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해소'라고 믿었던 것들의 배신
스트레스와 불행은
자신이 처한 상황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 대처하는 방식에서 온다
-브라이언 트레시-
요즘은 “스트레스받는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쓴다.
버스가 늦어도 스트레스, 메일이 안 와도 스트레스, 심지어 아무 일 없어도 “이상하게 스트레스받는다”라고 말한다.
이젠 거의 숨 쉬듯 하는 인사말이 돼버렸다.
오늘 ‘온 세상의 잡다한 이야기는 바로 그 ‘스트레스’에 대한 것이다.
누구나 겪지만, 아무도 제대로 풀지 못하는 그것.
나는 문득 생각했다.
'나는 내 스트레스를 어떻게 풀고 있지?'
나는 일단 매운 걸 먹는다. 그것도 그냥 매운 게 아니다 — 입안이 얼얼해지도록 매운 것.
떡볶이에 불닭면, 심지어 캡사이신을 따로 추가하기도 한다. 혀가 타들어가고 눈물이 날 때쯤, ‘그래, 아직은 살아 있구나’ 싶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다음 날 거울을 보면 퉁퉁 부은 거울 속의 나를 보고는, “누구세요?”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거울을 보는 순간은 후회했지만, 그날 저녁이면 또 불닭면을 끓이고 있다.
‘어제는 너무 매워서 제대로 맛을 못 즐겼어. 오늘은 좀 덜 맵게.”하면서.
하루의 끝, “오늘도 고생했다”며 잔을 든다.
혼자 마시는 사람도 있고, 사람들과 어울려서 마시는 사람도 있다.
공통점은 단 하나 — 이 하루를 견디느라 정말 애썼다는 것.
처음엔 위로였다.
한 잔 두 잔 기분 좋게 오르다 보면 웃음도 나오고, 그동안 쌓였던 서운함도 툭툭 튀어나온다.
그런데, 이런 자리에서 꼭 구군가는 눈물을 흘린다. 옆에서 지켜보는 나는 ‘위험’을 감지한다.
‘앗, 위험하다! 여기서 더 넘어가면 이제 감당 못한다’는 위기감이 드는 순간이다. 반면, 그 옆에서는 멀쩡하게 웃고 있는 사람이 있고, 누군가는 괜히 분위기를 띄우려 큰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그런데 술은 결국, '참았던 감정’을 대신 울어주는 존재일 뿐이다.
그래서일까. 다음 날엔 꼭 후회가 찾아온다.
머리는 깨질 듯 아프고, 속은 뒤집히고, 심하면 화장실에 들어가 못 나온다.
그러나, 위에 소개한 이 모든 해법을 그저 ‘애교’로 만드는 최악의 사태는 아마도 ‘술 취한 문자’의 전송이 아닐까.
그때만큼 솔직한 순간이 없는데, 다음 날 아침엔 그 솔직함이 공포로 바뀐다.
'어젯밤 어렴풋이 누군가에게 정신없이 문자를 눌렀던 기억은 나는데…' 하면서 애써 전날밤의 일을 떠올리는 순간, 소름이 쫘~악 끼치면서 “Oh My God!! 을 외친다.
미친 듯이 스크롤해서 내린 문자의 끝에서 감정 폭탄 문자’를 발견. 상대가 ‘읽음’ 표시만 남긴 채 아무 답이 없다.
그걸 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고 ‘어제의 나는 누구였지?’ 싶어진다.
전날의 술은 분명 '위로'였는데, 다음 날엔 꼭 ‘참회의 장’이 열린다.
'에라 모르겠다. 그 수모 겪어가며 돈 버는 것도 다 인간답게 살자고 하는 짓인데, 내가 이 정도도 못쓰나' 해가며 호기롭게 긁고 나온다.
게다가 인간에게 지치고 마음이 허해질 때, 물건이 주는 기쁨이란 인간이 주는 기쁨으로는 대체가 안 된다.
그 순간만큼은 모든 게 리셋된다. 쇼핑백을 들고 나올 때, “그래, 이 정도면 다시 살만하다” 싶다.
하지만 청구서가 도착하는 순간, 그 리셋 버튼은 현실 복귀 신호로 바뀐다.
‘내가 미쳤지…’ 하며 머리를 쥐 뜯는다.
분명 행복으로 번졌던 순간이 있었는데, 그 행복은 배송은 빨랐지만 늘 느리게 후회를 남긴다.
그리고, 며칠 뒤 또 결제창 앞에 앉아, "이번엔 진짜 마지막이야 (그 마지막이 몇 번째인지는 아무도 모른다.)”라는 익숙한 멘트를 되풀이하며.
전화를 붙잡고 같은 얘기를 몇 번이고 반복한다.
“아니, 그게 아니라…”
들어주는 친구는 이미 세 번은 족히 들었지만 다시 처음 듣는 척 “어, 맞아 맞아” 해준다.
그건 단순한 하소연이 아니다. 감정의 배출구다.
사람은 결국, 누군가에게 자신의 고통을 번역해야 산다.
다만 그 ‘배출구’가 너무 자주 열리면 문제가 생긴다.
두 번 세 번은 괜찮지만, 그게 다섯 번, 여섯 번이 되면 어느 날부터 전화 연결음만 울리고 받지 않는다.
감정의 해소는 되었지만, 인간관계는 종종 통화료처럼 빠져나간다.
많은 사람들이 스트레스받을 때 “그냥 자요”라고 하면 “현실 도피인게지…”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 모든 방법 중에서 가장 깔끔하고 확실한 방법이다.
아무도 괴롭히지 않고, 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그 짧은 몇 시간 동안은 세상도 멈추고 나도 멈춘다.
이불속은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피난처다.
물론, 눈을 뜨면 현실은 그대로지만 그 몇 시간 덕분에 다시 버틸 힘이 생긴다.
나는 가끔 이렇게 생각한다 —자는 건 도피가 아니라, 임시 휴전이다.
참는 사람은 아프다.
화를 말로 내지 못하고, 서운함을 삼키고, 억눌린 말들이 몸속 어딘가에 눌어붙는다. 그러다 어느 날, 전혀 엉뚱한 방식으로 터진다.
그건 단순한 피로가 아니다 — 제때 흘려보내지 못한 감정의 잔재다.
그래서 어떤 의사들은 이렇게 말한다.
“감정이 쌓이면 장기가 병든다.”
스트레스는 기분 문제가 아니다.
몸은 감정을 ‘화학반응’으로 기억한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코르티솔(cortisol)이 분비된다.
이건 생존 본능을 돕지만, 지속되면 면역을 무너뜨리고, 수면과 호르몬 균형을 망가뜨린다.
또 뇌는 ‘상상 속 행동’과 ‘실제 행동’을 구분하지 못한다. 화를 되새기거나, 속으로 싸움을 재연하기만 해도 몸은 또다시 스트레스 반응을 겪는다.
그래서 심리학자 피터 레빈은 말했다.
풀지 못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몸속에 쌓일 뿐이다.
스트레스는 결국,
내가 얼마나 살아 있냐는 증거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상처받지 않으려면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면 된다지만,
그건 살아 있는 게 아니라 단순히 멈춰 있는 것이다.
누구는 매운맛으로, 누구는 취기로,
또 어떤 이는 카드값이나 대화로, 혹은 깊은 잠으로 버틴다.
그 방식들이 미성숙하다고, 어리석다고 손가락질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그건 우리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만든 생존의 언어다.
스트레스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푸는 방식이 나를 닮아갈 뿐이다.
그러니 오늘도 나는 묻는다.
나는 지금, 어떤 방식으로 나를 위로하고 있는가.
그 답이 바로 ‘나’라는 인간의 초상일 테니까.
~각자의 방식으로 평온한 온 세상을 꿈꾸며, From Zürich ~
이상하고 복잡한 인생이라지만, 그래도 그게 우리의 삶이다.
가끔은 눈물 나도록 버거운 하루도, 음악 한 곡처럼 흘러가면 그뿐.
오늘만큼은, 진지하게 버티지 말고 — 이 리듬처럼 가볍게 흔들리며 살자..
https://youtu.be/NAogfwwqwGY?si=fM7Ixg4Gfm5eIx4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