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 프로젝트 - 05
작년 크리스마스 날, 선물처럼 H는 장문의 글을 보내왔다.
"새벽에 하나 휘갈겨 써봤습니다."
H 글은 거의 손을 대지 않아도 될 만큼 본인 스타일을 잘 지켜가면서 글을 써왔다.
지난 22일, 좋아하는 공연을 보기 위해 한강진역으로 향했다. 공연 정보가 뜨고 특별한 일정이 없는 한, 이 팀의 공연은 늘 챙긴다. 지금까지 10번도 넘게 다녀왔다. 공연장에 가기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공연장이 지하철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인지, 길이 복잡하지는 않은지 확인하기 위해 다산콜센터 120에 전화를 걸었다. 교통 안내를 받고 지하철에서 10분 내외로 걸어갈 수 있고 복잡하지 않겠다 싶으면 지하철과 지팡이를 이용해 걷기로 한다. 물론 장애인콜택시나 바우처 택시를 이용할 수도 있지만, 걸어서 갈 수 있겠다고 판단되면 직접 걸어가는 것을 선호한다.
지하철 출구를 나서면 보행용 네비게이션 앱을 켜고 안내에 따라 걸어간다. 남은 거리가 줄어들면 방향이 맞는 것이고, 거리가 늘어나면 반대 방향으로 간 것이다. 앱의 안내를 따라 "좌회전"이나 "우회전"을 할 때, 주변에서 느껴지는 바람의 방향이나 공간의 변화를 통해 길을 찾는다. 물론 가끔 앱의 안내와 실제 상황이 맞지 않을 때도 있다. "계속 직진"이라는데 벽이 가로막혀 있거나, "좌회전"하라는데 꺾이는 길이 없을 때처럼. 그래도 앱은 꽤 유용하다. 근처까지 안내를 받고 나면 지팡이를 두드리며 목적지로 향한다.
이번에도 공연장 근처에 도착했을 때 누군가가 다가와 말했다.
"안녕하세요. 바로 왼쪽입니다."
놀라서 물었다.
"제가 어디 가는지 아세요?"
"네, 알아요. 많이 뵀었어요."
이 팀의 공연에 자주 다녀서인지, 이제는 주변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는 것 같았다. 이전에도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누군가 안내를 해준 적이 있었고, 공연이 끝난 뒤 귀가할 때 도움을 주는 분들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심리적으로 더 편안해지고 자신감도 생긴다. 앞으로도 특별한 일정만 없다면 이 공연을 계속 보러 갈 것이다.
처음 가는 낯선 곳은 여전히 쉽지 않다. 주변 정보를 미리 알아야 하고, 때로는 택시를 타고 가도 진입이 어려운 경우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택시에만 의존하기보다는 내 두 다리로 길을 찾아가는 삶을 선택했다. 길에서 헤매더라도, 때로는 도움을 받으면서라도 말이다.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했을 때 느껴지는 묘한 희열과 "내가 해냈다"는 성취감은 내게 큰 동력이 된다.
지금 내가 사는 이곳에서 13년째다. 처음 이 동네에 왔을 때 혼자 갈 수 있었던 곳은 세탁소와 편의점이 전부였다. 주변의 맛있는 냄새에도 어디가 입구인지 몰라 발길을 멈춘 적이 많았다. 비장애인 지인과 집 주변을 걸으며 어떤 것들이 어디에 있는지 자세히 듣고 나서야 조금씩 익숙해졌다. 지금은 혼자 식사를 해결하고, 편의점이나 약국, 병원에도 스스로 다닐 수 있다. 작은 일이지만 이 모든 과정은 강한 마음을 먹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얻은 결과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때로는 나 같은 사람에게 큰 도움을 주지만, 반대로 소외감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특히 터치로 작동하는 기계들. 꼭 디지털로 만들어야 했을까,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세상도, 한 인간의 삶도 앞으로 나아가거나 갈팡질팡하며 조금씩 변해가는 것이 아닐까.
혼자 공연을 다닌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놀란다. 혼자 다니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대학생 시절, 정말 좋아했던 공연이 있었다. 함께 갈 사람을 찾지 못해 결국 가지 못했고, "다음에는 꼭 동행자를 찾아가야지" 다짐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뮤지션은 세상을 떠났다. 그 일을 겪고 난 뒤, 나는 누군가의 도움만을 기다리며 시간을 흘려보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 이후로 공연뿐만 아니라 식당, 병원, 은행 등 필요한 모든 곳을 스스로 찾아다니며 도전하고 있다. 이런 도전과 성공은 나를 살아있게 하는 원동력이다. 내가 숨 쉬며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H가 아니라 그가 경험하고 느낀 점이 어떻다 평가할 순 없었다.
글에서 느껴지는 향기 그 자체가 H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