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 뮤지엄 M-1
1월의 혹독한 추위를 뚫고 동대문 박물관으로 향했다.
춥지만 상쾌한 공기가 좋았다.
바스키아의 전시가 기대되면서...
입구에서부터 바스키아의 다부진 눈빛을 마주할 수 있었다.
천재 예술가는 27세,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작품은 이렇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장미셸 바스키아는 1960년 12월 22일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제라르 바스키아는 아이티 출신이고,
어머니 마틸다 안드라데스는
푸에르토리코계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바스키아 가족은 브루클린의 파크슬로프
지역에서 살았다.
1965년 바스키아와 그의 어머니는 종종 브루클린 미술관,
현대미술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방문했다.
어머니는 아들의 예술적 관심을 끊임없이 격려하며
그 중요성을 강조했다.
1967
브루클린에 있는 사립 성공회 학교인 세인트 앤스에 다녔다.
1968
앨프리드 히치콕 영화, 자동차, 만화책, 그리고 매거진
매드의 앨프리드 E. 뉴먼 캐릭터에서 영감을 받아
만화 같은 그림을 그렸다.
5월, 길에서 공을 가지고 놀다가 자동차에 치여 큰 사고를 당했다. 이 사고로 그는 비장 절제 수술을 받아야 했다.
생전의 마지막 전시는 6-7월
잘츠부르크의 타데우스 로팍 갤러리에서 열린
Jean-Michel Basquiat: Paintings, Drawings였다.
8월 12일 금요일, 장 미셸 바스키아는 스물일곱의 나이로
그레이트존스 스트리트의 로프트에서 세상을 떠났다
Studio of the Street
1983년 헨리 겔드 잘러와의 인터뷰에서 장 미셀 바스키아는 자신의 주제를 "왕족, 영웅주의, 그리고 거리"라고 답했다. 이세단어는 바스키아의 예술 세계를 함축한다.
바스키아의 작업은 1980년대 맨해튼과 브루클린의 거칠고 날것의 현실에 뿌리내렸으며, 뉴욕의 에너지를 캔버스로
옮겼다 그의 초기 회화에는 경제 위기, 범죄율 급등, 사회 불안으로 뒤섞인 당시 뉴욕의 생동감이 담겨 있다.
갓 20살을 넘긴 바스키아의 뉴욕뉴욕
정체성과 투쟁 속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표현한 작품
Phooey 의성어
시대적 모순을 담은 작품
흑인들의 정체성을 드러낸 작품
Heads and Masks
바스키아 작품 전반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모티프 중 하나는 해골과 '가면이다.
이는 그가 문화적 기억, 권력, 정체성과 맞서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작업은 바스키아가 아프리카 가면에 매료되었던 데서 비롯되며, 영적 상징성과 문화유산에 대한
그의 관심과도 연결된다.
그의 인물들은 때로 아이티의 부두교 인형이나 아프리카의 은키시(nkis)'를 닮았는데, 이들은 보호적이고 영적이며 초자연적인 속성을 지닌 존재들이다.
바스키아는 이 형상들을 현대적이고 도시적인 맥락 속에 배치하고, 아프리카 전통을 재해석함으로써
역사적 의식, 힘, 그리고 저항의 의미를 불어넣었다.
그림 속 메시지는 분명하다. 해골과 가면 형상들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정체성, 인종차별, 불평등의 서사를 풀어낸다. 바스키아는 과감한 색채와 표현적인 붓질로 사회 속 자기표현, 소외들의 복잡성을 탐구하며,
문화적 기억과 정체성을 되찾는다.
표면 아래 숨겨진 진실을 벗겨내듯, 그는 단어와 색채의 총을 해체하며, 가면 뒤에 자리한 억압의 역사, 사회적 구조를 드러내며 투쟁의 태도를 보여준다.
Words and Signs
큐레이터 클라우스 커티스가 "그의 창작의 시작에는 단어가 있었다"라고 언급했듯, 바스키아는 단어의 의미뿐 아니라
그 소리와 형태 자체를 사랑하며 이를 마치 '붓질처럼 사용했다. 그래피티에서 출발한 그의 언어 실험은 초기 작품은 물론 말년에 이르기까지 지속도 되었고, 반복과
변형을 통해 힙합과도 닮은 역동적인 리듬을 만들어났다.
다양한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한 그는 책, 시리얼 박스, 신문에서 문구를 발췌해 작품 속에 삽입했고, 때로는 글자를 지워내어 오히려 그 의미를 더욱 부각했다. 긁은 윤곽과 선명한 색채 단순화된 형태는 광고와 로고, 만화의 미학을 불러오며, 소비문화와 맞닿은 시각 언어를 저항의
무기로 전환시켰다. 더불어 높은 밀도의 단어들의 범람은 오늘날 인터넷 시대의 정보 과잉과 '복사 붙여 넣기' 문화를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구성된 그의 화면은 기호와 단어, 반복되는 상징으로 가득한 시각적 팔림프세스트"로, 단순한 소통을 넘어 집단적 기억과 문화적 정체성을 담는 매체가 되었다. 이는 물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의 집단적 기억들과 추사 김정희의 글자를 넘어선 조형적 실험과도 공명하며,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가 만나 빚어내는 깊은 울림을 전한다.
Museum Security
1983년에 이르러 장-미셀 바스키아는 시각적 개념적 측면 모두에서 복잡성의 정점에 도달했다
<뮤지엄 사시큐리티(브로드웨이 붕괴)>는 바스키아의 전형적인 예술적 접근을 보여주며, 그의 사유 과정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이 거대한 캔버스에서 단어, 기호, 이미지들은 서로 충돌하며, 밀도 높은 지식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바스키아가 예술의 정점에 올랐을 때 만든 작품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제작한 작품
흰학을 영적인 재탄생과 초월적인 존재로 표현했다.
It's All Drawing
바스키아는 단 10년의 짧은 기간 동안 1,000점이 넘는 회화와 약 3,000점의 드로잉을 남겼다.
그의 드로잉은 부드럽고 유려한 그래피티와 달리 거칠고 표현적인 선이 특징이다. 오일 파스텔이 종이에 남긴 압력과 에너지가 그대로 드러나고, 글자와 기호는 각기 다른 리듬을 띠며 즉흥성과 속도감이 느껴진다.
더불어 형상을 그려낸 드로잉 선들은 그래피티를 연상시킴과 동시에, 거리의 스튜디오에서 보여진 초기 작업을 떠오르게 한다.
그는 종이를 통해 언제 어디서나 작업을 할 수 있었고 드로잉은 그에게 결과물이 아닌 행위 그 자체였다.
반복과 낙서, 기호와 단어가 어우리진 그의 드로잉은 회화 못지않게 중요한 예술 언어였으며,
이후 그의 캔버스 속 상징과 모티프의 토대가 되었다.
바스키아는 단어와 선의 힘을 탐구하며
자신만의 흉내 낼 수 없는 선을 구축했다.
드로잉을 제록스로 복사해 캔버스에 붙이는 실험은 그의 작품의 스펙트럼을 확장시키는데 기여했다.
아이들과 함께 작품 감상하는 가족들이
마치 작품과 하나가 되는 듯 보였다.
Basquiat in Asia
바스키아는 1980년대부터 일본, 태국, 홍콩 등의 아시아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새로운 경험과 이미지를 흡수했다. 바스키아에게 아시아는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라 예술적 언어를 확장시키는 또 하나의 중요한 원천이었다.
그가 접한 한자, 기호, 동양적 상징들은 작품 속에 스며들어
바스키아의 기호 체계를 더욱 확장시키는데 기여했다. 바스키아는 아시아를 여행하는 동안 사진작가이자 음악가인 리 재프와 함께 했는데 당시 그의 카메라에 생생하게 담긴 비바스키아의 여정은 이번 전시 곳곳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더불어 이번 섹션에서는 추사 김정회의 2개 작품이 함께 전시된다 두 작품 모두 김정희 말년에 쓰여진 서체로 의도적으로 전통적 규범을 벗어나 거칠면서도 아이 같은 필법을 보여주며 문자 자체를 통한 조형적 실험을 보여준다.
그가 남긴 작품 속 동양적 흔적과 추사의 서체를 함께
조명하며 문자와 예술이 만나는 또 하나의 공명점을 보여준다.
김정희, 판전 1856
지금 보시는 것은 조선 후기 거장 추사 김정희가 생애 마지막 해인 1856년에 쓴 판전의 탁본입니다. 판전은 불교 사찰에서 경전을 보관하는 건물을 뜻하며, 이글씨는 원래 봉은사 현판에 새겨졌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것은 그 글씨를 종이에 떠낸 탁본이죠.
이 작품은 단순히 건물 이름을 적은 것이 아니라, 추사의 예술적 혼이 담긴 글씨입니다.
병중에 남긴 이 글씨는 획이 굵어졌다가 가늘어지고,
각졌다가 둥글어지면서, 문자가 하나의 그림처럼 보이는 순간을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판전은 단어가 의미를 넘어서 시각적 형상으로 변하는 예술적 경험을 선사합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바스키아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는 작품 속에 단어와 기호를 반복하고, 때로는 철자를 틀리며, 언어를 단순한뜻이 아니라
보이는 이미지로 바꾸었습니다.
추사가 붓으로 글씨를 그림처럼 만들었다면,
바스키아는 거리와 캔버스 위에서 언어를
기호로 재창조한 것입니다.
한 사람은 붓끝에서, 또 다른 사람은 스프레이와 오일스틱에서, 고통을 넘어선 예술의 언어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바스키아의 마지막 시기 작품들은 화면을 가득 채우거나 극도로 비워내는 방식을 보여주는 양극단을 오갔다.
그는 자신만의 기호와 상징체계를 계속 확장해 나가면서도, 단순화와 공백을 병치하며 삶과 죽음, 혼란과 질서의 경계를 탐구했다. 또한 만화적 표현과 풍자적인 표현들을 많이
사용했는데, 이는 냉소라기보다는 이중성과 아이러니를 다루는 방식으로 활용되었다.
그의 말년 작품에는 죽음에 대한 탐구가 마치 자신에 대한 예언처럼 드러난다. 대표적으로 나이지리아 요루바의 신에 빗대어 자신의 자화상을 그린 <EXU>와 해골 위에 올라탄 자신을 그린 자화상 <Riding with Death>는 해골에 올라탄 자신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 있다. 이 작품들은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도 삶과 죽음을 치열하게 탐구했음을 보여준다. 그의 친구팹 5 프레디는 그를 두고 "장 미셸은 불꽃처럼 살았다. 그는 밝게 불타올랐다.
불은 꺼졌지만 그 열기는 아직 남아있다"라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