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것(3) 종로
90년대를 대표하는 몇 가지 단어가 있다.
가수는 쿨, 디바, 듀스, DJ DOC, 엄정화, 박지윤, 이정현, H.O.T.
만화는 아기공룡 둘리, 달려라 하니, 날아라 슈퍼보드, 두치와 뿌꾸, 달의 요정 세일러문, 슬램덩크, 카드캡터 체리.
문구는 종이학, 별 접기, 주사기 샤프, 게임 필통, 만득이, 와와 109, 투명 다이어리.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흘러, 유행은 돌고 돌아.
패션마저 세기말로 돌아갔다.
90년대 무서운 언니들의 전유물이던 크롭탑과 캐미솔 톱, 바이커 쇼츠.
나는 저런 날라리(?)가 되지 말아야지 했는데 지금이 크롭탑이 편해진 소시민이 돼버렸다.
배꼽을 드러낸 채 한 껏 꾸미고 간 서촌 여행에서 제일 먼저 시작된 것은 배탈이었다.
잠깐의 정체기가 있었지만, 90년대부터 주욱 우리 곁을 지켜 온 추억의 물건이 있다. 그것은 바로 '스티커 사진(현 인생 네 컷)'
90년대부터 지금까지 형태는 조금 바뀌었어도 스티커 사진은 우리의 곁을 떠나지 않은 인기 있는 아이템이다.
처음 '인생 네 컷' 열풍이 불었을 땐,
- 애도 아니고 무슨 스티커 사진이야. 과거의 것은 그저 촌스럽고 구닥다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가 누구인가. 밖에선 누구보다 깔끔한 프로 사회인이지만 집에선 하기 싫은 건 죽어도 안 하는 응애란 사실.
늙은 응애는 9살이나 어린 응애와 친구가 된 덕분에 인생 네 컷에 빠져버렸다. 귀여운 프레임이 나올 때마다 즐겨찾기에 저장해놓고 콘셉트에 맞는 네 컷 포즈로 사진을 남기면 부족해 보이는 내 모습도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인공 같아진다. 덕분에 내 인생의 한 페이지를 기록해본다.
그러던 어느 날, 풍문으로 인생 네 컷 한정판 프레임 소식이 들려왔다.
최고심.
얼렁뚱땅 그린듯한 그림에서 느껴지는 인생의 희로애락. 그런 최고심이 인생 네 컷과 콜라보를 하다니. 죄책감 없이 돈 쓸 핑계가 생겼다. 셀카 찍는 것은 어색한 일이지만 지나가버리면 그만인 이 순간을 기록으로 남겨놓는 것도 나 자신에 대한 의무라 생각했다.
그러니까. 서촌 여행이라고 거창하게 이름을 지어놓고 정작 서촌이 아닌 다른 곳에서 첫 일정을 보냈던 이유는 바로 이 인생 네 컷 최고심 한정판 프레임 때문이었다. 인사동 답게 팝업의 분위기는 전통적이었다.
다행히 매장 안은 한산 했다. 일부러 늦은 시간에 방문한 덕에 별다른 기다림 없이 사진 촬영을 할 수 있었다. 밖의 습기가 무색하게 매장 안은 시원했고 냉기가 땀을 식혀줄 즈음 '나의 인생 네 컷'을 찍을 수 있었다. 만족스러운 사진 촬영 후 다음 탕진을 위해 길을 나섰다.
술을 즐겨마시지 않아서인지 퇴근 후 맥주 한 잔의 맛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맥주 마셔봤자 배만 부르지 저 더부룩한 거품에서 무슨 상쾌함을 느낄 수 있다고.
이랬던 내가 요즘엔 퇴근 후 편의점에 들러 맥주 4캔을 산다. 안주는 어묵탕, 아니면 떡튀순. 딱히 일이 힘들지도 않았는데, 여름이라 그랬을까. 퇴근 후엔 꼭 시원한 목 넘김이 필요하다. 알쓰 주제.
난 종로에 온 여행객이기도 하지만, 3박 4일 한정판 현지인이기도 하다. 종로 사람들처럼 나도 불금의 맥주 한 잔을 즐겨 보고 싶었다.
비어 있는 삶에는 한여름의 후끈한 열기를 피해 자신의 삶을 비어 내기 위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음악 소리와 저마다의 목소리가 시끄럽게 섞인 분위기 틈을 파고들어 나만의 공간에서 맥주를 따라 마시기 시작했다.
꼴꼴꼴.
알쓰지만 맥주 따르는 법 정도는 알고 있지.
그나마 마실 줄 아는 맥주가 '스타우트'다 보니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나도 나만의 술 취향이 생겨 이 술맛은 어쩌고, 저 술은 끝 맛이 어쩌고를 말해보고 싶다.
... 그런데, 진짜 그런 날이 올까?
뭘 하든 어중간했던 내게, 확고한 취향이란 게 생기긴 할까.
음악이든, 운동이든, 하다못해 책까지.
나는 늘 애매한 아이였다.
심지어 누군가를 좋아할 때도 끝은 늘 애매했다.
"나 네모네모 작가를 좋아해."
(하지만 그 작가의 모든 책을 다 읽어 본건 아냐.)
"배우 이제훈의 전달력은 정말 뛰어난 것 같아."
(하지만 그의 작품을 다 보진 못했어.)
이렇게나 애매한 내가 진심으로 뭔가에 빠져들 수 있을까.
어쩌면 사람이란 존재는 애매하게도, 애매한 취향을 갖고 그것을 위로 삼아 애매하게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애매했던 종로의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애매하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