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저 기차를 타고 런던에서 파리로 넘어오자마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얘네는… 나를 뭘 믿고 그냥 보내주는 거야?’
기차역은 파리 시내 한가운데에 있었다. 한 손에 초록색 여권을 꼬옥 쥐고 나는 멀뚱멀뚱 기차역을 둘러봤다. 그 누구도 나의 여권을 검사하지 않았다. 아니, 여권을 검사하는 곳조차 보이지 않았다. 다들 당연하게, 마치 대전에서 KTX 타고 서울역에 내리듯이 제 갈 길을 갈 뿐이었다.
국경을 넘어가도 여권 검사를 하지 않는 것. 그제야 EU가 무엇인지, 이것이 사람들의 삶 속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서서히 몸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유럽인이 아니었다. 한국에서 태어난 덕에 무비자로 갈 수 있는 나라가 많긴 하지만 그렇다고 비자 없이 질릴 때까지 유럽에 눌러 지낼 수도 없었다.
한국인이 무비자로 방문할 수 있는 유럽 국가는 크게 쉥겐협정 국가와 양자사면증면제협정 우선 국가로 나뉜다.
지금부터 잠시, 해당 내용에 대한 설명을 아주 쉽고 짧게 하고 넘어가려 한다. 만약 쉥겐협정과 양자사면증면제협정에 대해 잘 안다면 다음 단락은 넘어가도 좋다.
그러나 두 협정에 대해 잘 모른다거나, 나중에 오랜 기간 유럽으로 여행을 떠날 계획이 있거나, 현재는 아무 생각이 없지만 인생이란 마치 흘러가는 강물처럼 어떻게 될지 모르니 일단 알아 두면 쓸 데는 있겠지 싶은 사람은 이 설명을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쉥겐협정은 총 12개국이 가입되어 있다. 그리스, 룩셈부르크, 리히텐슈타인, 스위스, 스페인,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에스토니아, 포르투갈, 프랑스, 핀란드, 헝가리가 그 12개 국이다.
우리는 무비자로 해당 국가에 당당히 진입할 수 있다. 엽기적인 그녀에서 교복을 입고 클럽에 들어가는 전지현과 차태현처럼 여권을 들이밀어도 아무도 당신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조건이 있다. 무비자로 입국할 수는 있지만, 저 12개국에 체류하는 총기간이 180일 중 90일을 초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충 어림잡아 계산했을 때 6개월 중 3개월 만이 당신이 12개의 나라들을 무비자로 방문할 수 있는 기간이다.
그러므로 쉥겐협정에 가입되어 있는 나라를 여러 군데 방문하고 싶다면, 반드시 날짜를 고루 분배해 놔야 한다. 만약 가고 싶은 나라가 스위스, 프랑스, 헝가리인데 프랑스가 좋다고 그곳에서 80일을 머물게 된다면, 남은 스위스와 헝가리에서는 5일씩 밖에 지내지 못하게 된다.
양자사증면제협정 국가는 쉥겐에 포함되지 않거나, 포함되더라도 한국과 맺은 무비자 기간을 먼저 우선한다는 뜻이다.
보통 나라별로 60일~180일까지 체류할 수 있는 기간이 넉넉하기 때문에 비자일 수를 계산하며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는 효자 국가들이다.
해당되는 국가는 네덜란드 독일,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벨기에,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체코, 폴란드, 몰타,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아이슬란드가 있다. 그리고 그리스는 쉥겐협정에 들어가지만, 다른 쉥겐국을 통해 입국하게 되면 양자협정을 우선으로 본다.
자, 이제 다시 여행 얘기로 넘어오겠다. 그런 이유로 나처럼 유럽에 언제까지 있을지 본인도 모르는 사람은 비자 계산을 미리미리 잘해 놔야 한다. 얼핏 정신줄 놓고 돌아다녔다가는 어느 날 유럽의 공무원들에게 의도치 않은 아주 깊은 오해를 사버리게 된다.
이 오해란 것이 그냥 서로 감정 상하고 끝나면 참 좋을 텐데. 벌금 내고 국외추방까지 당할 수 있으니 장기 여행자는 항상 머릿속에 내가 이 나라에 며칠째 묵고 있는지를 상기하며 다녀야 한다.
내가 불법체류의 의지가 없다는 것을 프랑스 공무원에게 피력하고 싶었지만, 불가능할 것 같았다. 나는 가방 가장 깊숙한 주머니에 여권을 집어넣고 캐리어를 끌로 예약한 숙소로 향했다.
숙소는 몽마르트르 언덕 가는 길에 위치한 ‘우드스탁 호스텔’이었다. 언덕 부근에 있어서 그런지 가는 길이 내내 오르막 길이었다. 하지만 뭐든 처음이 어렵다 하지 않는가.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의 경사로를 생각하니 제법 걸을만하게 느껴졌다.
이래서 어른들이 다양한 경험을 강조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 경험이 나에게만 일어나는 시련이 아니라는 사실과 그 시련도 언젠가는 끝을 맞이한다는 진실을 알게 된다면, 나를 뒤흔드는 것들로부터 초연해질 수 있게 되는 걸까.
우드스탁 호스텔은 다행히 기차역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숙소의 문을 열자 고양이 한 마리가 나를 반겨 주었다. 이곳에 고양이가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 고양이가 바로 우드스탁 호스텔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기도 했으니까.
사실 이 호스텔은 파리에서 가장 싼 방이 아니다. 원래대로라면 최대한 돈을 아껴야 하기 때문에 저렴한 방을 찾아가는 것이 맞다.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몰라서 1~2유로에 벌벌 떠는 나라면 그런 곳을 찾아가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여기는 고양이가 있었다. 몽마르트르 근처고, 별점이 상당히 높았고, 방도 깨끗하고, 아침밥도 주고, 직원만큼 고양이가 프렌들리 하다는 리뷰가 많았다. 자, 이제 어떤 게 더 합리적인 선택이지?
꼬불꼬불 나선형으로 이어진 계단을 따라 올라가 배정받은 방으로 들어갔다. 방은 넓고 쾌적했다. 2층 침대 5개가 놓여 있었고, 창가에 앉을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도 하나씩 놓여 있었다.
한창 외출하기 좋은 날씨와 시간대였기 때문에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1층 침대에 가방을 던져 놓고 닫혀 있던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창밖으로 몽마르트르로 올라가는 길이 쭈욱 펼쳐졌다. 길게 세로로 만들어진 예쁜 창문들이 마주 보이는 건물 벽면을 정갈하게 채워 놓고 있었다.
거리는 생기가 넘쳤고, 사람들은 즐거워 보였다. 도시는 온몸으로 이곳이 ‘파리’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때 맑은 하늘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예기치 못 한 여우비에 건너편 건물의 창문 몇 개가 열렸다. 사람들은 몸을 살짝 빼어 내어 하늘에서 내리는 잔잔한 비를 맞았다. 그 모습조차 파리스러워 나도 그들처럼 손을 뻗어 비를 만졌다.
파리가 낭만의 도시라고? 낭만 없는 도시에서 살다 온 사람으로서 그런 수식어를 붙이는 것에 쓰라린 복통을 느끼지만, 어쩔 수 없이 어느 정도는 인정하기로 했다.
이 도시는 철없는 예술가처럼 비현실적이지만 아름다운 그들의 망상과 같은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비가 그칠 때쯤 나는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안녕, 일루디. 오랜만이지? 나 파리에 와 있어. 네 시간만 괜찮다면 우리 만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