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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수 Jun 17. 2018

나 미국 가요.

근데 왜 안 설렐까요. 

 내일모레면 딸아이를 데리고 친정부모님과 함께 미국에 간다.
 사실은 진작부터 신랑이 내게 딸아이를 데리고 미국 가 자리 잡아 있는 남동생 집에 다녀오라고 여러 번 설득을 하긴 했었다. 학원 다 때려치우고 방황하는 딸아이에게 영어 쓰는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오라고, 그러면 아이가 스스로 공부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달라지리라는 기대와 함께 말이다. 사회생활 온통 외국어에 대한 스트레스를 느끼고 사는 신랑은 본인이 어릴 적 좀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더라면 다르게 살아왔을 것 같다며 오로지 딸아이를 위한 목적으로써의 여행의 권유였다.
 신랑도 없이 영어도 못하는 내가 아이만 데리고 미국이라는 나라에 가는 것도 두려웠지만, 무엇보다도 올케에게 시댁 식구인 내가 여러 날 동생 네 집에 가 머무르는 게 영 부담스럽게 느껴졌었다. 올케와 동생은 식구들 모두 다녀가시라고 여러 번 말을 하곤 했었지만 부모님 가셔서 여러 날씩 머무르시는 것도 짧게 있다 오시라고, 며느리 힘들다고 말리곤 했었다.

 이미 6월 초에 동생 네에 다녀오시기로 계획을 다 짜두셨던 친정부모님은 위와 같은 둘째 사위의 바람을 듣고서는 얼씨구나 하며 돌연 본인들이 계획하셨던 스케줄을 모두 취소하셨다. 언니네와 우리 식구들을 모두 데리고 같이 가자며 반협박을 하시기 시작했는데 좋아라 했던 언니는 오히려 못 가게 되고 한참 망설이던 내가 오히려 아버지의 설득에 넘어가 얼떨결에 여행을 가게 된 것이다.
 알아두신 여행사에 새로운 비행기를 알아보시고, 여행상품도 알아보시고서는 날짜를 내 딸아이에 맞추어 조정해 주셨다. 약간의 페널티도 물으신 것 같은데 얼마인지 여쭤봐도 상관없다며 기꺼이 새로운 일정으로 여행을 가자며 좋아하셨다.

 한참 알바를 하는 중이었던 나는 얼결에 여행사에 카드번호를 알려주며 결재를 하게 되었고 알바 끝나고 일주일 뒤 2주간의 여행 일정이 생겨버렸다. 알바가 끝나고 부랴부랴 여행사에 다시 전화해 상품에 대해 물어보고, 추가 결제금액을 보냈으며 아이 학교 담임선생님께도 보고를 드리고 교장선생님께 체험학습 신청서를 보냈다. 패키지여행기간 일주일 외 동생 네 집에 머물 일주일을 위해 일부러 아이 이름과 내 이름으로 각각 환전을 하며 여행자 보험도 추가로 들었다.(은행에서 300불 이상 환전하면 여행자보험을 들어준다. 인터넷으로 뭔가 신청하면 환율우대까지 받을 수 있는데 앱을 깔아야 해서 우대는 포기해버렸다) 
 여행비자를 신청하기 위해 ESTA 사이트에 들어가 승인도 받아두고, 한 부모만 동행할 때 필요하다는 동반하지 않는 부모의 허가서도 다운로드해 신랑에게 쓰게 하고 사인도 받아 여러 장 챙겼다. 이티켓도 출력해두고 여행사에서 보내준 스케줄표도 출력해두었다. 유심칩을 두 개 사서 준비해 두었고 그걸 미국 도착해서 핸드폰에 갈아 끼우면 된다고 하길래 와이파이 도시락인지 뭔지는 알아보지도 않았다.
 영문으로 된 가족 확인서도 필요하다길래 동사무소 가서 두 장 뽑아오고, 굴러다니는 선크림도 챙겨두고 슬리퍼도 찾아놨다.


 처음 신랑에게 환전을 부탁하니 현찰이 뭐 필요하겠어 하며 몇 백 불 얘기를 하길래, 동생 좀 챙겨주고 오려면 돈이 넉넉하게 있어야 할 텐데 싶어 신랑 몰래 따로 가서 환전도 해 두었다. 며칠 뒤 생각보다 넉넉하게 환전을 해서 내게 건네던 신랑은 갖고 싶은 가방이 있다며 나를 데리고 면세점에 갔다.
 면세점에 별 관심이 없는 나와 달리 신랑은 명품 시계점에도 들어가 기웃거리고, 양복에 매고 다닐법한 배낭도 둘러보며 설레어했다. 그래서 뭐가 갖고 싶은 거냐 물었더니 부지런히 인터넷 검색을 해서 내게 가격비교를 해 보였다. 그러니까 똑같은 물건이 면세점에서 50만 원이면 인터넷으로 24만 원이면 살 수 있다며 이거봐이거봐 똑같지 하더니 24만 원보다 더 싸게 팔면 그걸 미국 마트에 가서 사 오라며 사진을 찍어 보내주었다. 미국마트에 가면 온갖 메이커 제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을 거라며 두 눈을 반짝이는데 이 사람을 미국으로 보내주고 싶은 마음에 울컥했다.

 부모님과 일주일 패키지 상품으로 여행을 한 뒤 비행기를 갈아타고 동생 네로 가야 한다. 동생에게는 딸 두 명이 있는데 이 조카들을 본지 벌써 1년이 훌쩍 넘어 아이들이 얼마나 자라 있을지 가늠이 어려웠다. 하루는 조카들 선물을 사러 나갔다가 도저히 결정을 하지 못하고, 이것저것 사진을 찍어 동생에게 카톡을 보냈다. 맘에 드는 걸 올케한테 골라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옷도 많고 인형도 많으니 차라리 아이들 선글라스가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시원하게 다른 선물들을 포기하고 아이들 눈에 괜찮을 선글라스를 좀 좋은 걸 골라 챙겨두었다.
 가서 마트 가면 내가 대신 결제도 하고 해야지 싶으면서도 그래도 빈손으로 가기는 뭐 해서 뭔가 좀 더 선물로 들고 갈 것들을 생각해봤으나 건어물 등 이것저것 들고 갈 수 없는 품목들이 많고 예민해서 그냥 돈을 좀 주고 오기로 하고 맘을 접었다.

 여행을 위해 책도 한 권 사두었는데 이게 영 읽히질 않는다. 벌써 여러 날 굴러다니고만 있다. 
 아르바이트 끝나는 날도 여행 잘 다녀오라며 여행 다녀오면 한번 만나자는 언니들에게도 설레지 않아 큰일이라고만 했었다. 오히려 알바가 끝나는 게 더 아쉽고 일주일 뒤 떠나야 하는 여행에 대해서는 내키지 않는 일을 처리해야 하는 것 같은 부담감마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올케에게 부담스러울까 그것도 그렇고. 
 미국이라는 나라에 한 번도 가 보질 못했던 내게 이번 여행이 왜 설레질 않는 건가 생각해보면. 신랑이라는 만만이가 없어서 그런 건지. 내키지 않았던 여행을 등 떠밀려 가는 느낌이라 그런 건지. 자그마치 내가 벌어온 알바 월급의 몇 배가 깨지는 거라 그게 그런 건지 도저히 갈피가 잡히진 않지만. 어쨌든 나는 아이를 데리고 이제 여행을 떠나야 한다.

 가방부터 싸라며 여행가방 두 개를 진작에 꺼내놓았던 신랑은 매일매일 퇴근 때마다 오늘은 가방 쌌어?를 퇴근인사처럼 내게 물어왔다. 아니. 아직. 다 싸 두면 나 뭐 입고 돌아다니라고. 만 반복하다 오늘 드디어 가방을 열어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챙겼다.
 지난번 서촌에 갔다가 좋아하는 옷 가게에 들려 사온 아이 원피스와 티셔츠도 종류별로 다 담고. 내 옷도 있는 거 없는 거 다 개켜 차곡차곡 쌓았는데 결정적으로 내 유일한 모자는 실종 상태이고 선글라스는 원래 없다. 반바지도 없고, 샌들도 없다. 여행 가면 많이들 둘러매고 다니는 여행용 가방도 없고 수영복도 없다. (수영복은 30년째 없다. 실은.) 양산도 없고 핸드폰도 마침 배터리가 맛이 가고 있는 중이다.
 필요한 것들을 사겠다고 이리저리 돌아다녀 보기도 했는데 원래 물건이 필요해서 찾아보면 맘에 딱 드는 게 잘 안 나타나는 법이라 매번 빈손으로 들어와 이제는 아예 다 포기해버렸다. 정 필요하면 여행 가서 사지 뭐 하며 모자만 엄마 걸 하나 빌리기로 했다.

 긴긴 시간 동안 집을 비운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세탁기를 계속 돌리게 된다. 이불도 꺼내 다 빨아놓고, 건조기는 종일 윙윙 돌아가고 있다. 대청소를 하고 냉장고 야채도 싹 먹어치우거나 좀 상할 것 같은 것들은 정리해버렸다. 신랑 혼자 있을 때 먹으라고 CJ 미역국을 5개나 사두었었는데 요 며칠 밥하기가 싫어 꺼내 먹었더니 햇반과 함께 싹 다 사라졌다. 커피도 한통 남았고 라면도 없는데 뭐 알아서 먹겠지 싶어 주문도 미룬다. 뜬금없이 무선 청소기도 충전을 해 두었는데 설마 나 없는 사이 저 사람이 청소기 돌릴 일이 있을까 싶지만. 어쩌다 맘먹고 청소기를 딱 잡았는데 전원이 안 켜지네 하며 덜렁 던져버릴까 싶어 온갖 청소기, 물걸레기 까지 다 충전해 두었다.
 정리하다 보니 아이 겨울 교복이 또 맘에 걸려 세탁소에 맡기려다 그건 미뤄버렸다. 그걸 또 언제 찾아오나 걱정하느니 다녀와서 정리하자 싶다. 

 사실 가장 맘에 걸리는 건 서방님 제사일이다. 하필 이번 제사일이 여행 마지막 날짜와 겹쳐 시골에 내려가지 못하게 되었는데 동서에겐 카톡으로 사정을 말하니 괜찮으니 잘 다녀오라고만 한다. 조카 전해줄 만화책을 열두 권 골라놓고 신랑에게 시골 가는 길에 이건 꼭 챙겨가라고 신신당부를 해 두었다. 조카가 시험기간인데 끝나면 이걸 전달해주겠다고 동서가 약속을 해두었다고 했다. 
 회사 손님 만나 낮술에 얼큰하게 취한 신랑이 내게 전화해 시부모님께 가기 전에 전화 한 통 드리라며 자기 소원이라고 했지만 싫다고 했다. 평소에 전화 한 통 드리지 않는 내가 여행 간다며 죄송스럽다는 투로 허락이라도 구하겠다며 전화를 거는 건 딱 거짓말이다. 나는 혹시 나 없는 사이, 나 없는 걸 아신 그분들이 말도 없이 내 집에 들어와 며칠씩 머무르다 가실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이미 일기장과 글 쓴 노트들을 둘둘 싸서 테이핑 해 숨겨두었고 통장들도 정리해 감춰둔 상태다. 내 시어머니는 나 없는 집에 들어와 옷장이며 신발장, 속옷 서랍, 부엌살림까지 싹 다 열어보고 뒤적거리는 분이셨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번에도 나 없는 사이 이 집에 오시면 어떡하지.. 가 솔직한 심정이다.
 여행을 가서 시부모님 좋아하시는 메이커 옷도 사 오고 이것저것 선물을 사 올 계획이긴 하지만 맘에 없는 전화를 드리고 싶지는 않다. 그건 내 솔직한 심정이고 나는 아직 그분들이 무섭고 두렵다. 곁에 틈을 주면 파고들어 또 어떤 요구들을 내게 하실지 두렵고, 나는 아직 고만큼의 아량밖에는 없는 나약한 인간이다. 

 이리저리 어째 심란하기만 한 이 여행에 대해 자꾸 기대를 가져 보려 하는데 자꾸 머릿속에 머무는 생각은. 아 그 돈이면 내가 알바를 얼마나 해야 하고. 그 돈이면 내 책이 몇백 권이고. 그 돈이면. 그 돈이면. 그 돈이면.

 미국 가면 너무 좋지. 하며 항상 멀리 나가 살고 싶다는 언니 앞에서. 나는 한국이 좋은데. 외국 가면 서점도 없고 말도 안 통하고. 나는 운전도 못하는데. 아. 모르겠어..라고 얘기하면서도. 이건 내가 외국에서 안 살아봐서 우물 안 개구리처럼 생각하는 게 아닐까. 그래서 울 아이도 개구리처럼 살면 어쩌지. 나는 왜 이리 겁이 많지. 자책을 했었는데. 
 나는 정녕 미국이라는 나라에 별 흥미가 없는 여자였나 보다. 
 유럽 배낭여행도 두 번이나 갔었고 일본에는 갈 때마다 좋았는데. 하물며 제주도에 갈 때도 너무 행복했는데. 나 너무 촌스럽게도 미국이라는 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손톱만큼도 설렘이 없다.
 아. 그 돈이면. 
 그 돈이면..

 신랑은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미국에 딸과 와이프를 보내준다며 꽤 생색을 내고 싶은 눈치인데 내가 영 파이팅이 되질 않으니 좀 섭섭한 눈치다. 하루에도 몇 번씩 "누구는 좋겠네. 미국에도 가고."라든지. "마이너스 통장 왕창 내려앉은 거 봐라. 내는 언제 미국 한번 가보겠노."라며 운을 떼는데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콧노래를 불러주어도 모자랄 마누라가 만만이 없이 가니 불편하겠다는 둥 노예 타령을 해대자 조용히 파파고 앱을 깔아주었다. 그거 있으면 다 된다고. 만만이 없어도.

 솔직히 말하자면 '여행영어'라는 조그만 책을 하나 샀는데 첫 장에 적힌 문장.
 Water, please. 워러 플리이즈.
 이거 어쩌나. 너무 한 거 아닌가. 나 중학교 졸업장도 있는 사람인데.
 근데 문제는 이 책에 있는 대부분의 문장을 해석할 수는 있는데 나보고 직접 말을 해보라고 하면 한 문장도 입에서 떨어지질 않는다는 것이다. 이거 또 오랜만에 생존 영어 한답시고 손짓 발짓하며 아이 앞에서 뻘짓하게 생겼다.
 오케이. 연습하리다. 
 워러 플리이즈.
 웨어 캐나이 바이 잇.
 아 데이 해빙 어 세일?
 엣 왓 타임 슈다이 체크인? ...

 그들이 내 말을 알아들을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소리 높여 영어 연습을 하고 있다. 정말 너무 당연한데 각자 본인들에게 헷갈리는 단어 몇 개쯤 있지 않나. 나는 디파~쳐. 이게 자꾸 출발인지 도착인지 헷갈려.
 영어 잘 하시는 울 아버지도 어쩐지 레프트, 라잇트가 헷갈린다고 하시고.
 또 가끔 사우쓰 코리아, 노쓰 코리아를 거꾸로 말할 때가 있다고 했더니 딸아이가 꿈쩍 놀라면서 그건 좀 심각한데 한다. 그러니까 네가 좀 가서 영어 좀 해보라고. 엄마 노쓰 코리아 하면 어디로 끌려갈지도 모른다고.

 얼마 전 신랑이 술에 취해 늦게 들어오는 와중에도 싱글벙글 웃으며 아이방을 두드리며 "아빠가 선물사왔다~"를 외치며 아이방에 들어가 뭔가를 내밀었었다. 언젠가 산 적이 있었던 거 같은데.. 하는 물건. 셀카봉이었는데 이건 한껏 업그레이드되어서 삼각대처럼 생긴 발로 카메라를 세울 수도 있고 버튼도 훨씬 부드럽다고 했다. 아이는 또 방방 뛰며 좋아라 했는데 고 틈새를 놓치지 않고 신랑은 아이에게 뽀뽀 한번 받은 뒤 어찌나 뿌듯해하던지. 
 사진 많이 찍어와.. 어리바리한 엄마 잘 챙기고. 하며 어쩐지 눈물이 그렁그렁 했던 거 같은데 그건 내 착각이었겠지.
 
 어이 신랑. 어찌 됐든 고마워. 잘 다녀올게.
 메이커 옷이랑 혹시 가방도 사 올지 몰라. 
 나 없다고 너무 좋아하지 말고. 열심히 일하면서 집 잘 지키고 기다리구 있어. 
 다녀와 바짝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겠지만 뭐 이번 여행까지는 흥청망청해보자고.
 이게 다 아이를 위한 거니까. 그지.


 그래. 비행기를 타면 설레기 시작하겠지.
 기대해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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