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이라는 숙명 vs 기록이라는 생존

치워버려야 끝나는 일상과 버리지 못해 남겨진 기록 사이

by 온 세상이 내 편


쓸 것 없는 하루의 쓸 기록

살림을 하는 성실한 주부이건, 살림은 저 멀리 밀쳐둔 날라리 주부이건 저녁 즈음에 하는 생각은 십중팔구 같을 것이다.


‘오늘은 뭐 해 먹지?…’


1년 365일 먹는 삼시세끼, 매일 몇 십 년을 해 왔으니, 레퍼토리도 뻔하고, 솜씨도 뻔하고, 손만 바쁘고 내가 한 건, 뭘 해도 그다지 맛이 없다. 그나마도 망치지 않은 날은 그다지 맛이 없는 거고 망친 날은 하루 기분까지 망친다.


얼마나 되었을까... 글을 쓰고부터는 저녁만 되면 같은 고민을 하니, 바로


‘오늘은 뭘 쓰지?…’


기록이 아닌 ‘글쓰기’이다 보니, 짧더라도 ‘소재’가 필요하고 펼쳐야 글이 된다.

그리고 보니, 일기와 삼시 세끼는 참 닮은 점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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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와 삼시 세 끼의 같은 점

▪︎ 매일 해야 한다.

▪︎ 안 하면 마음 한구석이 괜히 찝찝하다.

▪︎ 대단한 걸 하지 않아도 되는데, 막상 하려면 유난히 귀찮다.

▪︎ 레퍼토리는 늘 거기서 거기다.

▪︎ 성의를 들여도 별 표도 없고, 알아주는 사람은 많지 않다.

▪︎ 대충 하면, 그건 또 티가 난다.

▪︎ 먹을 게 없어도 일단 칼을 들면, 어떻게든 한 끼가 만들어진다./ 쓸 게 없어도 일단 펜을 들면, 생각보다 많은 말이 흘러나온다.


그래서 저녁마다,


‘오늘은 뭐 해 먹지…’와 ‘오늘은 뭐 쓰지…’가 거의 같은 고민처럼 따라온다


그런데 또, 둘 사이에는 생각보다 분명한 차이가 있다.


삼시 세 끼 VS 일기

▪︎ 먹고 나면 치워야 한다. vs 쓰고 나면 치울 게 없다.

▪︎ 설거지를 하고, 흔적을 없애야 하루가 끝난다. vs 쓰고 나면 그대로 남는다.

▪︎ 맛이 없으면, 기억에서 빨리 지우고 싶어진다. vs 엉망이어도, 재미없어도, 특별한 일이 없어도 남는다


그래서 밥은 망치면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날이 되지만, 글은 망쳐도 그날의 내가 통째로 기록된 것 같아 이상하게 버리지 못한다.

어쩌면 일기는 잘 차린 한 끼라기보다는 매일 먹는 집밥에 더 가깝다.

맛있어서가 아니라, 살아 있었음을 확인하는 일.


IMG_5262.JPG 변치 않는 입맛의 한국 밥상, 변하는 주거지, 변하는 계절. 내 글들은 그 사이 어디쯤 있을까...


그래서 오늘도

쓸 게 없는 하루지만

쓸 기록은 남기기로 한다.


잘 차린 삼시 세 끼는 아니었지만,

대신 단정한 일기 한 장은 남겼다.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모를 밥상이

나의 '숙명'이라면,

오직 나를 위해 남기는 이 문장은

나의 '생존'이다.






삼시 세 끼는 먹어 없애고, 기록만 남긴 날.

2026년 3월 25일, From Zürich *⁀➷♥






� 오늘의 음악 : Dans ton souvenir (너의 기억 속에서)

제목부터 의미하는 것은 ‘너의 기억 속에서’.

기억이라는 말처럼 이 노래는 흘러간 순간과 남은 흔적의 사이를 포착한다.

일기와 삼시 세 끼의 비교처럼 ‘쓰고 나면 남는다’는 점에 주목한 이 글의 결과 이 곡의 정서는 맞아 떨어 지기에 삽입해 본다.


일기는 남는다. 그 남겨진 ‘기억’은 한때의 고민과 선택을 그대로 품고 있다.

이 노래는 바로 그런 마음을 담는다 —지우지 않고 남겨둘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그것이 지나간 뒤에도 우리의 기억 안에 살아남는다는 것.

https://youtu.be/m3qWeT2qIFg?is=1oExavfRE6KZmB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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