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5시간을 훌쩍 넘기는 <해피 아워>의 괴이한(?) 러닝타임은 '어디 끝까지 제대로 볼 수만 있다면 봐 보시지!' 라며 필자를 도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처음에는 '뭐지 이거?' 싶었는데, 점점 이 산을 넘어설 수만 있다면 영화 마니아로서 스스로에게 일종의 훈장과 같은 경험이 될 거라는 묘한 도전정신이 샘솟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봉준호 역시 극찬했던 인재이니만큼 그가 이렇게나 긴 시간을 들여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란 대체 무엇일지도 궁금했고). 결국 그렇게 하마구치 류스케의 도발에 넘어간 필자는 이전보다 비장한 각오와 함께 영화관으로 향했다.
※이후 영화 <해피 아워>의 스포일러가 포함된 글이 이어집니다.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께서는 감상 후 돌아오셔도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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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 >
생각보다 좋은 '체험'이었다
<해피 아워>, 생각보다 훨씬 좋았다. 관객이 '영화'라는 매체에 기본적으로 기대하고 있는 바를 뛰어넘는 '신선한 체험'이었달까. 필자 역시 '기나긴 힐링 영화'를 기대하고 갔지만, 분명 그 기대 이상의 즐거움을 얻고 돌아왔다(피곤한 저녁 시간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졸음 한 번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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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감독이 하고 싶은 것을 전부 다 한 영화
일반적인 감독들이라면 영화에서 한 시간 짜리 워크숍과, 소설 낭독회 하나를 통으로 보여주는 '대담한 선택'은 하지 않을 것이다. 러닝 타임이 길어지면 대부분의 관객이 지루함을 느끼게 되고, 이는 영화 전체에 독이 될 가능성이 높은 만큼 제 아무리 중요한 사건이더라도 몇 분 남짓 정도로 축소하는 것이 일반적이니 말이다.
헌데 하마구치 류스케는 그걸 했다. 그저 본인의 메시지를 온전히 전달하기 위해서, 대중성과의 타협 따윈 생각지 않고 한 시간 짜리 워크숍과 낭독회를 관객에게 통째로 보여주며 그 주제 속에 담긴 내러티브들, 즉 이 영화의 1부와 2부의 중심 주제를 관통하는 무언가를 은연중에 관객들에게 전달하려 한 것이다. 이렇게 작품 내에서 또 다른 작품을 통해 영화의 주제를 암시하고, 그를 통해 영화를 이끌어나가는 그의 방식은 굉장히 신선하면서도 기품 있게 느껴졌는데, 물론 그만큼 길어지는 러닝타임은 높은 진입장벽이긴 하지만, 이를 넘어서기만 한다면 필자가 그랬듯 '또 다른 체험'을 하실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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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현실적'이어서 좋았던 영화
어떤 영화에 '현실적'이라는 단어를 붙이려면 그 작품이 우리의 일상과 거의 차이가 없어야 한다 생각하는데, <해피 아워>는 인물, 상황, 배경 등 거의 모든 부분에서 필자의 그런 기준에 상당히 부합한 작품이었다. 특히 하마구치 류스케는 주인공들을 유명 배우가 아닌, 실제 고베 지역의 시민들 중에서 캐스팅해 말 그대로 '현실을 스크린에 끌어오는' 파격적인 방법으로 영화를 매우 자연스럽게 만들었고, 이는 분명 이 영화를 성공적인 작품으로 만드는 결정적인 요소 중 하나로 작용했다(주인공은 물론, 대부분의 조연들이 어색함 없는 자연스러운 연기를 보여주었기에 필자는 이들이 일반인일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대체 얼마나 이 작품을 현실에 가깝게 만들고 싶었는진 모르지만, 이런 하마구치 류스케의 자연스러움에 대한 집착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어느 정도'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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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다! 그 자연스러움이 끝까지 유지되었더라면...
필자가 앞서 굳이 '어느 정도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영화의 러닝 타임이 몹시 긴 관계로 중간에 10분의 쉬는 시간이 있는데, 이를 분기점으로 흐름이 급변하며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인 현실적인 느낌이 옅어지고 굉장히 '극적인 변화'를 맞기 때문이다(물론 안 좋은 의미로 말이다). 지금부터는 인터미션을 기점으로 나뉘는 전반부와 후반부를 각각 설명하며 어떤 부분에서 이 영화가 아쉬워졌는지 말씀드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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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제목 그대로의, '해피 아워'
'힐링 드라마'를 기대하고 영화관을 찾은 관객 분들께 1부는 제목 그대로의 행복한 시간을 선사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네 명의 친구들이 함께 여행을 가고, 웃고 떠들며 지내는, 흔히 보는 평화로운 일상들이 잔잔하면서도 즐겁게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후미(미하라 마이코)가 진행하는 프로젝트 워크숍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그들이 가지고 있던 문제(돌싱인 아카리를 제외하고 그들 모두가 남편과 크고 작은 문제가 있다)가 조금씩 고개를 들기 시작하지만, 1부 전체적으로 흐르는 편안하고 잔잔한 흐름이 더 강한 탓에 관객들은 아마도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크게 인식하기 어려웠을 것이라 생각하며, 이 흐름만 그대로 이어간다면 '조금 길기는 하지만 잔잔한 재미가 있는 힐링 드라마'로서 어느 정도 완성에 가까운 성과를 달성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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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 행복 끝, 불행 시작
하지만 10분 간의 짧은 인터미션이 끝난 뒤 영화는 손바닥 뒤집듯 분위기를 바꾸어 버리고, 이는 이 영화에 분명한 악수로 작용했다. 준(카와무라 리라)이 남편과의 이혼소송에서 패소한 채 홀연히 친구들의 곁을 떠나는 것을 시작으로 그들 모두의 가정사가 일제히 불거지기 시작하며 1부의 긍정적인 분위기가 아예 자취를 감춰버리고 마는데, 문제는 이런 것들이 전반부에 비하면 강도가 너무나도 격해 그 차이가 상당히 심할뿐더러, 너무 동시다발적으로 주인공들을 덮치기 때문에 이야기가 다소 극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하고,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었던 '현실적인 느낌'을 싹둑! 잘라내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도 불행한 일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가 많기에 이 또한 현실적이라는 의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도미노처럼 모든 주인공들에게 불행이 찾아드는 이런 상황은 분명 1부에서 하마구치 류스케가 추구하고자 했던 '자연스러움'의 가치에 반하는 데다가, 이런 과정을 통해 그가 관객들에게 던졌던 '관계의 파괴' 메시지 역시 많은 이들이 공감하기도 어렵고, 모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기에도 충분치 않았다 느껴지는 만큼 <해피 아워>는 전반부의 즐거움에 비해 후반부의 아쉬움이 훨씬 더 큰, 그런 작품이 되어버리지 않았나 생각한다.
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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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에 지나지 않았던 '해피 아워'가 아쉬울 뿐
제목과는 달리 아이러니하게도 모두가 행복을 잃어버린 채 마무리된 영화, <해피 아워>였다. 분명 초반부의 자연스러움을 그대로 이어나갔더라면 더 좋은 작품이 되었을 것 같은데, 그 흐름을 제 발로 차 버리며 결국 '절반의 성공'에 그치고 말았던, 그래서 더더욱 아쉬웠던 작품이었다. 돌아보면 이 영화의 가장 큰 문제점은 길이가 아닌, 전반부와 후반부가 너무 다른 성격을 띤다는 점이 아니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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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언젠가 '가정의 존재가치'를 대변하는 작품도 만들 수 있게 되길
하마구치 류스케가 왜 이렇게까지 부부 관계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작품을 만들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가 언젠가 이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으로 조명하는 작품도 만들 수 있게 되기를 바라본다. 후속작이 필요하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런 작품을 만드는 과정 속에서 그가 보다 다양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감독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고, 그를 통해 관객들 역시 인간관계의 음과 양을 모두 바라볼 수 있는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영화에 자신만의 색깔을 담아낼 줄 아는 미래가 창창한 감독이니만큼, 우려보다는 기대를 앞세워 그가 과연 후속작들에서 어떤 발전을 이루어낼지를 기다려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