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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주말 목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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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천고래 Jun 17. 2019

고향집이나 진배없다 안 하나

주말 목욕_부산광역시 중구 '신수 대중사우나'


주말이면 목욕을 다니고 있지만, 모든 스케줄을 목욕에 맞추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고작 이틀에 약속도 지키고 할 일도 해내야 하니까. 그래서 일과 사이에 잠깐 틈이 나는 몇 시간을 활용하는 편이다. 지도 어플을 켜서 '목욕탕'이나 '온천'을 검색하거나, 혹은 골목에서 눈에 띄는 한 곳을 찍어 무작정 들어가 보는 게 대표적인 방법. 오늘 소개할 이곳은 후자로, 뜻밖에도 재미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곳이다.


이 간판에 발걸음이 멈췄다. 한글로 '목욕합니다' 그리고 일본어로 '사우나 때밀이 있음'
정면. 옆에는 세탁소와 이발소가 있다.


카페를 나와 무작정 골목을 걸었다. 관광지에 가까운 구도심이라 과연 목욕탕이 있을까 반신반의했는데, 의외로 가까운 곳에 목욕탕이 있었다. '목욕합니다'라는 한글과 함께 일본어로 '사우나, 때밀이 있음'이라고 나란히 적혀있었다. 정문의 왼쪽으로는 이발소 간판이 뱅글뱅글 돌아가고 오른쪽으로는 세탁소가 영업 중인, 어딘지 모르게 구조에서부터 완결성이 느껴지는 제대로 된 목욕탕이었다. 연세가 제법 지긋해 보이는 할머님이 친절하게 맞아주셨다. "어서 오이소."


탈의실, 평범한 목욕탕의 모습이었다.


체리 색 사물함 사십여 개에 장판이 발라진 평상 하나, 단골들의 목욕 바구니가 높이 올려져 있고 선반 한 귀퉁이에서 선풍기가 탈탈 돌아가고 있는 평범한 목욕탕. 느지막한 오후라 그런지 욕탕 안에는 네 명이 전부였다. 마침 세신사 아주머니가 자리를 정리하시는 게 보였다. 이제 곧 퇴근하실 모양일까,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더 늦기 전에 몸을 맡기고 싶어졌다. 마침 등 밀어줄 누군가가 필요했기에. "등만 밀어주시나요?" 아주머니는 시원스럽게 대답해왔다. "되지요, 안즉 몸 안뿔렸지요? 십오 분 정도 있다 오이소." 


아주머니가 시킨 대로 온탕과 열탕을 오가며 단 십 초도 낭비하지 않고 몸을 담갔다.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해 더운 공기에 피부를 담금질했다. 낯선 사람에게 몸을 맡기려니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아주머니는 웃으며 말을 붙인다. "아이고, 이렇게 기다란 아가씨가 어디서 왔는가 모르겠다. 아프면 말하소." 그 말 한마디에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리고 손가락 끝까지 살뜰하게 씻어내리는 낯선 사람의 손길이 이상하게 편안하고 시원했다. 마지막 즈음엔 노곤하게 몸이 풀려 눈꺼풀이 내려앉기까지 했으니.


아주머니가 주신 100원. 그렇다면 오늘 세신 값은 14,900원.


그렇게 목욕을 마치고 나와 코인형 드라이어기에 머리를 말리려니 웬걸, 현금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아까의 세신사 아주머니가 100원짜리 하나를 건네 온다. "아나, 이걸로 머리 말리소." 나를 끝으로 세신을 마감하고 하루 치 수입을 정산하시다 말곤, 내가 한참 지갑을 뒤적거리는 걸 본 모양이다. 눈 밝은 배려에 감사 인사를 드렸다. 100원이면 고작 2분, 머리를 말리기에 충분한 시간은 아니었지만 마음만은 뽀송뽀송해졌다. 


해바라기 시트지 스티커에 가려진 주인 할머니의 밝은 웃음.


이제는 사장님께 이런저런 질문을 할 차례. 아까 다정하게 맞아주신, 연세 지긋해 보이시는 할머니 한 분이 티브이를 보고 계셨다.


"사장님, 목욕 잘하고 갑니다."

"그래요, 우떻든가? 물이 좋아가 때가 잘 밀리지 않든가예?"

"네, 물도 좋고요. 세신도 잘 받았어요. 근데 여기는 얼마나 오래됐어요?"

"보자... 육이오 난리 나고 나서 그카고 목욕탕을 했으니까, 인자 한 60년 됐나 모르겠다. 근데 그거보다 더 오래됐다 캤다. 우리가 일본인이 하던걸 인수했다 아이가. 그카니까 이기 훨씬 그전부터 있었는기라."

"그렇게나 오래됐어요?"

"요게 개발될 때부터 생긴 목욕탕이라 했으니까 엄청 오래됐지. 그란께네 손님들도 일본 사람들도 많이 오고 안 하나. 여게가 일본인들이 많이 살던 동네라. 지끔이야 주변에 다 술집이고 하지만 옛날엔 많이 살았어. 일본 사람들 중에 한국에서 태어나갖고 한국말도 하고 그런 사람들 있어. 그 사람들은 부산 오면 여기를 꼭 찾아와. 오랜만에 와서 그래. 어머니 잘 계셨느냐고. 건강하시라고. 이 동네 살던 한국 사람들도 그래 또 오기도 하고. 와가지고 그란다. 참 그대로네요, 카믄서 여기 오면 옛날 생각난다고. 고향집이나 진배없다 안 하나."

"그렇게 옛날 손님들이 찾아오고 그러면 뿌듯하고 좋으시겠어요."

"좋지, 근데 힘들어가 못하겠다. 옛날맹키로 손님이 많이 들기를 하나. 내 이 카운터에 앉아있는 것도 가끔 용타 싶다. 내 나이가 여든셋이거든. 그래도 안즉 건강한 편인데 그게 일이 있어서 그렇지 싶어서 내가 이거를 못 놓는다. 날이 궂으나 좋으나 여 카운터를 지키고 있는 게 내 일이다, 그래 생각하고. 손님들 오면 말도 붙이고 그라니까 좋고. 그래서 하는 거지."

"대단하세요! 정말 그 연세로 안 보이시거든요. 십 년은 더 젊어 보이세요.  부디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그래, 아가씨도 담에 또 온나. 조심히 가이소."



목욕탕에서 걸어서 3분 거리에 있는 백산기념관에 들렀다.
백산 안희제 선생의 초상이다


목욕탕을 나선 뒤, 문득 근처에 있는 백산기념관에 들러보았다. 목욕탕 이야기를 듣고 나니 오래전 이야기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기념관은 백산 안희제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공간으로, 항일 운동과 관련된 여러 자료가 갖춰져 있어 당시의 활약을 상상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기념관이 세워진 자리는 독립운동의 자금줄이 되었던 '백산상회'의 옛터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곳 중앙동이 격동의 근대사를 품어왔다는 것도 들어왔고, 거미줄처럼 가느다랗게 이어진 골목들을 거닐며 오랜 세월을 짐작하기도 했지만 막상 어떤 이야기들이 있는지 무관심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돌아 나서며 조용히 방명록에 오늘의 마음을 남겼다.



목욕탕 근처의 유명하고 오래된 모밀집에 들렀다. 메밀 아니고 모밀.
어쩐지 온모밀 기분.


허기진 배를 붙잡고 근처의 이름난 모밀집에 들렀다. 개업이 1956년이라니 목욕탕과 비슷한 연배였다. 날이 흐리고 쌀쌀해서인지 뜨끈한 국물이 당겼다. 냄비에 끓여 나온 한국식 온모밀을 먹으며 오늘 듣고 본 이야기의 조각들을 맞춰나갔다. 먼 과거 항구가 열리며 수많은 사람과 물건을 실어 날랐고, 이 땅을 점령한 세력에 항거하기 위해 의인들이 용감히 터를 잡았고, 많은 사람들의 값진 희생 끝에 나라를 되찾았고, 전쟁 이후 피난민이 몰려들고, 또다시 이곳은 누군가의 삶의 터전이 되어가고……. 같은 세월 동안 목욕탕도, 모밀집도 역사의 한 장면 속에서 제 몫을 하고 있었으리라. 


역사 속 이야기를 피부의 촉각으로, 구수한 이야기로, 뜨겁고 쫄깃한 맛으로 느낄 수 있었던 하루. 목욕탕에 들렀을 뿐인데 이런 이야깃거리를 만나다니, 알면 알수록 목욕탕이란 신기한 공간이란 생각이 든다. 다들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기록되지 않은 역사를 품고 있을까. 다음 목욕탕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만날지 문득 궁금해지는 저녁이었다.



목욕탕 정보


신수 대중사우나 ㅣ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로 138번길 15-1

6:00 ~ 19:30, 수요일 휴무 ㅣ 대인 5,000원, 소인 3,500원 ㅣ 드라이어 1회(2분) 100원

*지도 검색 결과 누락으로 링크는 첨부하지 않습니다.



기념관 & 식당 정보


백산기념관 ㅣ 부산광역시 중구 백산길 11

매주 화~일요일 10:00 ~ 18:00(주말은 17:00까지), 월요일 및 공휴일 휴관 ㅣ 관람료 무료


중앙모밀 ㅣ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대로49번길 9-1

9:00 ~ 21:00, 매달 첫번째&세번째 일요일 휴무ㅣ 모밀국수 7,000원, 온모밀 7,500원, 김초밥 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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