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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과여름 Jan 21. 2023

할머니를 기억하며

이슬아의 <가녀장의 시대>를 읽다가

1915년에 태어난 할머니는 여든넷에 세상을 등졌다. 많은 이들이 궁핍했던 시절, 가난한 집 맏딸로 태어난 할머니는 비슷하게 가난한 집으로 시집을 가 딸을 내리 셋 낳았는데, 뼈대가 대단한 집도 아닌데 아들을 못 낳는다고 구박을 받다 딸 셋과 함께 내쫓겼다. 여자 넷이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었다.


몇 해 뒤 할머니는 가난한 데다 속에 울화까지 많은 남자와 재혼했다. 그 남자의 울화는 돈 때문에 생긴 병이었다. 일본에서 돈을 벌어 꼬박꼬박 큰 형에게 보내 저축을 하던 그 남자가 돌아와 보니 이미 큰형은 돈을 갖고 도망가버린 뒤였고, 그때부터 남자는 매일 술로 세월을 보냈다. 그렇게 술과 친구 하다 한 세상 하직하면 될 것을 전처와 낳은 아이들이 걸린 건지, 자기 밥상 차려줄 사람이 필요했던 건지, 어떤 이유에선지 몰라도 남자는 할머니와 재혼했다.


가난한 집에는 할머니가 데려간 딸 셋과 할아버지가 키우던 아들 둘 이렇게 다섯 명의 아이가 같이 살게 됐다. 그 뒤로 할머니는 딸 하나를 낳고 마지막으로 아들을 낳았다. 마흔 넘어 낳은 첫아들이니 무척 기뻤을까? 아니면 슬펐을까? ‘이놈의 고추가 뭐길래 눈물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을까’ 회한에 휩싸였을까? 어쨌거나 할머니는 아들 하나를 잘 키워보자고 결심했다.


가난한 집 맏딸의 딸로 태어난 고모들은 줄줄이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둘만 간신히 졸업장을 받았다. 아들인 아버지는 중학교를 졸업했다. 그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다. 속에 울화가 많았던 할아버지는 막내가 두 돌이 되기 전 술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다 넘어져 다시 눈을 뜨지 못했고, 할머니는 얼마 되지 않은 땅을 다 팔아 아들의 공납금을 대야 했으니 이 집 저 집 먹을거리를 구걸하는 게 일상이 돼버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버지는 교과서가 없어도 공부를 잘했고 조그만 몸으로 운동도 잘해 동네에서 꽤 유명했다고 한다. 유명한 이유는 또 있었다. 열두 살부터 담배를 피워댔고, 온갖 서리에 잔머리를 굴려 앞장섰고, 누구를 때렸고 등등... 여러 이유로 작지만 깡다구 있고 머리는 좋은데 사고를 잘 치는 이로 불렸다고 한다.


아버지는 할머니로부터 명민한 머리를, 할아버지에게선 화 많은 성격을 물려받았다. 화 많은 성격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비탄에 빠뜨릴 수 있을까? 할머니는 아들을 구슬려도 보고 회초리도 들며 키웠으나 아들은 엄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면서도 모르는 체하는 건지, 알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건지, 정말 모르는 건지 할머니의 속을 끊임없이 긁어댔다.


아버지는 군대에서도 폭행사건으로 영창에 들어갔고 이후 취사병으로 나름 편히(?) 군복무를 마치고 나왔다. 이후 도시로 나가 용접일을 배웠다. 그러다 한 여자를 만나고, 다음 여자를 만나고 하다 엄마를 만났다. 결혼을 안 해 주면 면도칼로 얼굴을 그어버리겠다는 협박으로 엄마와 결혼했다. 사춘기 무렵의 내가 “그런다고 결혼을 했어?” 물었을 때 엄마는 “그 성깔이라면 진짜 그어버릴 사람이다. 그리고 그 정도 깡이면 마누라 자식 굶기기야 하겠냐는 생각도 들었지.” 대답했다.


머리는 좋으나 한 성깔 하는 이 남자에게 결혼 후 또 다른 면이 발견되니, 군대에서부터 익힌 하극상의 기술(?)로 상사와 틀어지고 일을 관두는 일이 석 달에 한번 꼴로 발생했던 것. 상사가 보기 싫어 월급도 받으러 안 가겠다며 방에 드러누운 남편 대신 엄마는 임신 막달에 버스를 갈아타고 못 받은 임금을 받으러 다녔다. 석 달 일하고 석 달 가까이 집에서 노는 남편 대신 엄마는 어린 나를 이웃에 맡기고 농장에 대파를 캐러, 화훼 농장에 꽃을 따러, 점토 공장에서 점토를 나르러 동생을 임신한 몸으로 다녔다. 이때 나는 9살 언니가 봐주었다고 했다. 사춘기 지난 내가 “어떤 언니?” 묻자 엄마는, “옆집에 살던 갸가 학교를 안 다녔지.” 대답했다. “취학연령의 아동을 학교에 안 보내고 더 어린아이를 돌보게 한 건 아동학대야! 아동 노동력 착취라고!” 소리치는 내게 엄마는 그 시절에 그런 일은 흔했다고 얼버무렸다.


부디 나보다 여섯 살 많은 그 언니가 어디서든 잘 살고 있길 바란다.


아무튼 아버지는 내가 여덟 살이 될 때까지 십 수 번 직장을 바꿨고 아버지를 믿을 수 없게 된 엄마는 식당을 차렸다. 일손이 부족해 할머니를 모셔와 몇 년 간 같이 살게 됐다. 어느 순간 소득이 아버지의 세 배 이상이 될 만큼 식당은 잘 되었지만 아버지의 성격은 갈수록 나빠졌다. 아버지의 행패가 끝난 다음 날이면 엄마는 할머니에게 자식을 어떻게 이렇게 키울 수 있냐고 바득바득 대들었고, 할머니는 나도 아들이 저 모양 저 꼬라지가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고 그냥 쥐약 먹고 콱 죽어버리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되받아치며 둘이 곡을 했다.


어린 내 눈에 칼 들고 행패 부리고, 시너를 부어버리겠다고 통을 들고 오는 아버지는 인간이 아닌 것처럼 보였는데, 할머니는 이상하게 미워할 수 없었다.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는데도 할머니는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 걸까? 할머니는 말은 무뚝뚝했지만 나를 보는 표정과 손길이 따뜻한 분이었다. 내가 아홉 살이었을 때 할머니 드시라고 캐러멜 과자를 신문지에 싸서 드렸는데, 할머니는 그걸 품에 안고 얼굴을 비비며 우리 손녀가 이런 걸 다 주냐며 웃으셨다. 초등학교 입학 전, 내게 벽보에 있는 한글을 가르치던 엄마에게 “가시나를 대통령을 시킬 거가 뭐를 시키려고 그래 공부를 가르치냐” 일갈하던 할머니였지만, 할머니가 고향집으로 돌아가실 때 공부 열심히 하라고 내게 연필깎이를 사주셨다. 이후 명절에 뵐 때마다 할머니는 허리가 굽어가고 눈빛이 흐려지셨고 우리에게 잘 가라고 손 흔들던 할머니가 너무 작고 작아 곧 사라질 것만 같아 마음 아팠다.

정세랑의 소설을 읽으면 할머니가 생각난다. 정세랑의 소설에는 여자라고 차별받고 벽에 마주해서 아파하는 여자들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이슬아의 소설을 읽을 때도 할머니가 떠올랐다. 할머니가 아버지에게 밥을 먹이고 엄마가 우리를 건사했으니 지금의 나는 두 명의 가모장이 만든 셈이다. ‘할머니는 이가 없어도 한 그릇 야무지게 드시고 물도 시원하게 한 사발 다 드셨지. 옷이 변변찮으셨지만 늘 깨끗이 입으셨지.’ 이렇게 자주 생각하는데 아직 한 번도 꿈에 나온 적 없는 할머니. 입학 전 한글도 못 뗐던 내가 할머니가 사주신 연필깎이로 열심히 연필을 굴려대며 국어를 가장 좋아하는 아이로 커갔다. 흐린 눈과 주름진 얼굴로 날 향해 웃어주던 기억이 마음이 스산한 날이면 나를 안아줬다. 아이를 키우며 엄마 다음으로 할머니를 자주 떠올리게 되는 이유다.


여자라고 차례상에 배제시키는 시부모에게 내 딸도 참가시키라고 얘기하는 나를, 명절 두 번 중 한 번은 우리 집에 먼저 가야 한다고 남편에게 주장하는 나를 보면 할머니는 뭐라고 말씀하실까. ‘가시나가 어릴 때부터 깨살(잔소리)이 많고 주디(주둥이)가 야물더니, 잘했다야!“ 하지 않으실까. 이슬아의 <가녀장의 시대>를 읽으며 할머니가 무척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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