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라 랜드> 이후 오랜만의 가슴 벅찬 뮤지컬, 그리고 인생...!
초등학교 6학년, 친한 교회 친구 녀석이 갑자기 통기타를 배우자며 운동장에서 놀고 있던 나를 교회로 끌고 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혼자 배우기 머쓱해서 그랬던 것 아닌가...' 싶지만, 어쨌든 그렇게 나는 예기치 못한 기회로 기타라는 악기와 만났다.
그렇게 18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기타를 치고 있다(이제는 통기타가 아닌 일렉기타를 친다). 그게 우연이었는지 운명이었는진 모르지만 내 친구가 진즉에 기타를 그만둘 때에도, 다른 재미난 취미들이 나를 유혹할 때에도 그만둘 마음이 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그저 '이런 게 인연인가 보다' 생각하며 계속, 잠시 쉴지언정 계속, 내가 도전해보고 싶은 무언가를 연습하고 결과물로 만드는 과정을 반복하며 즐거운 취미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비록 취미 수준에서 그친 데다 그마저도 오래 쳤다기엔 조악하기 그지없다만, 유튜브에 간간이 영상을 업로드할 수준 정도는 되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결과물이 어떻든 그러한 활동 자체를 즐기는 '예술가의 아이덴티티'를 가진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때의 '만남'에 한 없이 감사할 뿐이다.
사설이 좀 길었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인 조나단 라슨(앤드류 가필드) 역시 어린 나이에 뮤지컬과 우연처럼 만나 평생을 뮤지컬과 함께 하겠다고 다짐했다는 점에서 필자와 엇비슷한 구석이 있는 인물이라 생각했다. 물론 그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개념을 뒤바꿔놓다시피 한 불세출의 천재였기에 방구석 기타리스트에 불과한 필자와는 하늘과 땅 차이긴 하나, 영화를 보는 내내 같은 예술가라는 아이덴티티를 가진 이로서의 동질감, 그리고 나는 아직 감히 손 닿지 못한 '창작'이라는 영역에서 능력을 펼치는 그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경외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던, 참으로 뜻깊고 가치 있는 영화이자 체험이었다. 뮤지컬 영화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도 생각 이상으로 즐겁고, 가슴 한 켠이 벅찼다.
얼마 전,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하던 당시 봉준호 감독이 인용했던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명언이 떠오른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이 문장만큼 이 이 영화, 아니 조나단 라슨이라는 인물을 대변할 수 있는 문장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의 뮤지컬과 음악들은 정말 개인적이고, 때로는 너무나 사소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것들의 집합체였다.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취미인 수영을 하면서 느끼는 것들, 식당에서 아르바이트 중 손님들을 보며 느끼는 감정 등...
영화를 보는 내내 '이렇게 사소한 주제로 음악을 만들어도 되나...?'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는데, 그러던 도중 "아차!" 싶었다. 내가 그동안, 무의식적으로 예술을 뭔가 대단하고 멋들어진 것에 한정 짓고 있었던 것 아니었나 싶어서.
때문에 이 영화는 창작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예술가들에게 귀중한 힌트를 제공하고, 새로운 길을 열어줄 작품임에 분명하다. 실제로 영화가 창작 뮤지컬을 완성시키는 과정 가운데 벌어지는 사건들과 그 어려움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데다가, 그중에서도 뮤지컬의 주제곡을 써내는 동안 그가 겪었던 고난과,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끝끝내 영감을 떠올리는 장면이 굉장히 사실적으로 잘 그려져 있기 때문에 예술가 입장에서 공감이 되는 것은 물론, 새로운 원동력이 되어줄 수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적어도 필자에게 있어서는 한 예술가의 삶의 단편을 이만큼 깊게, 상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영화는 처음이었다.
필자는 앤드류 가필드라는 배우를 <어메이징 스파이더 맨>을 통해 처음으로 접했다. 개인적으로는 꽤 즐겁게 봤다만, <어메이징 스파이더 맨>은 분명 성공한 시리즈는 아니었다. 워낙에 기존의 <스파이더 맨> 3부작이 인기가 많았기에 리부트 작품에 대한 곱지 못한 시선이 팽배했고, 대부분이 '원조'인 토비 맥과이어의 '어수룩한 순수 청년 피터 파커'의 매력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그보다 훨씬 쾌활하고 장난기 많은 '앤드류 가필드의 피터 파커'에 큰 갭을 느껴 거부감을 느껴 필요 이상으로 박한 평을 받게 된 느낌이랄까(실은 후자가 훨씬 원작 코믹스에 가까운 설정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훨씬 짜릿하고 경쾌해진 '웹 스윙', 그리고 앤드류 가필드와 엠마 스톤 커플의 조합, 그리고 앤드류 가필드라는 배우가 피터 파커로서, 그리고 스파이더 맨으로서 보여줬던 훌륭한 연기 등 나름의 매력을 갖춘 시리즈였기 때문에 아쉬움이 더했다(오늘 개봉한 <스파이더 맨 - 노 웨이 홈>에서 다시 스파이더 맨이 되어 돌아온 것 같은데, 그가 그때의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기를 바란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틱, 틱... 붐!>을 통해 다시 보게 된 그는 특유의 매력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확실히 진일보한 배우가 되어있었다. 장난기 가득하지만 순수함을 잃지 않은, 그리고 그렇게 순수한 내면을 가진 이가 감정적으로 격해졌을 때 뿜어낼 수 있는 절절한 감정연기 능력 등은 여전했지만, 그에게서 피터 파커의 모습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오직 조나단 라슨일 뿐이었다. 전에도 잘했지만 보다 극 중의 인물에게 감정 이입을 더 깊게 해서 그 인물 그 자체가 되는 능력이 더 좋아진 느낌이랄까. 비록 필자는 아직 못 봤지만, <어메이징 스파이더 맨> 이후 그간 그가 찍어온 작품들의 성격을 살펴봐도 그는 그 시간을 스스로가 '더 좋은 배우'로 거듭나기 위한 커리어를 다지는 시간으로 알차게 사용하고 온 듯하다. 자신을 단순히 '반짝 스타'에 그치게 할 마음은 전혀 없어 보이는 것만큼, 앞으로 그의 행보가 더욱 기대된다.
또 하나 이야기하고 싶은 점은 바로 이 영화가 '넷플릭스 영화'이며, 애초에 영화관 독점 상영만을 노리는 영화들과 다를 바 없는 퀄리티를 자랑한다는 것이었다.
확실치는 않지만, 과거 마틴 스콜세지의 <아이리시 맨>이 훌륭한 작품성을 인정받은 것을 기점으로 OTT 영화들이 점점 극장으로 역수출되기 시작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이번 <틱, 틱... 붐!> 역시 충분히 주목을 받아도 될 만한 퀄리티로 만들어졌다(다른 뮤지컬 영화들을 보질 못해 좀 섣부른 판단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올해 최고 뮤지컬 영화로 꼽고 싶다. 드라마와 뮤지컬 간의 간격이 촘촘하면서도 잘 연결되어있는 느낌이고, 서로 간의 전환도 전혀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러웠다. 연기도 좋았고, 재미있는 아이디어들 역시 많았다는 점 역시 주목할 만했다).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는 이점으로 인해 굳이 영화관에서 이 영화를 관람하는 이들이 없는 것인지, <라라 랜드> 이후로 봇물 터지듯이 터져 나왔던 뮤지컬 영화에 지쳐버린 탓인지 한국에서는 이 영화에 대한 주목도가 매우 낮은 것 같아 아쉬울 따름.
그래서 이런 생각도 스친다. 신파와 막장에 절여져 있던 국내의 제작 시장에서 골골대던 제작자들이 넷플릭스를 만나며 <오징어 게임>, <지옥> 같은 작품들을 내기 시작한 것처럼, 코로나로 인해 영화관에 발길을 딛지 않는 관객들이 많아지고, 그들의 수요에 맞춰 OTT 영화들이 더 많이 늘어나게 된다면? 이 정도로 높은 수준의 영화들이 OTT를 통해서 독점적으로 공급되기 시작하고, 그리고 그런 현상이 심화될 경우, 관객들이 영화관을 찾을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큰 화면과 음향환경을 갖춘 암실에서 오롯이 영화에 집중할 수 있다'는 장점이 관객들에게 메리트가 없어지는 순간이 온다면, 과연 앞으로 영화판은 어떻게 바뀌게 될까. 영화관에 방문하는 것 역시 극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고급 취미가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물론 당분간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코로나 이후의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우리는 이미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영화관을 찾는 것을 좋아하는 팬 중 한 명으로서 이런 걱정이 단순히 기우에 그치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 틱, 틱... 붐! >
대체 왜 이런 제목을 지은 걸까?
아마도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 입장에서는 가장 궁금하실 부분일 것이다. 이는 쉽게 이야기하자면 오랜 세월 이어지는 '창작의 고통', 그리고 그를 이겨낸 이들에게 찾아오는 영광을 간명하게 나타낸 문장이다.
예술적 가치를 갖는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데에는 때로 엄청난 시간이 필요하고, 그렇게 수 일, 수개월, 심지어는 수년 간 시계는 매초 틱, 틱, 소리를 내며 잔인하리만치 정확하게 흘러간다. 창작의 과제를 안은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피가 말리는 시간들일 수밖에. 그러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주목받는 결과물도 없고, 그들 손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면 예술가들은 지금까지의 시간들이 헛된 것 같다 느끼고, 결국 '아... 이거 내 길이 아닌가 보다' 생각하며 예술을 포기하고 남들과 같은 삶을 살기를 선택하거나, 현실과 타협해서 그들의 색깔을 일부 포기하거나 버리는 것을 통해 '영광'이 아닌,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선택'을 하고는 한다. 후자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세상에는 전자처럼 아예 그들의 길을 포기해야 하는 예술가들이 훨씬 많다는 것.
하지만 사실 예술가들은 그런 타협이나 포기가 아닌, 언젠가 반드시 찾아올 저마다의 영광의 순간을, 그러니까 "뻥!"하고 터지는 대박, 혹은 일생일대의 작품을 기다린다(이는 삶을 위해 예술을 포기한 이라 한들 마찬가지. 그들 역시 저마다 가슴 속에 불꽃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순간과의 만남은, 예술가에게 있어서는 돈이나 명예, 아니 그 무엇보다도 간절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틱, 틱... 붐!> 만큼, 예술가의 인생을 잘 나타내는 문장이 또 있을까?
지금도 그들만의 '붐!'을 기다리며, 틱, 틱... 거리는 시계 소리에 숨 죽이고 피 말리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을 많은 예술가들이 이 영화를 보고 위로를,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더 나아가서는 섬광처럼 떠오르는 영감을 손에 넣게 되길 바란다. 비록 영화관에서의 상영은 끝났지만 넷플릭스에서는 충분히 볼 기간이 많이 남아있으니 반드시 찾아서 보시길. 참으로 오랜만에, 그리고 강력하게 권해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