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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필 Aug 03. 2022

#11 종로에서 시인과 함께 2

내가 좋아하는 것(3) 종로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추운 한옥. 각종 벌레와 쥐가 무전취식하는 한옥. 화장실 한 번 가려면 큰 마음을 먹어야 하는 한옥.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한옥의 모습이었다.



 나의 친가와 외가는 모두 한옥집이었다. 한옥에 살아보고 싶다는 나의 말에 사촌은 질색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하긴, 밤마다 쥐들끼리 경주하는 소리를 듣다 보면 한옥 살이가 싫을 법도 하겠다. 결정적으로 한옥엔 사생활이 없었다. 마루 밟는 소리, 대문 여닫는 소리. 모든 것이 생중계되는 한옥은 한창 섬세한 나이의 아이들이 자라기엔 참 불편한 곳이었다.






 지금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이곳은 서촌의 한 한옥집.

 휴가를 결정하고 숙소를 잡자니 갈만한 호텔은 이미 만실이었다. 아뿔싸. 방심했다. 미루고 미루다 쓸만한 방을 뺏긴 세입자의 심정이 이런 걸까. 포기하고 집에서 쉴까 하다 우연히 한 한옥집을 알게 됐다.







서촌 '북어 나잇, 시인의 집'.



 '북어 나잇, 시인의 집' 은 <사슴>을 시작(詩作)한 '노천명' 시인의 집 터 위에 지어진 것이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 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곤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질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사슴>, 노천명




 분명 그녀의 친일 행위는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문학을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문학인이 생전 살았던 곳을 방문해 그의 숨결을 느껴보고 그곳에서 나의 글을 써보고 싶었다.





 북어 나잇, 시인의 집(이하 시인의 집, @bookanight_sechon)은 1인 여성 여행자를 위한 곳이다. (이곳에 살았던 노천명 시인도 여자였으니 이러한 운영방침은 '시인의 집' 콘셉트에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한옥의 구조를 갖고 있지만 마당만 공유할 뿐, 3개의 방엔 각각 번호키가 있어 사생활도 보호된다. 또한 방마다 편백나무 욕실이 딸려 있어 여행 중 쌓인 피로를 욕조 안에서 풀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시인의 집이 좋았던 것은 그동안 하지 못했던 글쓰기 작업을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읽고 싶지만 어쩐지 집에선 집이 잘 되지 않던 책까지도 시인의 집의 고요함 덕분에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었던 순간순간이 좋았던 것 같다.





 






 여행 첫날.

 

 경복궁역에 도착했을 땐 살짝 짜증이 나있는 상태였다.

 지난주 온화한(?) 여름 날씨는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덥고 후덥지근한 K-여름 날씨가 본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종로의 체감 온도는 34도에 육박하고 있었고, 숙소와 가까웠던 1, 2번 출구 모두 에스컬레이터가 없었다. 그렇게 무겁지 않은 캐리어도 날씨 탓인지 버려두고 가고 싶었다. 캐리어를 들어주며 돈을 요구하는 유럽의 집시들이 그리워질(?) 정도니 당시의 날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돌아가는 날 3-1번 출구에 있는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해 비교적 쉽게 역사 안으로 들어갔지만 이마저도 중간에 계단이 있어 캐리어를 끌고 내려가기가 쉽지 않았다. 경복궁 역 자체가 지어진 지 오래된 역이다 보니 에스컬레이터보다 계단 출구가 더 많은 것 같았다. 아마 좀 더 찾아보면 엘리베이터를 찾을 수 있었겠지만 숙소와의 거리를 생각하면 3-1번 출구를 이용한 것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평일 오후였지만 경복궁 역 인근은 이미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원래 유동인구가 많은 지역이기도 하지만 청와대 개방으로 인한 관광객 유입도 적지 않은 것 같았다. 인파를 피해 가는 캐리어 바퀴가 요란한 소리를 냈다.

 시인의 집은 역에서 8분 거리였다. 덥고 습한 기운에 인상이 잔뜩 찌푸려졌다. 한 손에는 캐리어. 한 손에는 핸드폰. 양산을 펼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내 손은 2개밖에 없었다.



 서촌은 예상대로 골목과 골목이 이어져있는 대혼돈의 멀티버스였다. 그럼에도 길을 헤매지 않았던 것은 숙소 앞에 '라파엘의 집'이라는 커다란 간판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라파엘의 집' 맞은편에 내 목적지인 '이화 한옥'이 보였다.


 


 시인의 집엔 별도의 체크인 리셉션이 존재하지 않는다. 안내 문자에 따라 숙소 대문을 열고 별도로 표시해 놓은 내게 배정된 방을 찾아 들어가면 그것으로 끝. 이러한 체크인 방식 덕분에 숙소에 들어선 순간부터 내 집 같은 편안함이 느껴졌다.  짐을 간단하게 풀어놓고 다음 일정을 위해 서둘러 숙소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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