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식한 어른, ‘요령’과 공존하기

곧이곧대로 정직하면 바보가 되는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법

by 온 세상이 내 편


이번 주말까지 완성해야 할 서평 하나를 두고 내내 끙끙대고 있다.

책은 아직 반도 못 읽었고, 데드라인은 다가온다.

이럴 때 흔히 떠오르는 선택지는 둘 중 하나다.

첫 째는 데드라인을 넘기더라도 다 읽고 정직하게 쓰기. 또는 읽은 데까지만 요령 있게 먼저 쓰고, 책은 마감 날짜에 상관없이 나중에 천천히 마저 읽기.


그 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나를 보다가, 이상하게도 초등학교 2학년 때 운동회 장면이 하나 딱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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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회에서 배운 이상한 진실

초등학교 2학년 운동회.

사다리 하나가 옆으로 길게 세워져 있고, 우리는 긴 고깔모자를 머리에 쓴 채 한 칸 한 칸을 통과해 결승선에 도착해야 했다.


내 옆에는 당시 가장 친했던 성희가 있었다.

성희는 어른들 사이에서도 늘 ‘영리한 아이’로 불렸다.

출발 신호가 울렸고 성희는 아주 자연스럽게, 아무렇지도 않게 고깔모자를 손으로 들어 사다리 칸 안으로 먼저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다음에 자기 머리를 통과시켰다.

솔직히 그 당시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떠올리지 않았다.

그냥 ‘규칙대로’ 고깔모자를 머리에 그대로 쓴 채로 몸을 구부리고 사다리칸 안으로 들이밀며 (고지식하게) 통과했다.

결과는 당연했다. 성희는 압도적으로 빨랐고 나는 느렸다.

그런데 진짜 충격은 그다음이었다. 집에 와서 엄마가 말했다.


“너도 참 요령이 없다. 성희 좀 봐. 얼마나 똑똑하게 통과하니.”


정직하게 했다는 이유로 ‘고지식하다’고 핀잔 들은 첫 장면이었다. 그때 마음 한 구석에서 이런 말이 떠올랐다.


‘내가 반칙을 안 한 게 잘못한 건가?’


나는 정직하게 규칙을 지켰는데… 왜 내가 고지식한 아이가 되는 걸까?

평생 잊히지 않은 질문이 그때 시작됐다.


우리는 무엇을 칭찬하고 있는가

살다 보면 세상이 칭찬하는 건 ‘과정’이 아니라 ‘결과’ 일 때가 많다.

누가 더 빨리 도착했는지, 누가 더 많이 성취했는지. 그 과정에서 얼마나 정직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때가 많다.

심지어 가장 가까운 사람조차 결과주의가 될 때가 있다.

세상은 생각보다 자주 어떻게 했는가 보다 얼마나 빨리 도착했는가를 본다.


이 패턴은 어른이 되고 나서도 계속 반복된다.

회사에서는 숫자를 만들면 과정이 좀 더러웠어도 능력 있다고 하고, 관계에서는 말을 잘 둘러대면 속은 별 진실이 없어도 다정하다고 하고, 경쟁에서는 취지를 무시해도 ‘성공’만 하면 박수를 받는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요령은 사회가 좋아하는 기술이고 정직은 스스로에게 책임지는 태도라는 걸.


이 고민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오래된 문학은 이미 이 질문을 수없이 다뤄왔다.


문학이 말하는 '요령과 정직'

1. 체호프 『카멜레온』 — 이익에 따라 색을 바꾸는 사람들

이 짧은 단편에서 시장 광장에 난리가 난다.

어떤 개가 장터 상인을 물었다며 사람들이 소리치고, 그 소란 속으로 경찰 감독 오츄멜로프가 나타난다.


처음 그는 개를 무조건 잡아가라고 호통을 친다.

그런데 누군가 “저 개, 부잣집 금세공사의 개인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순간, 그의 표정과 말투가 단번에 달라진다.


“이런, 불쌍한 개를 왜 괴롭히나!”


잠시 뒤 “그 집 개가 아니다”라는 얘기가 들리면 다시 태도가 바뀐다.


“당장 잡아가라!”


오츄멜로프에게 중요한 건 ‘진실’이 아니라 ‘누구에게 유리한가’였다.

체호프는 이런 인물을 통해 말한다.

요령이 지나치면 결국 사람은 자기 원칙 없이 상황에 따라 색을 바꾸는 존재가 된다는 것을.


요령은 빠르게 상황을 읽고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맞추는 기술이다.

하지만 그 끝에는 신뢰도, 존중도 없다.

세상은 이런 요령 있는 사람들을 편하게 여길지 몰라도 문학은 오래전부터 그들을 냉소적으로 기록해 왔다.


2. 톨스토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당장의 이익보다 무서운 '시간의 판결'

가난하지만 정직한 구두 수선공 시몬은 거리에서 떨고 있던 청년 미하일을 거둔다. 기술을 배우며 시몬의 조수가 된 미하일은 사실 신의 명을 어겨 인간 세상으로 유배 온 천사였다.


어느 날 오만하고 부유한 신사가 찾아와 1년 동안 절대로 모양이 변하지 않는 튼튼한 장화를 만들라고 호통을 친다.

요령 있는 장사치라면 일단 알겠다고 고개를 숙이며 비위를 맞췄겠지만, 진실을 마주한 천사 미하일은 신사의 등 뒤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본다.

미하일은 1년 뒤를 장담하는 장화 대신, 그날 밤 죽을 그를 위해 '장례용 슬리퍼'를 짓는다.

결국 신사는 그날 밤 죽었고, 장화 가죽은 죽은 자의 발에 신길 슬리퍼가 되었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주문과 다른 것을 만든 '실패'이자 '요령 없음'이겠지만, 죽음이라는 진실 앞에서 그것은 유일하게 정직한 선택이었다.

톨스토이가 말하고자 한 정직은 단순히 착하게 살라는 권유가 아니다.

눈앞의 '요령'은 1년 뒤를 장담하는 장화 같지만, '정직'은 인간이 결코 피할 수 없는 운명과 시간 앞에서 자신을 잃지 않는 최후의 보루라는 뜻이다.


3. 괴테 - 무너지지 않는 나를 만드는 최후의 기술

톨스토이가 말한 정직이 시간 앞에 부끄럽지 않은 '회귀'라면, 괴테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직을 실질적인 '존재의 동력'으로 정의한다.


요령은 기술이지만, 정직은 힘이다.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



괴테가 간파한 지점은 명확하다.

요령으로 순간을 모면하는 사람은 매번 새로운 가면을 준비하느라 기력을 다하지만, 정직한 사람은 에너지를 밖으로 낭비하지 않는다.

그 에너지는 고스란히 안으로 쌓여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는 단단한 '자기 주도권'이 된다.

결국 세상이 말하는 요령은 타인을 속이는 잔재주일 뿐이지만, 괴테가 말한 정직은 나 자신을 이겨내는 가장 강력한 무기인 셈이다.


어른이 되고 나서야 이해한 것

시간이 지나 보니 정직이 흘러가는 속도는 요령의 속도와 다르다.


요령은 빠르고, 정직은 느리다.

요령은 전략이고, 정직은 태도다.

요령은 남들이 칭찬하고, 정직은 내가 나에게 칭찬한다.


그렇게 어른이 되고 나서 지금에서야 터득한 사실은

요령 있는 사람은 결과로 판정받고, 정직한 사람은 살아온 시간으로 판정받는다.


-요령과 정직 사이에서-

요령은 세상을 빠르게 통과하는 기술이다.

사다리를 먼저 빠져나가는 방법이고,

남보다 먼저 도착하는 요령이다.

사람들은 그걸 “현명함”이라고 흔히 부른다.


하지만 요령이 길을 만든다면,

정직은 사람을 만든다.


정직은 느리고, 손해 같고, 바보 같아 보일 때도 많다.

어쩌면 나처럼 억울한 순간을 평생 기억하게도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직이 지키는 건 ‘순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인생의 많은 순간들은

사다리처럼 구조가 단순하지 않다.

누군가는 요령으로 빨리 지나가고,

누군가는 정직으로 오래 걸린다.

하지만

오래 걸린 사람에게만 보이는 길이 반드시 있다.


그리고 나는 이제 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요령을 배우는 게 아니라,

요령을 압도하는 기준을 갖는 일이라는 걸.


갈림길 앞에서

읽지도 않은 책으로 서평을 쓰는 건 분명 ‘요령’이다.

마감을 어기면서까지 끝까지 다 읽고 쓰는 건 ‘고지식함이다.

둘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밤새 톨스토이와 괴테를 인용하며 정직의 위대함을 설파하던 나는, 결국 마감 시간 1시간을 남겨두고 노트북 앞에 앉았다.


그리고 고백한다.

나는 결국 읽은 부분까지 만의 통찰을 마치 책 전체를 관통한 진리인 양 교묘하게 포장해 마감 시간을 지켰다.

정직은 내가 지향하는 삶의 방식이었지만, 마감은 내가 당장 생존해야 할 일하는 방식이었으니까.


모니터 너머로 전송된 서평을 보며 묘한 자괴감이 밀려온다.

나는 결국 고깔모자를 손으로 밀어 넣던 초등학생 성희와 다를 바 없는 어른이 된 건가. 아니면 이것 또한 세상과 공존하기 위해 내가 터득한 비겁한 ‘운용법’인 걸까.

하지만 이 비겁한 타협조차 기록하는 이유는, 적어도 내가 지금 ‘요령’을 부리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스스로에게 정직하게 시인하고 싶어서다.


완벽한 정직은 고립을 부르고, 완벽한 요령은 영혼을 갉아먹는다.


그 사이 어디쯤에서 비틀거리며 왈츠를 추는 것.

그것이 내가 선택한, 아니 내가 어쩔 수 없이 살아내고 있는 '고지식한 어른의 요령'일지도 모르겠다.




고지식한 어른이 요령 앞에 타협한 밤

2026년 3월 24일, From Zürich *⁀➷♥





오늘의 선곡 — La Valse de Paul(폴의 왈츠) -Attila Marcel OST

이번 글의 결, 그리고 마음속 오래된 질문을 떠올릴 때 이 곡의 음색이 자연스럽게 겹쳐졌다.

La Valse de Paul은 프랑스 영화 Attila Marcel의 삽입곡으로, 왈츠 리듬 위로 부드럽고 섬세한 피아노 선율이 흐른다.

왈츠는 원래 춤의 형식이지만, 이 곡에서는 기억을 천천히 되짚고 오래 생각하는 마음처럼 들린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템포. 요령 있게 앞서가지도, 그렇다고 정직하게 멈춰 서지도 못하는 내 마음의 속도와 묘하게 닮아 있다.

La Valse de Paul,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는 왈츠의 리듬처럼, 요령을 부리다가도 결국 '나'라는 정직으로 돌아오고 마는 당신과 나의 밤에 이 곡을 남긴다

https://youtu.be/oPQE__tlrBM?si=kmqjewWB5oXo-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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