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해외에서 만난 외국인 친구? 그거 다 한 때 아냐? 걔를 언제 다시 또 만나?”
나도 옛날에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내가 베트남 바닷가에서 가방이 파도에 휩쓸려 버려 비명을 지르고 있을 때 그 모습이 웃기다며 깔깔 웃던 일본인들을 야시장에서 룸메이트인 한국인의 소개로 알게 되거나, 캄보디아에서 만난 프랑스인이 자신이 살면서 본 가장 독특한 한국인 남자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는데 알고 보니 그게 룸메이트였던 그 한국인이었다던가, 라오스 게스트 하우스 마당에 앉아 베트남에서 겪었던 일본인들과의 재미있는 우연과 만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대문을 열고 이야기의 주인공인 일본인 친구가 들어온다던가 하는 일을 겪기 전에는 말이다.
그렇다. 세상은 정말 좁았다. 그걸 몸으로 느낀 후부터 해외에서 만난 외국인 친구 한 명 한 명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다.
만났던 모든 사람들이 좋았던 것은 아니지만, 좋은 사람들과의 인연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있다. 생각해보니 인생이랑 똑같구나. 이것도 삶의 한 부분이라서 그런가보다.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만나고 싶다고 메시지를 보낸 주인공, 일루디는 위에서 등장한 캄보디아에서 만난 프랑스인이다.
예의 바르고, 유쾌하고, 배려심 깊고, 지금의 내가 생각해도 어린아이 같았던 과거의 나를 존중해주었던 친절한 프랑스인.
그녀와 파리에서 가졌던 만남을 이야기하기 전, 일루디와의 첫 만남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려 한다.
나는 캄보디아 여행 내내 일루디와 함께 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일루디와의 추억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나의 캄보디아 여행기를 풀어내야 한다.
캄보디아, 그곳은 내가 방문했던 나라 중 가장 낯설었던 나라였다.
캄보디아 여행은 시작부터 불안감이 가득했다. 세계 7대 불가사의를 내 눈으로 보고 싶다는 어릴 적 꿈을 실현하기 위해 충동적으로 결정한 여정. 그만큼 그 나라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준비해 놓은 것도 없는 상태였다.
앙코르와트가 있는 캄보디아의 씨엠립은 보통 태국 방콕에서 넘어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거리가 멀지 않고 여행사를 통한다면 ‘교통비’만 따졌을 때 가격이 그렇기 비싸지 않은 편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캄보디아의 ‘국경’이 예로부터 악명이 높다는 거다.
방콕에서 씨엠립으로 가는 가장 저렴한 방법은 방콕에서 캄보디아 국경까지 버스 타기-국경에서 비자발급받기-캄보디아 국경에서 택시를 구해서 씨엠립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읽으면서 느꼈겠지만, 상당히 번거롭고 변수도 많이 존재하는 방법이다. 게다가 나처럼 혼자 여행하는 여성이 낯선 나라의 시골(국경 지역은 도시화가 많이 되어 있지 않다)에서 분위기 파악도 안 한 상태로 냅다 택시를 탄다? 이건 용기가 아니라 100년 뒤 임종 직전에 주마등을 띄우며 '1세기가 넘는 인생 중 내가 한 가장 어리석은 짓 TOP5'에 충분히 들 수도 있을만한 일이었다.
선배 여행자들의 조언에 따라 나도 여행사를 통해 들어가기로 했다. 가격은 좀 더 비싸겠지만, 위험도와 번거로움을 따진다면 감안할 만큼이라 판단됐다.
마침 묵고 있던 태국의 게스트하우스가 여행사를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곳을 통해 씨엠립행 버스를 끊었다. 여행사 직원은 나에게 비자 발급도 여기서 하겠냐고 물었다. 이미 인터넷을 통해 국경에서 비자발급을 하면 $30밖에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나는 그녀에게도 국경 가서 발급받겠다고 대답했다.
그녀가 심드렁한 표정 그러든가, 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럼 버스회사 직원들이 비자 발급받으라고 해도 거절해.”
거기서 조금 이상함을 느꼈다. 왜… 버스 회사 직원들이 비자발급을 받으라고 한다는 거지? 국경에 바로 데려다주면 되는 건데?
하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원래 사람은 직접 경험하기 전에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르는 법이니까.
약속했던 날 나는 씨엠립으로 향하는 봉고차에 탔다. 운전자는 웃는 얼굴로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때까지는 분위기가 꽤 괜찮았다. 차는 꽉 차 있었고, 일행 중에는 내 또래의 동양인 여성들도 보였다. 차는 낡았지만 길이 험한 편은 아니라 멀미가 심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봉고차는 우리를 캄보디아 국경이 아닌 숲 속 어딘가에 위치한 그들의 사무실로 데려갔다.
그들은 그곳을 ‘쉬었다 가는 곳’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그곳은 쉬었다 가는 곳이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비싼 돈을 내고 ‘강제로’ 쉬어야 하는 곳이었다.
그들은 한 명씩, 혹은 일행으로 보이는 두 세명씩을 붙잡아 사무실 안 쪽의 또 다른 사무실로 끌고 들어갔다. 나는 앞쪽에 타고 있었기 때문에 여행객 중 3번째로 끌려 들어갔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인삿말을 건네던, 그러나 이제는 그 친절한 표정을 더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된 버스기사의 안내를 받으며 말이다.
문을 열자 창문을 등지고 한 남자가 사무 책상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마치 '왼팔'처럼 다른 직원이 앉아 있었다. 버스 기사는 나를 책상 앞 의자에 앉히고 '오른쪽'에 서서 내 정수리를 내려다 보았다.
'...백퍼 깡패다.'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로 맞은 편에 앉아 있는 남자를 쳐다봤다. 남자의 목소리는 강압적인 분위기와 달리 제법 부드러운 편이었다.
“패스포트”
“… 왜요?”
“비자 발급받아야지.”
“… 비자요?”
비자라는 말에 태국의 여행사 직원이 해주었던 조언이 떠올랐다.
“그럼 버스회사 직원들이 비자 발급받으라고 해도 거절해.”
태국의 여행사 직원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캄보디아인들이 이런 식으로 중간에 여행객을 빼돌려 강제로 웃돈을 주고 비자를 발급받게 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래도 나름 사업 파트너라고 대놓고 악행을 말할 수는 없고, 그런 식으로 돌려 말했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언니. 이왕 말해줄 거면 이 사람들이 이렇게 깡패처럼 무서운 분위기로 한 명씩 불러들여서 비자 받게 한다는 것도 좀 알려주지 그랬어. 그랬으면 내가 언니네서 발급받고 갔잖아…
나는 울며 겨자 먹기, 아니 겨자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가방에서 천천히 여권을 꺼내 건넸다.
비자 가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내가 캄보디아로 넘어 간다고 태국 돈을 거의 다 썼던 상태라 그들이 요구하는 비자 금액만큼의 바트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은 기억한다.
돈이 모자라 당황한 표정을 짓자 남자는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달러도 받아.”
그렇게 나는 환율 적용해서 봉고차에 탔던 사람 중 가장 비싼 돈을 주고 캄보디아 비자를 사서 나왔다.
설마 진짜 해코지라도 하겠냐, 끝까지 버티지…라고 생각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
생각해보면 나는 여행 운이 참 좋은 사람이다. 이런 호기심을 가진 사람에게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도 갖고 있으니까.
우리 일행 중에는 여행객 커플이 있었다. 그들은 나를 포함한 여행객들이 비밀의 방에 끌려 들어가서 허접한 비자 종이 한 장씩을 쥐고 나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비자 강매라는 것을 곧바로 알아챘다.
그들의 차례가 오자 커플은 버스 기사에게 여기서 비자를 발급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면 출발 안 해.”
“뭐?”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비자 발급을 받아야지 출발할 수 있어.”
그렇다. 그 커플을 제외한 승객들은 호구에서 순식간에 인질로 바뀌어 있었다. 캄보디아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당황의 빛이 감돌았다.
커플은 당연히 버스 직원과 말다툼을 했다. 그런 것이 어딨냐, 부당하다, 당신은 우리를 씨엠립까지 데려다주는 것이 업무다.
하지만 배 째라는 사람을 누가 이길 수 있겠는가. 망나니 칼이라도 들고 있으면 모를까.
결국 그 커플은 국경까지 걸어서 가겠다고 선언했다. 핸드폰 유심을 사서 왔는지 인터넷 지도를 보고 가면 된다고 판단한 듯하였다. 당연히 남은 이동수단에 관한 환불은 진행되지 않았다.
그렇게 그 커플은 핸드폰을 보며 자신들의 몸만큼 크고 무거운 배당을 이고 사무실을 떠났다. 그들이 떠나고 잠시 뒤, 우리도 타고 왔던 봉고차를 타고 그 사무실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