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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지 Mar 06. 2023

[가시나킥] #7 백넘버는 숫자일뿐

설렘과 두려움

#7


시합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날짜는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실감은 나지 않았다. 우리의 실력이 코앞의 공하나 제대로 어쩌지도 못하는 상태 그대로였기 때문이리라.


물론 신입생들은 기본기 훈련을 초등학교부터 해왔기에 별 어려움없이 훈련을 하고 있었지만, 나를 포함한 몇몇은 2명이서 짝을 이뤄서 하는 기본기 훈련에 인사이드로 공을 제대로 맞춰서 상대방에게 잘 보내는 것. 혹은 4:2를 할 때에 끝까지 술래로 남아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여기는 것이 고작이었다.


전쌤이 이끄는대로 코앞의 것들을 하나씩 해나가는 것에 의미가 있던 우리들의 시간이 하루하루 쌓이고 있었다.



“여어~! 훈련들은 할 만 하니?”



훈련을 개시하고 나서 거의 얼굴을 볼 수 없었던 김시국 체육선생님이 오랜만에 운동장을 찾았다. 우리는 막 오후 훈련을 끝내고 마무리 스트레칭을 하고있던 참이었다. 김시국선생님은 구령대에서 내려오며 전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코치선생님~! 끝나고 잠깐 모이시죠~!”



전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무리 스트레칭을 마친 우리들은 전쌤의 뒤를 따라 종종 거리며 학교 1층으로 들어갔다. 몇주 전 처음으로 얼굴을 맞댄 교무실 안쪽 상담실에 옹기종기 앉은 우리들은 한 쪽벽에 지잉-소리를 내며 좌우로 돌아가는 선풍기 모양의 난로에 꽁꽁 언 양쪽 볼을 녹이며 선생님들의 말을 기다렸다.



“그래. 다들 몇주간 훈련은 열심히 하고 있었지?”



김시국선생님의 예의 명랑하고 밝은 질문. 신입생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며 침묵을 지키는사이, 내 뒤에 앉은 나연이가 먼저 불쑥 대답을 한다.



“네! 저는 아직 잘 못하긴 하는데, 엄청 재밌어요!”



나는 소리가 나는 뒤쪽으로 고개를 돌려서 나연이의 얼굴을 바라보려다 입을 막았다. 나는 입을 막았지만 옆에 앉은 선규는 그대로 코로 소리를 뱉었다. 큽!



나연이의 동그란 은테 안경에 뽀얗게 김이 서려서 마치 하얀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동그란 하얀 선글라스를 끼고 양쪽 볼이 빨갛게 타오르는 나연이는 (어디에 시선을 둔건지 모르겠지만) 방긋방긋 웃으며 대답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필 나연이 옆에 앉은 민국이가 낀 네모난 안경에도 하얗게 김이 서려 있었기에, 하얀 선글라스 듀오가 나란히 보이지 않는 앞을 바라보고 있는것이 아닌가.


크큽, 선규의 웃음기 가득한 코 먹는 소리에 다른 아이들 모두 나연이와 민국이를 바라보고 하나 둘씩 웃음을 터뜨렸다.


“나연이 뭐.. 뭐가 보이긴 하니?”


---


김시국선생님이 찾아온 것은 주문제작한 유니폼과 단체복을 나눠주기 위함이었다.

나는 얼마전 전쌤이 훈련 전에 우리를 불러 앉혀놓고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비가 온 뒤 질어진 운동장에서 가볍게 워밍업을 한 뒤에 스탠드로 우리를 불러모은 전쌤은 백넘버에 대해 이야기 했다.

“유니폼 제작을 해야 하니까 백넘버를 슬슬 정해야 할거 같은데…”

전쌤은 말끝을 흐리며 우리를 바라봤다. 지그시 11명을 둘러보는 눈.
뭐지?

“쌤! 그럼 저는 1번이요!”

선규가 먼저 소리쳤다. 신입생들이 선규를 바라보다 풋.하고 웃었다. 그리고 민정이가 느긋느긋한 목소리로 선규 뒤에서 말했다.

“언니, 1번은 골키퍼 번호에요.”

“엥? 그딴게 어딨어. 난 1번이 좋은데?”


선규는 뿔이나서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래 니 다해라. 절레절레. 나는 고개를 저으며 전쌤을 바라봤다. 전쌤은 생각이 많은 얼굴로 평소에 메모를 하던 수첩을 뒤적이고 있었다.

“음.. 백넘버는 일단 포메이션 좀 생각하고 정할까 했었는데, 시간이 너무 없긴하네..”

뭔소리지 포메이션? 처음 듣는 단어.

“정해진 번호가 있어요?”

나연이가 묻자, 전쌤이 새삼스럽다는 듯이 대답했다.

“1번은 보통 골키퍼 번호로 쓰고, 예전에는 2번부터 5번까지가 수비, 6번부터 8번이 미드필더, 9번부터 11번까지가 공격. 이렇게 쓰긴 했지. 뭐 요즘에 번호를 무조건 몇번 해야 되는 법칙 같은건 없긴한데.”

“에이. 그럼 아무거나 해도 되는거네요! 저 1번 할래요!”
역시 선규. 우긴다.

“아니, 시키야. 그래도 골키퍼는 1번으로 해야 돼. 그건 규칙으로 되어있는게 맞고. 월드컵도 그게 룰이야 임마.”

“그럼 100번 해도 돼요?”
이것 역시 선규의 말.

“…1번부터 23번까지… 그 사이로 골라라 제발..”
이마를 짚는 전쌤의 한숨소리.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1-23번까지 엔트리에 맞춘 번호를 부여 하는 것이 FIFA의 규정이고, 전쌤의 말대로 1번은 주전 골키퍼의 지정번호였다.

그리고 FIFA 규정이 아니더라도 1번부터 11번까지는 팀내에 선발출전 선수들에게 주어지는 번호들인데, 이중에서도 7번은 팀의 스타 플레이어. 예를 들어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나, 그 당시 날라다니던 데이비드 베컴 같은 스타 선수들이 달던 번호이며, 9번은 팀에서 최전방 공격을 담당하여 득점을 따내는 역할인 경우가 많고, 특히 10번은 그 팀의 에이스. 최고의 선수들이 맡는 번호로 알려져 있었다.

10번의 대표적인 선수로는 전설적인 축구선수 펠레나 마라도나가 있으며, 최근으로 치면 2023년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를 우승으로 이끌었던 리오넬 메시 같은 선수 역시 프리미어리그나 국가대표팀에서 백넘버 10번으로서 유명한 선수였다.


“음.. 너네 신입생들 초등학교에서 쓰던 백넘버는 있었냐?"


“쌤, 애들 원래 번호랑 포지션도 각자 있었긴한데, 중학교 올라와서 다 바뀔 수도 있다고 해서 말씀 안드렸었어요.”

대표로 나선 유빈이의 말에 주리가 짧은 마디의 손가락을 번쩍 들어올렸다.

“저 원래 7번! 선생님! 저 행운의 7번!”

주리의 외침으로 7번이 선점 되었다. 전쌤은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아,아니.. 그 원래 7번은 스타 선수가…”

다들 전쌤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저마다 본인의 번호를 이야기 하느라 재잘거렸고, 나와 동갑내기들도 무슨 번호를 가져야 근사해보일지 고민에 빠졌다.

“우씨, 2,3,4는 뭔가 쫄따구 같아서 싫은데..”
이건 선규의 말.

“나도 7번이 좋은데…”
이건 나연이의 소곤거림.

“….”
승아는 눈만 데굴데굴.

나는 나대로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내 생일이 28일이었기에, 28번을 하고 싶었는데, 1-23번 사이에 정해야 한다면 18번을 해야 하나? 십팔… 너무 욕 같은데? 그럼… 8번?

“응. 일단 번호는 웬만하면 그대로 쓸까? 언니들 생각은 어때?”

전쌤이 나를 포함한 동갑내기 4명에게 먼저 의향을 물었다.

그렇게 2,3,4가 쫄다구 같아서 싫다던 선규는 5번.

7번을 하고 싶다던 나연이는 주리에게 선점 된 7번을 피해 1과 6을 더해서 16번.

신입생들이 초등학생 당시 8번을 했던 애가 다른 중학교 체육 특기생으로 진학하기 위해 축구부를 그만둔 덕분에 나는 고민했던 8번을 선택할 수 있었다.

나와 동갑내기들이 무리없이 백넘버를 가져가는 가운데, 승아가 구부정한 어깨로 스윽- 손을 들어올렸다.

“선생님, 저 10번 하고 싶은데요.”

“…오. 문승아. 10번을 하고 싶다고..?”

전쌤이 눈을 가늘게 뜨며 승아를 바라보았다. 승아는 살짝 주변 눈치를 살폈다.

“왜 10번이야? 너 열번째로 못하냐?”

선규는 지가 말해놓고 킥킥거리며 웃었다.

“쌤, 근데 원래 10번은 유빈이가 했었는데요…”

이 때 볼멘 목소리로 말을 꺼낸건 아리였다. 아리는 부루퉁한 얼굴로 유빈이와 승아. 전쌤을 번갈아 바라봤다.

유빈이는 별 관심이 없다는 듯, 무심하게 흘러내려온 앞머리에 실핀을 고쳐 꼽았다. 승아는 구부정한 포즈로 눈만 힐끗 아리와 유빈이를 바라봤다.

오.. 뭐지. 작은 긴장감. 전쌤도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승아와 유빈이를 번갈아 바라봤다.

유빈이는 이제 14살이라고 믿기지 않는 170센치의 키에 기본기역시 좋았다. 가늘게 정리한 깻잎머리도 그저 장식이 아니었다. 소위 인싸 특유의 주변 아이들을 향한 카리스마가 있었고,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피지컬과 실력으로 인해 유빈이는 늘 신입생들의 중심축이었다. 이 때문에 초등학교 시절에도 주장을 맡아온 것이다.

많은 것을 가진 아이들이 으레 그렇듯, 유빈이 평소 성격을 생각하면 선심쓰듯 ‘언니가 10번 하세요’라고 할만도 한데, 유빈이는 말 없이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앞머리만 재차 정리했다. 오히려 아리가 대신하여 승아를 째려보듯 바라보고 있다. 승아는 유빈이와 아리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전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럼 유빈이가 10번하고 저는 17번 할게요.”

전쌤은 피식 웃으며 수첩에 메모를 하며 읖조렸다.

“그래. 문승아 17번. 니가 10번도 하고 7번도 해라 새키야.”

전쌤은 이어서 신입생들이 말해주는 번호를 수첩에 적어나갔다.

까만콩 예솔이는 6번. 행운의 7번을 좋아하는 윤주리. 민국이 역시 초등학교 때 쓰던 번호 그대로 9번. 유빈이 짝궁 아리는 유빈이의 10번을 따라 20번.

마지막으로 번호를 대답하지 않은 한 사람은 가애.

“김가애. 대답을 안해. 너 몇번이야?”

“아.. 저 원래 19번이었는데요..”


어깨가 떡벌어진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우물거리는 가애의 목소리는 작아서 거의 들리지가 않았다. 바로 옆에 예솔이가 가애를 쳐다보다 야물딱지게 대신 말한다.


“가애 원래 19번이었는데, 다른 번호 하고 싶대요!”


“그래, 몇번 하고 싶은데?”


선생님이 되묻자, 가애가 입술을 다물고 심각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말하기가 많이 힘든가? 가애가 찌푸린 표정으로 한참을 가만히 있는데 예솔이가 그런 가애를 보다가 한숨을 쉰다.


“김가애 또 고민하는척 한다. 생각 안해놨으면서.”


“…응.”


으휴~ 쬐그만 예솔이가 듬직한 가애의 옆구리를 쿡 찌른다.


“쌤! 가애 몇번 할 지 생각 안했어요. 선생님이 정해주세요!”


예솔이의 말에 전쌤이 가애를 보고 수첩을 뒤적이고서 고개를 끄덕인다.



“오케이. 그럼 김가애~ 11번.”



-



백넘버 정하기가 끝나고, 우리의 휴식시간도 끝이났다. 4:2를 하기 위해 다들 앉아있던 스탠드에서 일어나 운동장으로 가려는데, 나연이가 느즈막히 아이들 뒤를 따르다 전쌤에게 돌아와서 물었다.


“쌤, 가애는 왜 11번으로 하라고 하셨어요?”


안경을 빛내는 나연이의 질문. 전쌤은 수첩에 필기를 끝내고 패딩조끼 주머니에 수첩을 밀어넣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가장 빠르니까.”


“네?”


“그런게 있어 임마. 얼른 가서 준비해. 오늘 아이스크림 사러가기 싫으면.”


아이스크림 소리에 나연이는 혹시라도 첫번째 술래가 될까봐 앞머리를 휘날리며 부리나케 뒤로돌아 뛰었다.



----



“다음 정이지. 오우~ 이지가 8번이야?”


김시국선생님의 목소리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상담실에서 유니폼과 단체복을 하나씩 나눠주고 있었고, 이제 내 차례였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김시국 선생님이 건네주는 투명 비닐에 들어가 있는 유니폼과 단체복을 받아들었다.


등번호가 보이도록 접혀있는 유니폼에는 8번이라는 숫자가 보였고, 앞쪽으로는 ‘안양부흥중’이라는 글씨가 보였다. 나보다 먼저 유니폼을 받은 모두 그자리에서 바로 비닐을 뜯어 내용물을 펼쳐보는 것을 보고 나도 들뜬 기분으로 비닐을 뜯었다.


하얀색 긴팔 유니폼에 남색 팬츠. 백넘버와 글씨는 남색으로 배색되어 있었다. 단체복은 검은색바지에 허벅지 옆으로 하얀색으로 무늬가 있었다. 자세히 보면 남녀가 등을 맞대고 앉아있는 형태였는데, kappa라는 브랜드 로고라고 했다. 유니폼에도 역시 같은 무늬가 있었고, 둘 다 같은 브랜드에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우와! 여기 이름있어!”


선규가 단체복 바지를 움켜잡고 내 눈앞으로 들이밀었다. 선규 손에 들려있는 바지의 앞주머니 입구에 흰색으로 선명하게 붓글씨처럼 수놓아진 ‘민선규’라는 글씨가 보였다.


나도 내 단체복의 주머를 확인했다. 왼쪽? 아니다. 오른쪽. 오른쪽 앞주머니 입구를 따라 대각선으로 ‘정이지’라는 글씨가 보였다. 선규의 이야기에 다들 단체복을 확인하고 있는데..


“후엥.. 나 왜 윤주니야..”


주리가 울상으로 마디가 짧은 손가락으로 단체복을 흔들었다. 주리의 이름이 잘못 수놓아진 모양이다. 김시국선생님은 주리에게 다가가 단체복을 확인하더니 잠깐 당황했다가,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주니?”


“아니 주니가 아니라 주리라니까요!”


“아냐아냐. 주니가 잘어울려 괜찮아. 괜찮아.”


“으아니. 주리라니까요!”


“그래그래. 주니주니. 주니도 괜찮아.”


뭐가 괜찮은건지 잘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 긍정대마왕 김시국선생님에게 주리의 울먹임은 별로 통하지 않을거 같았다.


주리 빼고 모두 만족스럽게 본인의 이름을 확인한 아이들은 주리의 바지를 확인하고 킥킥 웃어제꼈다. 나는 아마 앞으로 주리는 농담처럼 주니로 불리게 되겠다-하고 생각했다.


----

노을이 시작 된 학교 운동장에서 상담실 창문으로 길게 해가 비어져 들어왔다. 손에 들린 유니폼에도 햇살이 드리워졌다. 남색으로 새겨진 8번과 흰색 바탕의 유니폼이 대조적으로 햇빛에 반짝였다. 아이들이 조잘거리며 새 유니폼과 단체복을 입어보는 장면도 역광을 받아 느리게 반짝였다.


빛에 따라 다르게 광이나는 원단으로 만들어진 유니폼의 미끌거리고 서늘한 감촉을 손으로 느끼자, 그제야 바로 앞으로 다가운 시합이 체감되는 듯했다. 유니폼의 질감을 느끼듯이 실체가 있는 무게감이 피부로 전달되었다.


정말로 축구를 해야 하는 거구나. 축구부가 되었구나. 이제 곧 이걸 입고 나는 시합에 나가는구나.


묘한 두근거림이 일었다. 이건 무서운걸까? 비슷한 감각을 느낀적이 있었나? 태권도 시합을 처음 나갈 때의 긴장감과 비슷한걸까?


나는 유니폼을 손에 꼭 쥐어보았다. 그리고 똑같이 유니폼을 손에 꼭 쥐고 있던 나연이와 눈이 마주쳤다.


나연이가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엄청 설렌다. 그치?”


그렇지. 설렘.

나연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도. 설렌다.”


그때,

11명의 아이들의 양 볼에 추운것과는 관계없이 홍조가 떠있었다.


곧 우리의 첫시합이 있다.

우리의 이름이 새겨진 옷을 입고,

이날 우리는 모두 함께 설레였다.



#7번째챕터끝

#드디어유니폼이생겼다

#주니야미안 #아니주리였지

#10번신경전오졌다잉

#그나저나곧첫시합실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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