더크의 계속된 고집에 의해 완전히 일그러져버렸다. 그녀가 찰스와 눈이 맞았던 안 맞았던 더크와의 생활은 언젠가 끝날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바를 아는지 모르는지 더크는 끊임없이 그녀를 찾아가 속없이 그녀의 사랑을 구한다.


"내가 당신만큼 사랑했던 여자는 이 세상에 없었소. 내가 당신에게 혹 서운하게 한 일이 있다면, 왜 말해 주지 않았소? 내가 다 고쳤을 것 아니오. 난 당신을 위한 일이라면 무어든 안 한 일이 없소."
"여보, 제발 가지 마. 당신 없이는 한시도 못 살아. 난 죽어버릴 거야. 내가 당신 마을을 상하게 한 일이 있거든 이렇게 용서를 빌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더크는 이기적이게도 사랑한다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블란치에게 내던져버렸다. 자신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인 마냥. 그런 그에게 누가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그는 계속 '호감을 얻기 위해' 호의를 베풀기만 했다. 더크처럼 매력이 없는 사람이 내게 와서 그런 호의를 베풀면, 난 그 사람을 좋아할 수 있을까. 내가 그렇게 그를 좋아하게 된다면 마치, 그의 '호의'에 의해 내가 팔려나가는 기분이 들 텐데 말이다.

더크 스트로브도 정말 '자존심'이란 것을 극도로 없애버린 인물이라서 현실적으로 가능한 존재인가 싶다.

더크와 찰스, 그리고 블란치 이들의 관계를 더 생각해보려 했지만 모르겠다. 어쩌면 별 의미가 없는 것에 난 의미를 찾고 있었던 것일 수도 있다. 소설 속의 '나'는 그토록 그림 외 타인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던 찰스가 블란치에게 감정을 가졌었는지 알 것 같다고 얘기하는데 그런 그에게 찰스는 이런 말을 한다.


"당신은 못 말리는 감상주의자로군. 가엾은 친구."

그 말이 내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내가 하던 건 감상주의적인 것이고 그냥 그들이 그런 맘을 품었던 건데 그것에 무슨 의미를 부여할까. 블란치에게 더크는 매력이 없었고 찰스는 매력이 있었다. 그게 끝이다.



소설의 결말부

소설의 결말부는 찰스가 타히티로 떠난 이후의 삶에 대해 그를 알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화자인 '나'가 듣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사실, 이 때문에 재미가 확실히 반감되는데 어떻게 보면 그동안에도 관찰자 시점이라 '찰스'를 우린 잘 몰랐는데 이렇게 되니 한 단계 더 멀어진 셈이다. 찰스는 사후 그의 예술성을 인정받아 유명해졌고 그를 알던 이들은 그의 그림을 사둘 걸 하곤 후회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의 부인은 그를 그토록 미워했는데 그의 그림, 심지어 모조품을 집 안에 걸고는 미국의 한 비평가와 찰스에 대해 인터뷰를 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장식으로는 그만이에요."
"제가 확신하는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위대한 예술은 항상 장식적 기능을 갖죠."


찰스가 추구한 진리에 가까운 그런, 아름다움이란 무엇이었을까. 그런 아름다움이란 범인들에게 장식적인 기능뿐이라면 그의 꿈이란 정말 꿈이었던 걸까. 그리고 그의 독특하고 기이한 생애에 주목하는 대중들과 그러한 것이 되려 그의 작품을 가치 있게 만들어준다는 것은 '예술'이라 불리는 것에 허상을 더해준다.

"당신은 못 말리는 감상주의자로군. 가엾은 친구."

그는 단지 그림을 그렸을 뿐이다. 정말 그뿐인지도 모른다. 거기에 쓸데없는 의미를 더한 건 못 말리는 감상주의자들이었고.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는 빨간약을 먹었다. 빨간약을 먹은 게 주인공이었으니 빨간약이 정답인 것처럼 보이지만 빨간약이 진실인지 파란 약이 진실인지 우린 알 수 없다. 뭐 빨간약을 먹은 네오가 어쩌면 사이비 종교에 빠져든 걸 수도 있고 정신병에 걸린 걸 수도 있다.

그런데 '세상에 진리를 얻으려고 우리가 선 세계의 기반을 부숴버리는 게' 빨간약일까, 파란 약일까.

우리가 갑자기 '깨어나세요, 용사여'라는 천사의 목소리를 듣고 깬다면, 그곳은 우리의 현실과 이상 그 둘 중 어디일까.


우린 현실에서 깨어나 꿈을 좇아야 하는가, 꿈에서 깨어나 현실을 좇아야 하는가.

아무리 높이 뛰어도 닿을 수 없는 달을 향해 뛰어야 하는가, 땅에 떨어진 동전 6펜스를 주우려 고개를 숙여야 하는가.


남산도서관 근처 횡단보도에서

2020년 3월 12일


유기문


*참고로 찰스 스트릭랜드의 모델은 폴 고갱이다. 어느 정도 닮은 부분이 있으나 찰스의 삶이 더 극적이다. 난 별로 중요치 않다고 생각하여 본문에는 넣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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