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기문 Mar 10. 2020

나의 세계문학 정복기 - 01. 설국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읽고

 난 소설 읽는 것을 좋아한다. 소설이란 우리의 삶을 담기 아주 적절한 장르이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소설은 그냥 작가가 허구로 만들어낸 '쓸모없는 글'이며 그러한 걸 읽는 건 정말 헛수고가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독서모임을 통해 소설에 대해 여러 사람들과 얘기를 하게 되면서, 그리고 실제로 소설을 몇 번 써보는 경험을 통해서 달라지게 되었다. 결론을 바로 말하자면, 소설이란 정말 작가의 삶에 대한 고찰을 담기엔 아주 탁월한 장르이다. 어느 장르의 글을 읽건 느낄 수 없던 '작가의 은밀한 내부'를 관찰하기에는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이 소설에서 말하고 있는 바는 무엇인가. 왜 주인공은 이러한 행동을 하였는가. 작가는 왜 이 인물을 이 부분에 배치하였는가 등에 대하여 끊임없이 생각하다 보면 '작가의 삶'에 다다르게 되며 작가의 철학에 대해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요즘엔 책을 읽으면서 '와 어떻게 이 사람은 이런 표현을 해낼 수 있었을까. 나라면 이런 표현을 상상도 못 했을 텐데.' 하곤 만난 적도 없는 작가에게 질투를 느끼기도 한다.


 다 읽고 난 뒤의 내 책을 보면 열몇 개의 별표와 열몇 개의 빨간 줄들, 그리고 몇십 글자들이 끄적거려져 있다. 이러한 것들을 차라리 글로 남겨보면 어떨까 하는 마음에 이 '나의 세계문학 정복기'는 시작되었다. 누군가 내 글을 읽곤 '이 소설'을 한 번 읽어볼까 하는 흥미를 느낀다면 그것대로 만족스럽고 이미 '이 소설'을 읽은 독자가 내 글을 읽으며 '아 이 사람은 이 책을 읽고 이러한 생각을 했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여도 좋다. 심지어 '에이, 아니지. 이 말은 틀린 것 같아.' 하는 생각을 갖게 되어도 기쁠 것이다. 세계문학 정복기의 첫 번째 이야기가 '설국'이라는 소설로 시작된 것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 그저 이러한 결심을 했을 때, 마침 읽고 있던 소설이 이것이었다. 그럼 서두가 길었는데 세계문학 정복기의 첫 번째, 가와바타 야스니리의 '설국' 정복을 시작하도록 하겠다.



설국, 가와바타 야스나리, 유숙자 옮김(민음사)


이 소설은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국경이란 일본의 군마 현과 니가타 현의 접경을 마라며 흔히 생각하는 나라 간의 국경은 아니다. 이 첫 문장은 일본 근대문학에서 보기 드문 명문장으로 손꼽힌다고 하는데 솔직히 일본어를 배우지 않은 사람 입장에서는 왜 명문장인지 모르겠다. 마치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를 쓴 니체가 독일 문학 최고의 문장가라고 하는데 독일어에 문외한인 나는 '이게 왜?' 하는 바와 같다. 하지만 이 소설을 두 번째 읽을 때에 느끼게 된 건 이게 명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문장 하나에 소설의 핵심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내가 만일 이 소설을 쓴 작가라면 이러한 서두를 쓰곤 '역시 난 천재야.' 하면서 편히 잠을 이룰 수 있을 것 같다. 정말 탁월한 도입부다.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는 이 글의 결말로 마무리 짓고 싶으니 뒤로 하고 소설의 줄거리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고 싶다.


소설의 주인공은 '시마무라'라는 남자로 소설에 나오듯, 무위도식하는 인간이다. 시마무라는 '고마코'라는 온천의 게이샤를 만나러 기차를 타고 이 '눈의 고장'으로 오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다소 껄끄러울 수 있는 이야기인 것이, 시마무라는 이미 배우자가 있는 기혼자이며 '온천의 게이샤'란 인터넷에서 조금 검색해보면 어떤 이미지인지 대충 그려진다. 물론 일본의 문화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서 이러한 내 시각이 조금 잘못되었을 수 있으나 소설에서 그려지는 '게이샤'의 이미지는 성관계까지는 갖지 않더라도 '접대'를 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이렇게 얘기를 하게 되면 이 소설에 관해 괜한 편견을 가질 수도 있는데 내가 느낀 바로는 '설국'은 사회의 어두운 면을 그린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불륜을 아름답게 포장한 것도 아니고 '사랑'이라는 감정을 그린 소설도 아니다. 이 소설을 읽고 느낀 감상을 간단히 얘기하자면 그냥 눈을 감고 꿈을 꿨는데 무척 아름다운 눈 내린 시골마을에 갔다 온 것 같달까.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 이 '눈의 고장'에 대한 묘사가 마치 눈으로 그려지는 듯하며 이 소설에는 일본의 문화와 서정이 가득하다. 그리고 시마무라는 결코 고마코라는 게이샤를 대할 때, 다른 남자들과 같이 그녀를 '비웃지 않는다'. 여기서 비웃는다는 말은 고마코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인데 그녀는 시마무라에게 '당신은 절 비웃지 않는 거죠? 당신은 솔직한 사람이죠?'라는 말을 한다. 그녀의 말을 통해서 '온천의 게이샤'가 된 그녀의 삶을 간접적으로나마 상상하며 그녀를 '친구'처럼 대했던 이는 시마무라 단 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시마무라는 온천에 가서 게이샤를 찾으면서도 어두운 욕망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저 고마코의 말을 들어줄 뿐이다. 그렇다고 그가 그저 순수할 뿐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것이 그가 남자로서 느끼는 것들이 소설에 녹아있다. 처음 읽을 때는 '시마무라의 무심함'과 '고마코의 복잡하고도 서글픈 삶', 그리고 '요코에 대한 의문'을 느꼈지만 다시 한번, 이 소설을 읽게 된다면 고마코의 시마무라에 대한 애정과 함께 이 소설의 모호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대체 고마코는 왜 게이샤가 된 걸까.
 고마코와 요코의 관계는 대체 무엇일까.
 고마코는 유키오와 어떤 사이였을까.

 

솔직히 이 작품에 대해 작가에게 인터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물어볼 것이 한 두 개가 아니다. 이 소설은 불친절하게도 시마무라라는 주인공의 시점에서 무심한 서술을 이어갈 뿐이고 이 시마무라라는 남자는 고마코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면서도 결코 그녀에게 뭘 물어보질 않기 때문에 독자는 진짜 '추측'을 해야 할 뿐이다. 하지만 그러한 것이 작가의 의도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은 몇 번이고 읽어도 재밌다.

'아 혹시 이래서 이랬나. 그래서 그랬던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거기다 하얗게 눈이 내린 일본의 어느 시골마을을 떠올리게 하는 문장들은 정말 아름답다.


'사방의 눈 얼어붙는 소리가 땅속 깊숙이 울릴 듯한 매서운 밤 풍경이었다. 달은 없었다. 거짓말처럼 많은 별은, 올려다보노라니 허무한 속도로 떨어져 내리고 있다고 생각될 만큼 선명하게 도드라져 있었다.'


'어느새 해가 뜨는지 거울 속의 눈은 차갑게 타오르듯한 광채를 더해 갔다. 그럴수록 눈 속에 떠오른 여자의 머리카락도 선명한 자줏빛이 감도는 검은색으로 한층 짙어졌다.'


'아이들이 도랑의 얼음을 끌어안고 와선 길바닥에 내던지며 놀고 있었다. 힘없이 깨지며 흩어질 때 반짝거리는 것이 재미있는 모양이다. 햇살 가운데 서 있자니 그 얼음의 두께가 거짓말처럼 생각되어 시마무라는 한참을 계속 지켜보았다.'



시마무라는 고마코의 행동들에 대해 헛수고라고 느끼면서도 그녀에게 순수함을 느낀다.

시마무라는 실제로 서양무용을 본 적이 없으면서도 외국 서적의 사진이나 글에 의지하여 서양무용을 몽상하며 심지어 그에 대한 소개글을 쓰는 일을 한다. 그리곤 눈으로 그 춤을 볼 수 없으니 이건 '천국의 시'가 되어버린다. 이보다 '헛수고'인 것이 어디 있을까. 물론 그로 인해 돈을 벌 수 있으니 다른 의미로는 헛수고는 아니지만 말이다.


고마코는 열대여섯 살부터 읽은 소설을 기록해두곤 하는데 감상들은 적지 않고 제목과 지은이, 그리고 등장인물들 이름과 그들의 관계 정도만 기록한다. 그리고 비록 소문이라고 나오지만, 오래 병을 앓는 '유키오'라는 그녀의 약혼자(고마코는 그냥 그를 소꿉놀이 친구라고만 언급한다)의 병원비를 위해 게이샤가 된다. 거기에 유키오라는 인물은 '요코'라는 새 애인의 간호를 받으며 집에 돌아온다. 이것에 대해 시마무라는 '헛수고'라고 느끼면서 고마코에게 순수함을 느낀다.


이를 보고 '헛수고'에 대해서 생각했다. 난 왜 소설을 읽을까. 이것도 헛수고가 아닐까. '설국'이라는 소설을 읽고 이러한 글을 쓰는 지금, 나는 헛수고를 하고 있는 셈이 아닌가. 누가 독자가 될지, 아예 독자가 없을 글인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헛수고라고 하니 얼마 전에 읽은 '위대한 개츠비'가 떠오른다. 어떤 사람들은 개츠비를 '과시, 허황, 화려한 성공만을 추구한 사람'이라 치부할지 모른다. 하지만 제목대로 개츠비는 위대하다. 오히려 개츠비의 화려함만을 보고 그를 추종했던 소설 속 사람들이 허황된 자들이다. 정작 개츠비가 그러한 파티를 열었던 것은 단 한 사람, 데이지만을 위한 것이었으며 그가 끝까지 데이지의 죄를 자기가 덮어쓰면서까지 데이지를 위했던 것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헛된 것'이라 느끼는 사람은 '마찬가지로 개츠비를 읽고 그렇게 느끼는 사람들'이다. 만일 개츠비가 그 행동에 대해 헛수고라 느끼지 않았으며 행복을 느꼈으면 그걸로 된 것이다. 어떤 행동에 대해 '헛수고'라고 느끼는 것의 기준은 '자신'이며 결코 그 기준이 타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시마무라는 고마코의 헛수고를 '헛수고'라 느끼면서도 그녀에게 순수함을 느꼈던 것이 아닐까. 시마무라는 그것에 아름다움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글을 써 내려가고 있는 나 또한 결코 헛수고를 하는 것이 아니며 지금 만족한다면 그게 끝인 거다.



"당신은 솔직한 사람이죠? 솔직한 사람이라면 제 일기를 모두 보내드릴 수 있어요. 절 비웃지 않는 거죠? 당신은 솔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고마코는 도쿄로 다시 돌아가는 시마무라에게 이렇게 말한다.

앞에서 말했지만 비웃는다는 게 무엇을 말하는 걸까. 고마코와 같이 일했던 '기쿠유'라는 나이 든 게이샤는 좋아하는 사람에게 버림받게 되어 '이 고장'에 더 이상 있을 수 없게 되어 떠나게 된다.

게이샤를 불렀던 수많은 남자들은 자신의 속내를 감춘 채,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까. 그러한 거짓을 말하며 그들을 비웃었을지 모른다. 아니 실제로 비웃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버림받은 여인들은 자신이 '비웃음'당했다고 느낄 것이다. 그 남자에게 놀아났다고 말이다. 그에 비해 시마무라는 그러한 말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심이 딱히 없다고 느껴질 정도이다. 그러니 고마코의 입장에서는 그가 솔직한 사람이라 느껴지지 않았을까. 자신에게 사랑을 주지 않을지라도 '거짓 사랑'을 주지 않으니 말이다. 물론, 사랑을 주지 않았다고 단정 짓는 것도 어렵다. 앞서 말했듯, 이 소설은 모호하니까 말이다. '시마무라는 고마코를 좋아했을까.' 모르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언젠가 그는 이곳을 떠나야 할 것임을 그는 알았다. 그리고 이 소설은 그것을 깨달아가는 과정이다.


"도쿄 사람은 복잡해. 주변이 어수선하니까 마음이 흩어지는 거죠?"
"모든 게 흩어지고 말지."

이 대화처럼 이 소설은 점점 흩어진다. 시마무라의 고마코에 대한 감정도, 고마코와 요코 사이의 감정도, 유키오라는 사내에 대한 것도 말이다. 소설의 처음부터 '환자'로만 등장했던 이 허약한 남자는,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사라진다. 단지 그에 대한 건 그를 사랑했던 '요코'의 감정만이 존재할 뿐이다. 게다가 요코마저 불이 난 고치 창고에서 추락해버리고 만다. 요코가 어떻게 되었냐고. 그것도 모른다. 이 소설은 요코라는 존재도 흩어져버리는 것이다.


흩어져 버려서, 마지막에 가서는 잘 모르겠다 하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그건 사람의 감정이 아닐까. 이 소설은 기승전결의 사건 위주로 서술되지 않고 등장인물의 감정 흐름이 중점적으로 묘사된다.

내가 했던 첫사랑과 예전에 사랑했던 여인들을 떠올려본다. 과연 그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글쎄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는 무척 좋았고 행복했는데 말이다. 그들과 같이 갔던 곳들, 그들의 이름, 그들의 생일, 그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하면 분명 그들은 존재하는데 그들과 나눴던 감정이란 어딘가로 흩어 없어져 버렸다. 그 감정은 아무리 노력해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러한 것과 마찬가지로 소설의 초반부에서 느낄 수 있었던 , 고마코가 게이샤가 되기 이전의, 풋풋하면서 아름다웠던 감정들은 후반부로 갈수록 흩어진다. 그래서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는 고마코가 시마무라를 그렇게 좋아했는지 잘 알 수 없었다.




여관 주인이 특별히 꺼내 준 교토 산 옛 쇠 주전자에서 부드러운 솔바람 소리가 났다. 꽃이며 새가 은으로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또한 멀리서 들리는 솔바람 소리 저편에서는 작은 방울 소리가 아련히 울려 퍼지고 있는 것 같았다. 시마무라는 쇠 주전자에 귀를 가까이 대고 방울 소리를 들었다. 방울이 울려대는 언저리 저 멀리, 방울 소리만큼 종종걸음 치며 다가오는 고마코의 자그마한 발을 시마무라는 언뜻 보았다. 시마무라는 깜짝 놀라, 마침내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시마무라는 도쿄라는 현실이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도쿄로 떠나야 했다. 그는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자신을 향해 마음을 표하는 고마코에게 아무런 것도 주지 않았는지 모를 일이다. 시마무라도 언젠가는 그녀를 떠나게 될 것이라고, 고마코는 결국엔 느끼게 되어 그에게 이런 말을 한다.


"당신은 절 비웃고 있었군요. 역시 비웃고 계셨던 거군요."


시마무라는 이에 눈을 감은 채 잠자코 있어야만 했다. 그는 그녀를 비웃고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그는 그녈 비웃고 있었는지 모른다. 다시 말해 그녀가 느끼는 바는 결국 버림받았다는 것이다. 즉, 그가 그녀를 비웃었든 아니든 그건 중요치 않다. 그녀가 '비웃음 당했다'라고 느끼는 것이 중요한 것이며 이러한 상황을 시마무라는 막을 방도가 없었다. 시마무라는 점점 고마코에게 사랑을 느꼈을지 또한 모를 일이다. 도쿄로 언젠가는 떠나야 하는데 점점 고마코에 대한 감정이 커지고 있는 자신을 새삼 깨닫곤,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겠다.'라고 마음먹은 것일지도 모른다.


시마무라에게 '눈의 고장'이란 현실과 동떨어진 곳이었다. 고마코가 있는 이 '눈의 고장'은 마치 그에게 꿈과 같은 공간이며 그곳에서 늘 무심한 듯 행동하는 걸로 그려지는 것과는 반대로 이 곳은 그에게 '감정'이 숨 쉬던 공간이 아니었을까. 시마무라가 이곳에 왔던 것은 정말 '헛수고'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시마무라와 고마코는 '헛수고'를 한다. 사람의 감정에서 태동하는, 어차피 이렇게 흩어 없어져 버릴 헛수고를 말이다. 이렇게 말하면, 그들은 이를 끝에서 깨달은 것 같지만 사실 처음부터 이것이 헛수고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맨 처음 만나 나누는 대화들을 다시 읽어보면 알 수 있다.

반면에 요코는 다르다. 요코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미 죽음이 예정된 '유키오'에 대한 간호를 하고 그가 죽어서도 매일 그의 무덤에 찾아간다. 그녀의 '찌를듯한 아름다운' 눈을 시마무라는 자주 피하곤 했는데 그 눈에는 '헛수고'를 진심으로 '헛수고'라 생각하지 않는 절대적인 순수함이 담겨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순수함이란 세상의 차가운 풍파에 의해 꺾여버리고 만다. 그렇게 그녀는 불이 난 고치 창고에서 추락하며, 고마코는 그녀를 가슴에 안고 울부짖는다.


"이 애가 미쳐요. 미쳐요."

인간의 운명이란 이 순수한 존재가 미치기엔 충분히 차갑다는 것을 고마코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고마코는 요코를 짐이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울부짖는 고마코에게 다가가려다 시마무라는 사내들에게 떠밀려 휘청거리고 시마무라가 발에 힘을 주며 위를 올려다본 순간, 쏴아 하고 은하수가 시마무라 안으로 흘러드는 듯했다.


소설은 이렇게 끝이 난다.

이렇게 나도 글을 끝맺으려 하는 지금,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설국'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려 했을까.

글쎄 잘 모르겠다. 다만 내가 느낀 바는 맨 위에서 밝혔던 대로, 마치 꿈을 꿨는데 그 꿈에서 내가 시마무라가 되었던 것 같다는 것이다.

자, 이제 서두로 돌아가서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라는 책의 도입부가 정말 탁월하다고 느꼈던 나의 감상이 이해가 가는가.

'국경의 긴 터널'이란 것을 지나니 현실을 벗어나 '새하얀 눈의 고장', 마치 꿈과 같던 감정들의 공간으로 시마무라는 들어서게 된 것이다. 여전히 일본어의 운율감을 고려할 수 없으니, 그렇게 명문장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정말이지 '설국'이라는 소설의 내용을 관통하는 환상적인 도입부가 아닐 수 없다.



2020년 3월 7일


유기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