序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많은 영화 마니아 분들처럼, 필자 역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로 웨스 앤더슨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특유의 파스텔톤 가득한 색감, 정사각과 세로 화면을 고집하는 뚝심, 그리고 어딘지 구름 위에 떠있는 듯 독특한 스토리까지! 당시 기대 이상의 재미를 선보인 영화와 더불어 웨스 앤더슨의 독특한 스타일은 필자의 뇌리에 강한 인상으로 남아있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그의 신작, <프렌치 디스패치>는 그런 그의 매력이 고스란히 담긴, 아니 어쩌면 더욱 강렬해진 작품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프렌치 디스패치>와 그 기저에 자리 잡은 웨스 앤더슨의 작품 세계의 매력, 그리고 한계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그의 이전 작품인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과의 비교를 통해서 말이다.
本
Good Point #1. 매력적인 파스텔톤 색감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웨스 앤더슨의 영화가 매력적인 첫 번째 이유는 진하지만 부드러운, 매력적이고 레트로한 파스텔톤 색감과 질감에 있다. 이는 웨스 앤더슨의 독특한 스토리와 어우러져 다른 영화에서 찾기 어려운 따스하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해주는 일등공신이자, 관객에게 특별한 체험을 가능케 만들어 주는 요소이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심심찮게 활용된 '흑백 톤'인데, 여기에서 필자는 문득 웨스 앤더슨이 과거의 영화, 혹은 과거의 특정 시점 그 자체에 대한 향수를 기반으로 영화를 구성하는 감독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리고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그의 '필살기' 중 하나인 이런 파스텔톤의 색감도 어쩌면 이러한 영향 아래에 있는 것일지도?
Good Point #2. 익살스럽고 아기자기한 스토리 텔링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본디 익살스러우면서도 아기자기한, 웨스 앤더슨의 '가벼운 스토리 텔링' 방식은 과거 다소 헤비할 수 있는 주제인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굉장히 가볍고, 또 유쾌한 작품으로 만든 바 있다. 결국 파스텔 톤의 화사하면서도 따뜻한 색감에 너무나도 잘 어우러지는, 신선하면서도 무겁지 않은 매력적인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에야 말로 웨스 앤더슨이 대중의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번 <프렌치 디스패치> 역시 마찬가지이다. 굉장히 익살스럽지만, 장난치는 느낌은 아니었다. 영화 속의 사건들과 인물들, 심지어 배우들 모두가 상당히 희화화되어 관객들 입장에서는 진지해질 여지가 크게 없긴 하지만, '영화라는 매체가 최소한으로 유지해야 할 진지함'을 잃지는 않으면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특히 배우들마저도 본인이 이 영화 이전에 가지고 있었을 그들 스스로의 아이덴티티를 벗어던지고 엄연히 극의 일부로서, 즉 웨스 앤더슨의 장기말 중 하나로서 스스로를 한정 짓고 기능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이 작품의 또 하나의 재미라고도 할 수 있겠다(그런 것이 가능하기에 그들에게 '명배우' 타이틀이 붙은 것 일터).
Good Point #3. 정사각 & 세로 화면 특유의 매력
이 영화의 오프닝. 맨 위의 'THE FRENCH DISPATCH'는 1) 건물의 이름이자, 2)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로 두 가지의 기능을 한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다른 무엇보다 웨스 앤더슨을 영화계의 이단아로 만드는 가장 큰 요소는 아마도 그 특유의 화면이 아닐까. 영화계에 불어닥친 아이맥스 열풍에도 아랑곳 않고 정사각 혹은 세로 화면을 고집하는, 일종의 강박처럼 느껴지는 웨스 앤더슨의 화면 구성은 이 영화판에서 유일무이한 것이라 봐도 좋을 듯하다(적어도 메이저 영화들 중에서는 말이다).
이번 <프렌치 디스패치>에서는 심지어 그런 면이 한층 더 강해졌다. 그리 많진 않지만, 웨스 앤더슨은 마치 "세로 화면의 끝을 보여주겠다!" 선언한 듯 세로 화면에서 그 효과가 배가 되는 장면들을 몇몇 선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이번 작품을 통해 더 많은 관객들이 '아~ 왜 이 양반이 세로 화면을 고집하는지 알 것도 같네!'라고 느끼지 않았을까. 때문에 앞으로 그가 단순히 화면을 세로로 두는 것 이상의 어떤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그의 영화에 기대해볼 만한 포인트가 또 하나 늘어난 것 같기도 하다.
Good Point #4. 화려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출연진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웨스 앤더슨의 스타일 못잖게 이 영화의 출연진은 화려하기 그지없지만, 그럼에도 언급을 뒤로 미룬 이유는 이 영화가 단순히 출연진의 이름값에 기댄 작품은 아니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누굴 먼저 언급해야 할지 고민스러울 정도로 호화로운 명배우들이 저마다의 매력을 발산하고 있지만, 놀랍게도 딱 저마다의 역할을 하고 있을 뿐, 그 누구도 앞으로 나서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이 영화의 주인공은 웨스 앤더슨, 즉 스토리, 색감, 스타일, 그 모든 것이 어우러진 그의 작품세계이기 때문이다.
Bad Point. 옴니버스 식 구성이 불러온 부작용들
이제는 아쉬운 점을 이야기해보자. 필자는 <프렌치 디스패치>가 이전 작인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비해서 다소 아쉽다는 평을 듣는 이유들이 오로지 이 영화의 '옴니버스식 구성이 가지는 한계'에서 비롯된다 생각한다. 물론 더 깊게 파고들면 이외의 단점이 더 드러날지도 모르지만, 이번에는 이 점에 집중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역시 이번 작품과 마찬가지로 많은 등장인물들이 등장하고(재미있게도 이중 많은 이들이 '웨스 앤더슨 사단'으로서 <프렌치 디스패치>에 또다시 얼굴을 비춘다), 저마다의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는 구성이기는 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관객들은 어디까지나 그 안에서 이야기들을 한정하고, 조합해서 바라볼 수 있었다. 한 마디로 이야기에 잘, 또 쉽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 <프렌치 디스패치>의 여섯 가지(혹은 다섯 가지)의 에피소드는 제 아무리 '프렌치 디스패치'라는 매거진의 일부라는 공통점이 있다 한들, 결국 아예 별개의 이야기인 만큼 각 에피소드에 모두 동일한 집중력을 발휘하며 끝까지 영화를 온전히 감상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는 데에서 큰 한계를 갖는다. 웬만하면 영화를 보면서 졸지 않는 편인 필자가 마지막 에피소드 도입부 이후 결국 기절하고 말았다는 점을 생각해봤을 때, <프렌치 디스패치>는 '보기 쉽고 편한 작품'은 결코 아니었다(참고로 필자는 과거 굉장히 피곤한 상태로 <타샤 튜더>를 보고 깊은 숙면을 취한 것을 제외하고는 딱히 존 적이 없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또 각 에피소드들 모두 기승전결이 존재하는 만큼 긴장감이 자주 오르락내리락하고, 한 에피소드에서 다른 에피소드로 넘어가면서 이야기의 흐름이 빨라졌다 느려졌다 하는 진폭이 존재하기에 결국 관객에게 지루함을 불러일으킨다는 점 역시 이 영화의 명백한 한계. 결국 영화를 전체적으로 가볍게 만든다는 점에서는 옴니버스 식 스토리 구성이 꽤나 웨스 앤더슨의 스토리 구성 방식에 부합했지만, 그 하나의 장점을 보고 사용하기에는 단점들이 너무나 치명적이었던 것 아닐지.
(분명 아예 재미없는 영화는 아니었기에 이는 그저 옴니버스 식 영화가 필연적으로 갖는 한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영화 마니아들에게 있어서는 다른 옴니버스 형식 영화들을 좀 더 보면서 이게 이 영화만의 단점은 아니었을지 한 번 진득하게 판단해 볼 기회가 되어주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終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이제는 '새로운 장르' 그 자체가 되어버린 그의 다음 행보를 기대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늘어놓긴 했지만, <프렌치 디스패치>는 분명 과거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그랬듯 '영화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별한 체험'의 영역에 어느 정도 걸쳐 있던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그저 위의 포스터에서 말하는 것처럼 '가장 웨스 앤더슨 다운 영화'이기는 했으나, 대중성을 고려하기보다는 너무 웨스 앤더슨 답고자 노력하다가 선을 좀 넘어버렸다는 점이 아쉬울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스 앤더슨은 이미 새로운 장르를 개척해냈다는 점에서 현재보다 미래가 촉망받는 감독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프렌치 디스패치>는 그저 그의 수많은 습작들 중 하나였다 생각하며, 앞으로 이러한 '웨스 앤더슨 스타일'의 진화가 과연 어디까지 이어질 것인지, 또 그가 그에서 벗어나기 시작할 때 과연 어떤 작품이 만들어질지에 대한 기대를 앞세워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