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사 당신의 서재]에서 에세이집에 기고한 글
나는 부유를 좋아한다. 富裕가 아니라 浮游를 사랑한다. 비록 지금의 나는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며 가족사진을 찍으려고 옷을 맞추고 스튜디오를 예약하는 평범한 4인 가족의 울타리 안에 있지만, 그리고 언제나 나를 기다리는 연인과 사랑스러운 반려동물이 있는 행복에 겨운 삶이지만 한편으로 내 영혼은 항상 부유를 꿈꾼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리게 되는 새로운 상황이나 환경에도 당황하기보다는 내심 환영하는 사람이다. 언제부터 나는 이런 사람이 되었을까, 생각해보니 어쩌면 아주 어렸을 때부터인 것 같다.
나는 다섯 살 때부터 가족과 떨어져 부안에서 살아야 했다. 당시 우리집은 갑작스레 가세가 기울어 어린 나를 돌볼 여력이 안되었다. 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댁에 맡겨져 처음으로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금요일 퇴근길에 나를 데리러 온 아빠는 일요일이면 나를 다시 시골에 데려다 놓아야 했고 그때마다 째지게 울었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하지만 곧 익숙해졌던 것 같다. 할머니는 나를 많이 예뻐해 주었다. 심심한 내가 TV로 투니버스를 실컷 보아도 잔소리하지 않았으며 항상 종합 캔디를 사다 놓고 맘껏 꺼내 먹도록 했다. 결국 나는 은니를 8개나 하게 되었지만 행복했다. 나는 할머니가 좋아하는 트로트들을 들으며 지냈고 할아버지가 집에 없을 때면 할머니 혼자 화투패를 맞추던 모습을 구경하곤 했다. 때로 나는 할머니가 제일 좋아하던 남행열차를 부르며 재롱을 떨기도 했다.
빗물이 흐르고 내 눈물도 흐르고, 잃어버린 첫사랑도 흐르네.
할아버지 댁에서 1년쯤 살았을 때 오토바이로 귀가하던 할아버지는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날은 비가 많이 왔다. 정말 빗물이 흐르고 우리의 눈물도 흘렀다.
그리고 나는 결혼하지 않은 막내 고모에게 맡겨졌다. 고모는 유치원 선생님이었고, 나도 그 유치원에 다니며 고모와 24시간을 같이 했다. 유치원에서 나는 선생님의 조카라는 권력을 누리며 꽤 즐겁게 보냈다. 집에서 고모는 내가 덥다고 칭얼대면 시끄럽다며 머리를 짧게 잘라 뽀글이 파마를 해주고, 밥 먹을 때면 콩을 꼭 먹게 했고, 밥을 다 먹어야만 물을 마시게 허락했던 엄한 분이었다. 그렇지만 고모는 나에게 예쁜 옷과 인형을 사주었고 피아노와 침대를 아낌없이 내주기도 했다. 고모와 살 때의 나는 트로트 대신 매일 틀어주던 녹음된 동화를 들으며 잠들었다.
옛날 옛적에 공주가 살았는데… 그 당시 내가 제일 좋아하던 공주는 사랑을 찾아 떠난 인어공주였다.
형편이 조금 나아지자 부모님은 유치원 졸업도 하지 않은 나를 집으로 데려왔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할머니를 떠나고, 또 고모를 떠나게 된 나는 다시 엄마와 사는 데에 익숙해져야 했다. 엄마는 할머니와 고모가 나에게 잘못한 점을 찾아내며 나에게서 그들의 존재가 희미해지길 원했다. 나는 그런 엄마의 요구를 수용했던 것 같다. 누군가와 정을 떼는 일은 이때부터 어렵지 않아졌다.
이런 유년 시절 때문인지 나는 새로운 학교에 가고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는 걸 딱히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즐기는 사람이었다. 학년이 바뀔 때의 긴장감도 남들보다 짧았다. 친구들은 학년이 바뀌고 반이 달라질 때마다 헤어짐의 아쉬움을 담아 인사했고 나 역시 아쉬운 척을 했지만, 사실 아쉽거나 미련이 있지 않았다. 크게 정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내가 마음 깊이 좋아하던 한 친구가 이사를 간다고 했을 때는 밥도 먹지 않고 울었었는데 그것 역시 길어야 하루였고 친구 없는 동네에 금세 적응했다. 아는 친구가 거의 없는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에는 혼자 집에서 교복을 미리 입어보며 새롭게 펼쳐질 세상에 온통 설레는 마음이었을 정도였다.
20대에 짐 자무쉬의 영화 ‘영원한 휴가’를 보게 되었다. ‘영원한 휴가’는 영화를 보기 전 그 제목만으로도 충분히 나를 매료시켰다. 휴가라는 단어만으로도 설레는데 영원하다니, 그건 바로 내가 꿈꾸던 이상적인 삶이 아닌가. 하지만 영화의 내용은 제목처럼 즐거운 휴가를 떠난 이야기가 아니다. 폐허와 같은 뉴욕 동네를 돌아다니는 주인공은 여러 사람들을 마주한다. 그는 그들과 의미 모를 단편적인 대화와 관계만을 가지며 찰리 파커의 음악에 뚝딱거리는 춤을 추는,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는 소년일 뿐이다. 영화에서는 새로운 공간에 들어서면 공간을 구성하는 사물 하나하나가 와 닿으며 의미가 있으나, 시간이 지나면 모두 똑같은 방처럼 느껴진다는 독백이 등장한다. 사람도 그 방들과 같다는 것이다.
내가 느껴온 감정도 유사하다. 지금도 나는 집도 절도 없이 계약이 만료될 때마다 집을 찾아 옮기는 셋방살이가 사실 그렇게 힘들지 않다. 살다 보면 지루해지는 동네와 집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옮기는 일은 아직도 설렌다. 때가 되면 자리를 옮겨야 하는 직장에 다니는 것마저 즐겁다. 떠날 때가 되어 떠나는구나 싶은 것이다. 물론 이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새로운 곳에 갈 때마다 내 인생이 조금 달라질 것만 같은 즐거움을 더 크게 느끼는 것이다.
사실 그렇게 새로운 곳에 간다고 내 인생이 크게 달라지진 않는다. 시간이 지나 변함없는 나를 마주하고, 결국 나는 나에게서 느끼는 지루함을 못 견디고 다시금 환경을 바꾸는 쪽을 택한다. 잠시의 기대감을 위해서 말이다. 내 주변 사람들은 나의 이런 마음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누군가는 사람이라면 응당 환경을 옮길 때 스트레스를 받기 마련이므로 나의 기분은 거짓된 것이라고도 한다. 글쎄, 이건 아마 그 스트레스를 이겨보려는 나만의 방식인지도 모른다. 가족이나 연인, 남들이 말하는 평생 직장을 가지고 있으나, 언제나 마음 속으로는 어디론가 떠날 생각만 하고 있다는 것. 이게 나의 비밀스러운 취향이다. 이 취향을 가진 나에게는 삶이 영원한 휴가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