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善意)가 비극이 되는 찰나의 순간
오늘 '온 세상'의 연재 〈책 읽어주는 여자〉는 조금 다르다.
제목도, 작가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단편 하나를 가져왔다.
거의 삼십 년 전쯤, 어딘가에서 읽었을 뿐 제목도, 작가도 그동안 여러 번 찾으려 했지만 끝내 발견하지 못한 이야기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이 이야기가 긴 세월 동안 한 번도 머릿속에서 사라진 적이 없는 건, 한창 예민한 시기에 마음에 새겨진 충격이 강했었기 때문이리라.
아마 1970년대쯤을 배경으로 한 단편이었을 것이다.
부엌에는 쥐가 들끓고, 부뚜막 한쪽에 밥이 남아 있던 시절.
젊은 청년인 주인공이 1인칭 시점으로 풀어가는 이 이야기는 아주 단순하게 시작한다
어느 날 오후, 이 시간쯤이면 늘 찾아오던 거지가 그날도 변함없이 양푼을 들고 찾아온다.
주인공 '나'는 손을 내저으며 문을 닫으려다 부엌을 떠올린다.
부뚜막 한쪽에 남아 있던 밥.
‘잘됐다’ 싶어 그 밥을 들고 나와 거지에게 건넨다.
거지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고맙다고 말하고 돌아간다.
그날 저녁, 외출했다 돌아온 어머니가 부엌에 들어서자마자 말한다.
“아이고, 이놈들. 드디어, 없앴다!.…
요 며칠 시커먼 쥐 한 놈이 하도 들락대길래 (찬밥에) 쥐약을 섞어 놨더니 그새 먹어버렸네. 잘 됐다.”
그가 건넨 밥이… 쥐약이었다!!!
미친 듯이 후다닥 거리로 뛰쳐나갔다.
낯익었던 길모퉁이에 사람들이 무언가를 둘러싸고 모여서 웅성대고 있다.
사람이 죽었다!!…
(소설의 마지막 한 줄에서 갑자기 3인칭 시점으로 화자가 바뀐다)
다음 날, 제3한강교 아래에서는 체크무늬 남방 상의와 회색 바지 차림의 한 젊은 남자의 시신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 이야기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고작 14살 남짓하던 내가 마지막 문장에 등장한 이 남자의 정체가, 쥐약이 섞인 밥을 건넨 그 젊은 청년이란 걸 깨닫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렸다.
마지막 문장이 암시한 화자의 죽음이 없었어도, (쥐약을 받아먹고) 죽은 거지의 이야기만으로도 어린 내겐 충분히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내내 물음표였던 한강 다리밑의 시신이 ‘쥐약이 섞인 밥을 건넨 청년’ 이란걸 깨달은 이후에도 이 단편이 나를 오래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여기에 있다.
이 이야기는 ‘선의’를 설명하지 않는다.
‘몰랐다’는 말도 변명이 되지 않는다.
좋은 마음으로 한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그 결과를 감당하는 방식까지 독자에게 넘겨버린다.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 어린 나는 단순히 무서웠다.
그리고, 스무 살 무렵에 떠오른 이 이야기는 ‘죄책감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지금 다시 떠올려보면 이건 ‘책임에 관한 이야기’처럼 읽힌다.
의도가 아니라 결과에 대한 책임.
그래서 이 이야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다르게 읽힌다.
나이가 들수록, 삶에서 ‘의도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일들’을 더 많이 겪을수록 이 짧은 스토리는 내 맘에서 점점 더 날카롭게 되살아난다.
이 작품이 잔인한 이유는 바로 여기 있다.
선의와 결과 사이에는 아무런 계약도 없다는 사실을 아무 말 없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작품은 묻지 않는다.
“왜 그랬는가”, “어쩔 수 없지 않았는가”
그저 한 장면을 놓고는 물러선다.
그리고 독자에게 그 이후를 맡긴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지점은, 적어도 주인공은 선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악의를 품지 않았고, 의도적으로 해를 가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좋은 선택’을 했다고 믿었을 것이다.
문을 닫을 수도 있었지만 열었고, 외면할 수도 있었지만 밥을 건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선한 선택은 한 사람을 죽였고, 결국 그 자신도 견디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 이야기가 잔인한 이유는 악한 사람이 벌을 받는 구조가 아니라, 선하게 행동한 사람이 끝내 살아남지 못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비극이라기보다, 선의가 실패한 뒤에도 세계가 아무 일 없다는 듯 굴러간다는 사실이 더 견디기 어렵다.
그 세계 안에서 선의는 보호받지 못하고, 책임만 남긴 채 고스란히 버려진다.
이 소설이 오래 남는 이유는 악의 때문이 아니라, 선의가 남기고 간 질문 때문이다.
모르고 한 선택은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는가.
선의는 결과 앞에서도 끝까지 선의로 남을 수 있는가.
우리는 종종 의도를 기준으로 자신을 판단한다.
나는 나쁜 마음이 아니었고,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었고,
그때는 정말 몰랐다고 말한다. 하지만 삶은 그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다.
소설 속 주인공에게도 변명의 언어는 주어지지 않는다.
설명할 기회도, 오해를 풀 시간도 없다.
남는 것은 오직 결과뿐이다.
그래서 이 짧은 이야기는 질문을 한 단계 더 밀어붙인다.
선의는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어야 하는가가 아니라, 책임을 감당할 수 없는 선의를 우리는 과연 선택해도 되는가라는 질문으로.
작품은 이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대신 독자를 그 질문 한가운데에 남겨둔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서 본 사람만이, 이 이야기가 왜 이렇게 오래 머무는지 알게 될 것 같다.
어떤 선택들은
사과로도, 설명으로도 끝나지 않는다.
세상이 묻지 않아서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고,
내가 설명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일이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이 이야기가 오래 남는 이유는
아무도 책임을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한 번 알아버린 뒤에는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존재할 수 없었던
한 사람의 자리가 비어 있을 뿐이다.
'면책권이 없는 선의를 베푼 적이 있었나?'... 생각해 본다.
2026년 3월 20일, From Zürich ~
이 곡은 결코 위로를 건네지 않는다.
대신 이미 쏟아진 물,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정면으로 응시하게 만든다.
건반이 휘몰아칠수록 감정은 고조되지만, 음악은 끝내 해답을 내어주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감당해야 할 책임의 무게만을 비장하게 각인시킬 뿐이다.
선의가 비극으로 끝난 뒤에도 남겨진 자는 살아가야 하기에, 이 글의 끝에는 섣부른 후회보다 '그 이후의 세계'를 견뎌내는 이 선율이 필요했다.
https://youtu.be/l4zkc7KEvYM?si=mPYw-z9bILCM6Ekg&t=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