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답장

화려한 수사보다 강렬한 빨간 하트 하나, 언어 너머에 존재하는 최고의 답

by 온 세상이 내 편


우리 가정에서 한국어, 불어 양언어를 완전히 이해하고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은 나뿐이 없다.

아이들이 어릴 적에 일부러 기를 쓰고 집에서는 한국어만 사용하게 한 적이 있었는데, 어느 시점부터 아주 이상한 한국어를 구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불어 어순에 한국어 단어를 끼워놓는가 하면 한국어 어순에 불어를 한번 더 반복하는 등), ‘이러다가 죽도 밥도 안 되겠다’ 싶어 억지로 한국어로 말하게 하는 걸 멈췄더니, 아주 빠른 속도로 프랑스어만 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다보니 어쩔 수 없는 듯하다-

다만 우리 아이들은 한국어로 말해도 알아는 듣는다(일상 회화정도의 수준으로). 그리고, 대답은 불어로 한다.


반대로, 남편은 전형적인 이과생이다 보니 수학적 사고 능력이 더 강한 사람인 데다, 결혼하고도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내가 의무감을 가지고 억지로 한글만 가르쳐놓은 상태라 한국어는 읽을 줄만 안다. 물론, 함께 산 세월이 있으니 짧은 구절은 알아듣고, 말하는 톤을 듣고 감정을 캐치하는 정도는 되지만 정확히 이해한다고 보기는 힘들다.


가끔, 내 생일에 남편이 쓴 '한글 편지'가 등장하곤 한다. Papago(파파고)를 베낀 편지는 주로 나를 웃기는 역할을 담당한다 ⍢⃝ 주어가 갑자기 바뀌고 시제를 막 건너뛴다.


아이들이야 어차피 프랑스 사회 속에서 살아갈 애들이니 그렇다손 치지만, 내가 남편에게 가장 아쉬운 점은 ‘나의 글’을 못 느낀다는 점이다. - 나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 내 언어로 써진 내 글에서 '내 사고의 톤'과 '영혼의 색'을 느끼지 못하는 게 아쉽다는 소리다.

주고받는 문자 메시지도 불어이다 보니 내가 이용하는 SNS 계정에서 남편은 당연히 내 팔로워도 내 이웃도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글이 주가 되는 블로그 같은 경우는 남편은 아예 내 계정 주소도 모른다. 이렇다 보니 얼마 전에 남편이 갑자기,

“나 네 Youtube에 댓글 썼는데 왜 답글 안 달아줘?”해서 깜짝 놀랐다.


Youtube라고 해야 음악 올리느라고 계정만 이용하는 수준인 데다 (그나마도 해외 IP라 그런지 글로벌 계정으로 되어있다), 음악 업로딩 용도로만 쓸 뿐 남편이 댓글을 쓸만한 클립이 없기 때문이다. 음악도 나랑은 취향이 아예 다른 사람이라 굳이 내 음악을 들으리라곤 생각을 안 했다.


“댓글을 남겼다고?… 어머 웬일?… 난 몰랐지. 답글, 당연히 달아줘야지. 어디 보자…”


하고 유튜브 계정을 들어갔는데 ‘무슨 댓글이 있다는 건지…?’


“무슨 댓글을 말하는 거야? 없는데?…” 하자,


“무슨 소리야, 내가 엄청 여러 개 남겼는데…”하더니


“자, 이거 봐봐…” 하면서 죽 스크롤해서 보여주는데…


놔 참… 그러면 그렇지… 아니, ‘Bravo!!!❮폭죽이모티콘❯’ 이렇게. 또는 ‘Congratulation!!!❮꼬갈모자 이모티콘❯’, ‘Superbe❮꼬깔모자 이모지콘❯’ 등 클립 하나마다 전부 이런 식으로 단어 하나씩 달아놓고선...


IMG_4857.JPG


어이가 없어서,


“이게 무슨 댓글이야!! 달랑 단어 하나 써놓고선… 놔 참” 했더니,


“단어는 글자 아니야?…1 음절짜리 글이지... 아, 여기 봐봐. 여기 문장도 썼어. 여기...”하면서 보여주는데, 이번엔

“I love this ❤️”,

“So beautiful” 같은 문장들을 클립 하나에 하나씩 달아놓았더라.


“아, 이게 뭐야… 축하 (Congratulation)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뭘 축하해(Congratulation), 축하하긴… 그리고... 이건 또 뭐야. So beautiful??... 이게 무슨 음악인데… 쿵작 버전 댄스곡에 무슨 'So beautiful' 이야. 듣기나 들어보고 댓글 단거야? 놔 참…”했더니,


“이 세상의 모든 음악은 아름다운 거야(So beautiful). 그런 기본적인 상식도 없이 무슨 곡을 만들어?…” (나 참... 말이나 못 하면 …)

“다른 사람한테는 이렇게 길게 답 달아주고 내건 왜 그냥 빈칸으로 답 없이 남겨놔? 나도 답글 써줘” 하는데…


“아, 이 분은 한글로 썼잖아. 그것도 음악 들어보고 성의 있게… 당신은 이게 뭐야, 성의 없이… 이런 1음절 단어에까지 내가 답글 달면 없어 보여. “ 했더니,


“내가 성의를 넣었는지 안 넣었는지 봤어? 그리고, 이 사람한테는 막 하트도 주고 했으면서… 나한테도 하트 달아줘. 빨리!” 하는데…


아, 나 참. 살다 살다…


“아, 싫어!! 답도 안 달고 하트도 안 줄 거야. 이게 뭐야, 성의 없이…”


“그럼 너도 1음절로 답하면 되잖아. 빨리 답 써줘… 아님 하트만 줘.”


“아, 싫어. 나 1음절짜리 답글 어떻게 쓰는지 몰라. 이 사람이 진짜… 뭐야, Bravo? … 이걸 댓글이라고 써 놓고선 지금 누구한테 답글을 쓰라고 땡깡을 피워, 피기는”


하고선 돌아섰는데, 조금 있다가 씩 웃으며 와서는


“고마워… 나 답글 받았다”하면서 내 휴대폰을 쓱 건네주더라.


화들짝 놀라서, “남의 폰으로 뭔 짓 한 거야…” 하고 봤더니, 자기가 쓴 1음절 댓글인지 단어인지 밑에다 “Thank you! 해 놓고는 옆에다 빨간 하트 이모티콘(♥️)을 답글로 붙여놓았길래, 빵 터졌다.

이내, 내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이거 이따가 내가 지울 거야"… 했더니,


“좋아. 그럼 글자는 지우고 대신 하트만 남겨놔” 하고는 슬그머니 사라지더라.


나 참, 그놈의 하트 … 그게 뭐라고… 기어이 하트 하나 붙여놓고는…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하트만 남겨놓으면 보는 사람이 더 요상하게 생각하지' 싶어서 그냥 앞에 Thank you를 붙이는 게 그나마 나을 것 같아서 안 지우고 남겨뒀다.


나중에 혼자서 찬찬히 1음절짜리 댓글 단 것들 살펴보다가, “I love this song”이라고 쓴 댓글에다가 “Me too. So thank you♥️”라고 달아줬다.


결국, 이중 언어고, 외국어고 몇 음절이고 뭐고는 중요치 않다.

상대방이 원하는 답을 해 주면 그게 최고의 답인 것이다.

그리고, 그가 받고 싶은 답은…

긴 글도, 한 문장도, 한 단어조차도 아닌… 그저 빨간 하트♥️였던 것이다!




말로 표현할 수 있었다면,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 Edward Hopper -






최상의 언어, 최고의 답을 만드는 밤.

2026년 3월 18일, From Zürich �~




오늘의 음악 : Carla Bruni – Stand By Your Man

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에서 말보다 눈빛으로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던 순간마다 흐르던 곡이다.

언어는 가끔 무력하다.

내가 쓴 수천 자의 문장보다, 남편이 끈질기게 요구한 그 빨간 하트 하나가 우리의 거리를 더 가깝게 좁히는 것처럼.

까를라 브루니의 나직한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깨닫게 된다.

관계를 지탱하는 건 화려한 수사가 아니라, 음악 한 줄이나 하트 하나 같은 '작은 신호'라는 것을.

그 짧은 신호 끝에, 우리가 차마 말로 다 하지 못한 생의 온갖 감정이 정직하게 담겨 있다.

https://youtu.be/sJq2YsoSHk0?si=a45PJNwQ85qSeVz8






매거진의 이전글사랑보다 뜨겁고, 지옥보다 끔찍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