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 28
20대의 조미지가 살아간 기록.
불안과 희망이 한데 뭉친,
잔인하고 아름다운 시절의 편린.
드라마 청담동 앨리스가 끝이났다.
처음 드라마 제목과 기사 속의 간단한 내용정리만 보고는 이 드라마가 어떠한 판타지로 시청자를 마약처럼 나쁜 환각에 몰아갈까 걱정을 했다. 그런 우려와는 반대로 1,2회에서 보여주었던 뼈저린 현실에 관한 공감대 형성은, 이 드라마가 '청담동'이라는 판타지를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시청자를 현혹시키리라는 예상을 뒤엎었다. 이러한 진행이 새롭고 반가운 마음에 마지막회까지 꼬박꼬박 챙겨보게 되었지만, 이 드라마.. 마냥 즐겁게 시청하기는 힘이 드는 드라마였다.
드라마는 교묘했다. 중간중간- 이 놈의 작가는 대체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가려고 이러는건가.. 앞으로 펼쳐질 내용이 상상이 가질 않아 답답한 심정이 가득했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 녹여내려는 메세지의 서늘함. '앨리스'라는 동화를 끌어다 사용한 이 드라마는, 무척이나 교묘하고 교활했다.
작가는 보통 신데렐라 이야기에서 보여주었던 '통속'과는 색깔이 다른 '통속'을 드라마 한 회마다 듬뿍 묻혀 칠했다. 마치 동화 속의 신데렐라가 사실은 유리구두를 일부러 벗어놓고 달아난 것이고, 왕자는 떡밥을 물은 고기일 뿐이라 하는 '우리끼리의 가설'처럼, 청담동 앨리스는 같은 플롯을 가지고 다른 의미를 시사했다. 알듯 말듯, 긴가민가- 하는사이, 드라마는 마지막회에 가서 이를 전면에 드러내놓고 반은 달고 반은 쓰디쓴 '우리끼리의 가설'을 공식화 해버린다. '눈을 반만 감고 꿈을 꾼다.'라는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엔딩이 절묘하게 맞물려서 기가막힌 결말이 된 셈이다.
마지막회까지 끝이 나고,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청담동 앨리스' 라는 드라마 제목은 더할나위 없이 걸맞는 제목이었다. 청담동과 앨리스라는 두 단어로 예상되었던 '통속'의 드라마는 없었다. TV에서는 대개 신데렐라와 캔디가 당연하다는 듯이 행복을 가져갔지만, 사실 우리들은 모두 알고 있다. 그런 판타지는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우리끼리의 '가설'을 만들고 씁쓸해 했지만, 사실 '가설'에 가까운 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다행히도 이 모든 가설들은 다들 속으로만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애써 괜찮은 척 살아갈 수 있다는 것도.
'가설'을 공식화 해버린 이 드라마의 뒷 맛은 어떠한가.
난 참 서늘하다. 서늘하고 쓰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어차피 반은 눈감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아니까.
세상이 빛으로만 이뤄지지 않은 것도 아니까.
여기서 위로가 되는 것은, 스스로 아무리 노력하고 열심히 살아도 안 될 때에 세상에 '분노'해야 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 역시, 잔인했던 이 드라마가 함께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분노가 먹히든 안 먹히든, 진정으로 화를 내야 할 때도 있다고 말해주는 것은 억지 감동의 뻔한 위로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었다.
드라마는 항상 시대를 반영해 왔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많은 드라마들이 '캔디'로 사는 것이 정답은 아니라고 역설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제 드라마의 주인공이 '캔디'가 아닌 '캔디 연기하기'를 공식화한 이 시점에서, 문근영처럼 '이제 나는 꿈을 꾸지 않는다.'며 인정하기엔 아직 난 세상이 좀.. 버겁다. 그렇기에- '청담동 앨리스'는 끝이 났지만, 내게 꿈이라는 방패는 당분간 유효할 것 같다.
어느 날, 정말 힘겨운 순간이 오면 세상에 화도 내고 좌절도 맛보겠지.
그래도 괜찮다. 괜찮다고 속삭인다.
그 때가 되면 다른 이야기들이 나를 일으켜 줄꺼라 믿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