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내내 밤바다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 아침 9시부터 자정이 넘도록 손님을 실어 나르는 롤스로이스, 수백 미터의 야회용 천막과 갖가지 색깔의 전구, 노란 칵테일 음악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와 바람난 사내들.
'위대한 개츠비'를 생각하면 그가 거대한 저택에서 열었던 화려한 파티가 먼저 떠오른다. 영화 '위대한 개츠비'가 이런 파티를 잘 묘사해냈기 때문일까. 이 책을 처음 읽으면서 난 이런 화려한 파티에 주목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개츠비에게 이런 화려한 파티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이 파티는 오히려 그를 잘 몰랐던, 아니 알려하지 않았던 수많은 대중들, 그리고 '위대한 개츠비'를 읽어보지 않았던 '나'에게 중요한 것이었다.
개츠비의 화려한 겉모습과 성대한 파티의 공허함은 개츠비의 위대함이 반어적으로 들리게까지 한다. 작가, F. 스콧 피츠제럴드는 이 책의 제목을 왜 '위대한 개츠비'라고 지었을까. 개츠비는 문자 그대로 위대할까? 오늘은 이에 대해 얘기해보려고 한다.
위대한 개츠비
F.스콧 피츠제럴드, 김욱동 옮김, 민음사
"누구든 남을 비판하고 싶을 때면 언제나 이 점을 명심하여라. 이 세상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놓여있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이 말은 위대한 개츠비의 화자인 닉 캐러웨이의, 아버지가 닉에게 했던 말이다. 개츠비의 '위대함'을 평가하기에 앞서 우린 이 소설의 시점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야기를 전개하는 시점을 살펴보면 작가의 생각을 가늠하기가 더 쉬워지기 때문이다. 닉 캐러웨이는 '모든 일의 판단을 유보하려는 버릇'이 있고 '인간의 행동에 있어 그 행동이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지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인데 이러한 것은 소설의 전반부에 보이는 닉의 행동과 말을 통해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소설의 초반부는 지루하기까지 하다. 이 설정을 통해, 작가는 최대한 개츠비라는 인물을 나타내는 데 객관성을 잃지 않으려 한 듯하다. 만일 다른 인물의 말에 쉽게 흔들리며 감정의 변화가 나타나는 인물을 관찰자로 두었다면 그의 말은 신뢰성이 떨어질 게 뻔하다.
이런 닉이 먼 친척 여동생 뻘인 '데이지'와 그의 남편 '톰 뷰캐넌'을 만나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그들 부부는 화려한 저택에서 살고 있는데 그들이 살고 있는 이스트에그라는 곳은 상류사회였다. 물론, 닉 캐러웨이 자체도 상류사회에 속한 인물이긴 하지만 그는 정말 '관찰자' 역할에만 충실할 뿐이다. 톰에게는 부인인 데이지가 있음에도 '머틀'이라는 쓰레기 계곡의 정비사 '조지 윌슨'의 부인과 바람을 피운다. 이러한 것은 데이지도 알고 있으며 그들을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화젯거리였다.
톰은 자신이 정부인 머틀을 만나러 가자며 닉을 끌고 가고 닉은 톰과 머틀, 머틀의 동생인 캐서린 그리고 사진작가인 맥키와 그의 부인과 같이 술을 마시며 진탕 논다. 영화에서는 이를 마치 파티처럼 그려냈는데 소설을 읽어보면 닉은 그들이 나누는 자극적인 이야기에 끌려 그곳에 붙잡힌 것으로 보인다. 닉에게 있었던 욕망이란, '술을 마시며 노는 것'보다는 '그런 그들을 지켜보는 것'에 가까웠다.
"만화경처럼 변화무쌍한 삶에 매혹당하기도 하고 혐오감을 느끼기도 하면서 나는 집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집 밖에도 있는 기분이었다."
이 욕망은 닉이라는 인물의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바로 이것이 그가, 데이지와 개츠비를 만나게 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어느 날, 개츠비의 파티에 초대를 받은 닉은 개츠비와 가까워짐에 따라 개츠비의 비밀을 알게 된다. 그것은 바로 데이지가 결혼하기 전, 개츠비는 그녀와 사랑을 나눴다는 것이고 현실적인 사정에 의해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개츠비는 그녈 잊지 않아 그녀가 사는 이스트에그 바로 반대편의 웨스트에그의 거대한 저택으로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녈 만나려는 목적으로 개츠비는 이런 거대한 파티를 열었다.
닉은 이를 알게 되었지만 데이지는 어찌 됐든 자식도 있는 유부녀였다. 소설에는 고민이 나와있지 않지만 그 둘을 만나게 하는 것에 전혀 고민을 하지 않았던 것일까. 나라면 그 둘을 자신이 사는 집에 만나게 했을까. 톰 몰래? 글쎄, 그 상황에 처해보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닉의 입장에선 굉장히 재미있는 게 아니었을까. 그토록 '관찰'을 좋아하는 닉에게 있어 말이다. 닉은 계속 중립적인 위치에 서있으려 하지만 언제나 가치중립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란 불가능하다. 어쩌면 그 둘을 만나게 하는 시점부터 '닉의 관찰자적인 위치'는 점점 변하기 시작했던 것일지 모른다.
데이지와 개츠비는 결국, 톰과 머틀처럼 바람을 피우는 사이가 되었다. 개츠비의 성대한 파티는, 데이지의 불만에 의해 없어졌고 개츠비는 소문이 두려워 대부분의 하인들을 쫓아냈다.
'그녀의 불만스러운 눈빛에 그만 그 대저택 전체가 마분지로 만든 집처럼 폭삭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개츠비는 데이지에게 원하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과거를 돌리는 것이었다. 그는 데이지가 톰에게 가서 "난 당신을 결코 사랑한 적이 없어요."라고 말하는 것을 원했다. 그는 과거를 반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바는 결국 톰과 데이지, 개츠비 사이에서 큰 갈등으로 번지고 만다. 톰은 어느새 바람둥이에서 성인군자가 되어 개츠비를 뭐라 하며 그의 돈의 검은 출처를 떠들고, 개츠비는 데이지에게 그녀가 톰을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다고 말하라며 요구한다. 하지만 데이지는 거짓말을 할 수 없다며 톰을 사랑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러한 싸움 끝에 데이지는 불안한 마음으로, 개츠비와 함께 집에 돌아가면서 톰의 정부인 머틀을 차로 치고 만다. 사고로 인한 것이었지만 머틀은 죽게 되고 개츠비는 데이지의 죄를 뒤집어쓰려 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머틀의 남편인 윌슨은 개츠비를 총으로 쏴 죽이게 된다.
"그 인간들은 썩어 빠진 무리예요. 당신 한 사람이 그 빌어먹을 인간들을 모두 합쳐 놓은 것만큼이나 훌륭합니다."
닉이 개츠비가 죽기 전, 그에게 했던 말이다. 그동안 자신을 드러내지 않던 닉은 자신의 생각을 얘기하기 시작하며 행동을 취하기 시작한다. 그는 이제 '관찰자'에서 하나의 '인물'로 변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개츠비는 죽고 그의 장례식에는 그의 파티에 매일 같이 오던 그 누구도 오지 않았다.
'신문 기사들은 기괴하고 진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직 닉만이 개츠비의 편에 서있었다. 닉은 죽은 개츠비를 홀로 둘 수 없었기에 최대한 그를 알던 이들을 장례식에 오게 하려 하였다. 하지만 그의 장례식에 온 것은 그의 아버지, 그리고 '올빼미 안경을 낀 남자'였다.
소설의 초반부, 닉은 이런 얘기를 한다.
'그래, 결국 개츠비는 옳았다. 내가 잠시나마 인간의 속절없는 슬픔과 숨 가쁜 환희에 흥미를 잃어버렸던 것은 개츠비가 희생물로 삼은 것들, 개츠비의 꿈이 지나간 자리에 떠도는 더러운 먼지들 때문이었다.'
닉 캐러웨이가 작가의 시점을 대변한다면, 작가는 처음부터 끊임없이, 의도적으로 최대한 개츠비는 위대하다고 말하려 했던 것이다. 여기서 의문이 든다. 그렇다면 왜 작가는 개츠비가 위대하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개츠비는 정말 '쓸데없는, 헛수고'만을 했을 뿐인데 말이다.
우선 각 인물이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첫째로, 데이지는 과연 무엇이었까. 데이지는 개츠비를 사랑했을까. 반대로 개츠비는 데이지를 정말 사랑했던 것일까. 아니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진정 '사랑'인 건가. 만일 위대한 개츠비가 사랑과 불륜의 파괴적인 이야기만을 그린 것이라면 개츠비는 글쎄 과연 위대하다고 평가받을 위인일까. 우린 정작 그들이 했던 게 과연 사랑인지도 헷갈리는데 말이다. 개츠비의 행동은 마치 데이지를 소유하고 싶어 하는 것과도 같았으며 개츠비는 닉이 보기에도 의미가 없을, '과거를 되돌리는 일'에 매진했다. 데이지는 개츠비가 자신의 죄를 뒤집어쓰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으며 장례식에는 오지 않았고 그런 소식을 전하려는 닉의 전화는 받지도 않았다. 이 소설이 단지 '사랑'이야기라면 개츠비는 위대한 인물이기는커녕 한심하고 허황된 사람이 아닌가.
"그녀의 목소리는 돈으로 가득 차 있어요."
닉에게 개츠비는 이런 말을 한다. 데이지는 부인인 자신을 두고 머틀과 허구한 날 바람을 피워대는 톰과 왜 이혼을 하지 않는 것일까. 데이지에게 소중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개츠비에게 소중한 것은 데이지였는데 데이지에게 소중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난 이 대사를 통해 데이지는 '돈'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했다. 그러면 개츠비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는 이미 거부가 되었는데 데이지를 왜 좇는 거지.
'데이지는 그가 난생처음으로 알게 된 우아한 여자였다. 그는 온갖 숨겨진 능력을 발휘해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 만나긴 했지만 그들과의 사이에는 언제나 눈에 보이지 않는 가시철조망이 가로놓여 있었다. 그는 그녀가 몹시도 탐났다. 지금까지 이미 많은 사내들이 데이지를 사랑했다는 사실 또한 그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제이 개츠비로서의 그의 장래가 아무리 찬란하다고 해도 그때는 아무런 경력이 없는 한낱 무일푼의 청년에 불과했다. 그는 자신이 그녀와 같은 사회 계층에 속하는 인물인 것처럼 믿도록 만들었다.'
'개츠비는 부가 가둬 보호해 주는 젊음과 신비, 그 많은 옷이 풍기는 신선함, 그리고 힘겹게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과는 동떨어진 곳에서 데이지가 안전하고 자랑스럽게 은처럼 빛을 내뿜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던 것이다.'
데이지는 '부'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데이지는 '부가 가진 환상적, 낭만적 이미지'를 상징했다. 개츠비는 거부가 되었음에도 그에 만족하지 못하였다. 개츠비가 아무리 노력을 하여 부자가 된들, 그가 원하였던 것은 '데이지'였다. 데이지의 목소리가 돈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는 데이지를 계속 사랑했다. 개츠비는 부를 이뤘고 그는 이미 예전에 그가 선망하였던 낭만들을 이뤄낸 것이어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데이지는 개츠비 속에서 이미 '순수한 낭만' 그 자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낭만을 지켜보면서 닉은 개츠비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들려준 이야기, 심지어는 그의 무섭도록 놀라운 감상적인 말을 들으면서 나에게 뭔가 떠오는 것이 있었다 - 포착할 수 없는 리듬이랄까, 오래전에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 잃어버린 말의 파편이랄까. 한순간 어떤 구절이 내 입가에 막 떠오르려고 하더니 벙어리의 입술처럼 벌어졌다. 마치 한 줄기 놀란 숨을 내뱉을 때보다 더 힘이 드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입술에서는 결국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고, 내가 간신히 떠올렸던 구절도 영원히 전달할 수 없게 되었다.'
개츠비는 자신의 이름을 '제임스 개츠'에서 '제이 개츠비'로 바꾸었지만 끝내 그는 운명을바꾸지 못하고 쓰러진다.
닉은 개츠비가 옳았다면서도 데이지를 좋게 보지 않는다. 닉은 개츠비의 낭만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현실보다 이상을 추구하는 모습에, 자신이 그동안 잃어버렸던 어떤 희망을 보았을 것이다.
둘째로, 톰 뷰캐넌과 제이 개츠비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스트에그와 웨스트에그는 왜 이렇게 대비적으로 등장하는 걸까. 이스트에그는 상류층의 사회를 의미하며 거기에 사는 톰이 그들을 대변한다. 톰이 하는 일이란 딱히 없으며 자신의 취미로 '폴로'를 하는 것이 끝이다. 그에 대해 질투인지, 비웃음인지 개츠비는 남들에게 톰을 '폴로 선수'라고 소개한다. 반면 제이 개츠비의 삶을 보면 그가 그 자리에 있기까지 부단한 노력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출생과 여러 버릇들을 바꿔가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파티에서 남들 앞에 떳떳이 설 수 없었는지 모른다. 물론, 그가 정직하게 돈을 벌지 않았음이 그 이유가 될 수 있지만 바로 이 또한 이러한 방법이 아니면 상류사회에 낄 수 없었던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제이 개츠비가 그의 저택에서 여는 파티였지만 거기에 '개츠비는 없었고' 그 파티에 가는 사람들은 개츠비가 부정한 짓을 저질러 돈을 벌었을 거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는 능력이 출중해도 가난한 사람이 부를 이루려면 부정한 짓을 저질러야 하는 당시 미국 사회를 상징하는 게 아닐까. 그리고 개츠비의 꿈이 그냥 꿈으로만 남아야 했던 것도 말이다.
'이제 나는 이 이야기가 결국 서부의 이야기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톰과 개츠비, 데이지와 조던과 나는 모두 서부 출신이었고, 어쩌면 우리는 왠지 동부의 삶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어떤 결함을 공유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셋째로, 이들 모두는 서부 출신의 사람들이었다. 이 소설에서 그들 모두는 비적응자였던 것이다. 톰과 데이지는 개츠비의 파티를 즐기지 못하며 개츠비는 자기 집에서 파티를 여는 것임에도 술을 입에 대지 않으며 파티를 즐기는 모습이 없다. 닉 캐러웨이 또한 파티를 즐기지 못한다. 그들은 화려한, 그러나 허무한 이 동부의 삶을 즐길 수 없는 것이다. 이야기의 결말로는 개츠비는 죽었고 톰과 데이지는 결국 이스트에그를 떠난다. 닉 또한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마지막으로, '올빼미 안경을 낀 남자'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인물은 아닌 지라 영화에서는 생략되다시피 한 이 인물에 내가 집중하게 되었던 것은 그가 파티에 있던 사람들 중에서 유일하게 개츠비의 장례식에 왔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왜 이 사람만 장례식에 오게 한 걸까. 소설가는 별 생각없이 사건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그는 대체 누구일까. 책장을 잠시 앞으로 넘겨 본다.
이 인물은 개츠비의 파티에서 잠시 등장한다. 그는 개츠비의 서가에서 닉 캐러웨이를 맞이한다.
"저 서적들 말이오. 저것들은 진짜요."
"진짜 중에서도 진짜요. 난 저것들이 그저 마분지로 만든 장식용 책일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완전히 진짜인 거요. 이렇게 페이지도 있고. 자 보시오!"
그는 우리에게 의기양양하게 소리친다. 개츠비의 서가에 있는 책들이 진짜라고. 이건 파티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개츠비의 내면은 진짜라고 소리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만이 개츠비의 그런 모습을 봤기에 홀로 장례식에 온 것이 아닐까. 닉 캐러웨이가 '관찰자의 시점'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그래서 독자들에게 객관적인 시각을 줄 수 없는 그 장례식에서 올빼미 안경을 낀 남자는 나타나 이런 말을 남긴다.
"불쌍한 놈."
결과적으로 개츠비가 했던 행동은 '헛수고'가 맞았지만 그것이 허황되고 의미 없는 것은 아니었다. 화려한 겉모습만을 좇았던 것은 개츠비가 아니라 그의 파티에 오는 수많은 사람들이었고 개츠비는 '초록색 불빛의 낭만'을 믿었다. 그런 낭만이야 사람들에 따라 정말 헛수고라고 여겨질 수도 있지만 말이다. 사람들은 그쯤 되면 만족해야지 운명을 바꾸려고까지 하는 건 욕심이 아니냐며 그런 '낭만'에 대해 비판할 수도 있다. 현실을 바라보지 못한다고 말이다.
난 반은 맞고 반을 틀리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에게는 모두 현실과 이상이 공존한다. 차가운 현실을 견뎌가면서도 항상 꿈을 꾸기에 그나마 삶이 아름다울 때가 있다. 지난번의 소설 '설국'처럼 자신이 처한 현실을 파악하면서도 우린 꿈을 꾼다. 그리고 그 환상에 때로 사로잡혀 길을 걸으면서도 현실을 깨달아 그 꿈에 돌아서기도 한다. 개츠비가 위대하면 넌 그렇게 살 수 있겠냐는 물음에 나는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나 또한 개츠비처럼 말도 안 되는 꿈을 꾸면서, 그와 동시에 그렇게 할 수 없는 현실을 알기에 '데이지'를 포기한다. 그렇지만 '데이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난 '개츠비의 삶'을 꿈꾼다. 개츠비는 '설국'의 요코와 같이 차가운 현실에 의해 부서져 버렸지만 바로 그렇기에 그들이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우리가 개츠비를 바보 같다고 욕하면서도 그에게 끊임없이 매력을 느끼는 이유가 바로 이것에 있다.
맨 처음으로 돌아가서, 개츠비는 과연 위대한가.
난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살지는 못할 것 같지만.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떤가. 개츠비는 위대한 걸까.
개츠비는 그 초록색 불빛을, 해마다 우리 눈앞에서 뒤쪽으로 물러가고 있는 극도의 희열을 간직한 미래를 믿었다. 그것은 우리를 피해 갔지만 별로 문제 될 것은 없다 - 내일 우리는 좀 더 빨리 달릴 것이고 좀 더 멀리 팔을 뻗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맑게 갠 날 아침에... 그리하여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가면서도 앞으로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