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일상.
머리를 짧게 자르고 돌아왔다.
간만에 팔 책들을 가방에 넣어 나갔던 길이였지만 30분 대기시간을 거쳐 유난히 정성스럽게 머리를 잘라주시는 선생님을 만나 시간이 좀 오래 걸려 알라딘에 가야 될까 먹을걸 사들고 집에 가야 할까 고민을 하던 찰나. 딸아이가 잽싸게 문자를 보내왔다.
"언제 와."
배는 고프지만 날 따라나서기는 귀찮다며 액괴를 주물러대던 딸아이는 그 새 친구들과 약속이 생겼으니 먹을 걸 사들고 빨리 귀가하라고 재촉을 해댔다.
그래 뭐. 책이야 내일 들고나가서 팔지. 뭘 사갈까. 요즘 초밥이 땡기던데 마침 미용실 옆에 초밥집이 있네.. 아. 쉬는 시간이시구나. 그럼 다음에 오겠습니다.. 충무김밥 1인분. 맛있는 빵집에서 맛있는 빵 여러 개. 그리고 그 빵집에서 처음 보는 미니피자도 한 판.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햇빛이 눈이 부셨다. 아. 날이 좋구나. 바람도 불고. 뜨겁지만 좋다. 먹을 걸 잔뜩 사들고 집에 도착하면 아이는 환호성을 지르며 이걸 다 먹어치우겠지. 그럼 난 한숨 자고 일어나서 책을 좀 봐야지. 요즘 일하느라고 책 읽을 여유가 없었다.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요즘 일하는 곳은 명동 근처라 일을 하다 점심을 먹으러 건물에서 나오면 거리 모든 곳이 식당이다. 지난번 일할 때와 달리 관광객들도 많이 보이고 사람들이 많아지니 거리가 훨씬 활기차다. 매일 다른 곳에 들어가도 새로운 메뉴가 넘쳐나고 점심시간도 한 시간 반이라 시간적 여유도 있어서 꼭 음료 한 잔씩을 들고 거리를 돌아다니게 된다.
근처에 있는 명동성당에도 종종 들르곤 했었는데 일하다 처음으로 명동성당에 들른 날이 하필 배우 안성기님의 아드님 결혼식이라 눈앞에 떡 하니 웃고 있는 지진희, 현빈, 한석규, 유해진 등을 보며 꺅꺅거리며 구경을 하기도 했다. 계 탄 기분으로 사진을 마구 찍으시는 옆 언니들을 위해 마시고 있던 커피를 들고 있느라 막상 난 한 장도 찍진 못했지만.
여러 배우님들보다 안성기 배우의 아드님들이 더 잘생겼구나 하고 느꼈는데 나만 그렇게 느낀 건 아니고. 다른 이들도 그리 수군대는 게 들려왔다. 이때 누군가의 "젊어서 그래. 젊은 게 제일 싱그러운 거지."라는 말에 일제히 다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끝까지 자리를 지키다 점심 종료시간 5분 전에 냅다 뛰다시피해서 돌아왔는데 그 이후 정우성이 나타나 질서를 지키며 사진을 찍던 이들의 라인이 단번에 무너졌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하고 가슴을 쳤다.
지난 주말엔 연달아 일이 있어 청소를 해 두지 못했었고 제대로 쉬지를 못해서 이번 주 초에 살짝 피곤했다. 역시나 알바래도 일을 하고 돌아오면 빨래정도는 돌릴지언정 걸레질까지는 무리인지라 어디 그래 주말만 되어봐라 내 깔끔하게 청소를 해주마 하고 벼르고만 있었다. 드디어 벼르던 주말이 되었고 나는 토요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미역국에 밥을 말아 야무지게 먹고 일단 화장실에 세재부터 쫙쫙 뿌려두었다.
아 참. 내 인생에 극적인 일이 지난주에 하나 있었는데 그건 건조기를 사들인 일이다. 같이 일하는 언니들 중 가장 고참 언니가 어찌나 건조기를 칭찬하시는지 마침 비가 죽죽 와서 빨래가 마르지 않고 쉰내가 풀풀 거려 짜증이 나던 시기와 딱 맞붙어 나는 혼자 가서 설명 10분 듣고 시원하게 건조기를 지르고 왔다.
건조기는 듣던 대로 어찌나 기특한 녀석인지 10년 된 수건이 보송보송 새 수건처럼 변하고, 쉰내 따윈 살균작용으로 아예 무균처리해서 새 상품을 턱하니 내놓는 느낌마저 들게 했다. 쉰내에 예민해서 평소 내가 코를 처박고 킁킁대도 못 맡는 수준의 옷에서도 귀신같이 쉰내를 알아내던 신랑이 너무나 만족하시어 뚝하면 빨래를 돌려 건조기에다 집어넣는 취미마저 생겼다. 딸아이도 덩달아 좋아하니 뭐 이만하면 사길 잘 했구나 싶다.
오늘도 청소전에 돌려두었던 빨래를 끄집어내어 건조기에 돌려놓고.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을 하고. 설거지도 하고. 세재 뿌려둔 화장실 청소까지 하다 보니 오전이 후딱 지나있었고. 그 이후로도 건조기는 세 번쯤 더 돌리고 말끔하게 씻고 나와 책을 들고 머리를 자르러 나간 거였다.
날은 화창하고. 집은 말끔하고. 딸아이는 예상대로 음식을 싹 먹어치우고 친구와 볼 일을 보고 살게 있다며 내 지갑에서 3만 원을 꺼내 나갔다. 학교에서 뮤지컬 공연을 하는데 팀끼리 각본도 짜고 노래도 만들고 분장하고 연기에 노래까지 직접 한다며 본인은 분장 도구를 구하기로 했단다. 아. 도대체 요즘 애들은 학교에서 뮤지컬을 배운단 말인가.
신랑은 아침 일찍 야유회에 간다며 못 보던 티를 입고 나를 깨우며 커피를 타서 싸달라고 했었다. 새벽까지 영화 프리다를 보다 늦게 잤지만 그래도 주섬주섬 일어나 커피를 타려다가 "못 보던 티..?" 하고 물으니 수줍게 인터넷에서 샀다고 한다. 지난번 알바 때 월급을 타서 양복을 사줬더니 셔츠는 인터넷으로 본인이 주문하겠다고 하며 왕창 지르고 왕창 실패한 경험 이후로 어찌된 일인지 오히려 인터넷쇼핑에 취미를 붙여 나 몰래 이것저것 소소한 것들을 주문해서 회사로 받는 눈치다. 실패한 셔츠를 왕창 갖다 버리며 다시는 인터넷으로 옷을 사지 말라고 잔소리를 해댔더니 회사로 물건을 받는 건지. 신랑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가성비인데 암만 좋은 거래도 가격이 너무 비싸면 좋은 물건을 사도 기분이 좋질 않단다.
"이번 티는 이쁜데? 색이 완전 이쁜데. 간만에 좀 세련된 거 골랐네." 했더니 완전 기분 좋은 얼굴로 이거 진짜 폴로티인데 4만 원 대라며 엄청 뿌듯해했다. 그래그래. 뭐 즐거우면 됐지. 폴로가 진짜든 가짜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 그지.
"근데 요즘 왜 자꾸 그리 멋을 내.. 딸내미 이것저것 옷 사달라고 하고 틴트 바르고 다니며 외모에 신경 팍팍 쓰던데.. 딱 딸내미 사춘기 하는 행동을 하고."
새 양복도 어찌나 좋아하고, 끝내 다시 남성복 코너에 가서 사온 새 와이셔츠도 어찌나 정성스럽게 다려대는지. 어. 당신 좀 바람난 것 같다.
같이 일하는 언니들에게도 우리 신랑은 매일 늦어요. 매일 술 먹구요. 주말에도 나가요. 이젠 뭐 각자 생활하며 그러려니 해요. 간첩이거나 두 집 살림하거나 둘 중 하나인 것 같아요 했다.
바람도 돈이 있어야 되는 거라길래. 돈 없는데 바람피우면 정말 진정한 사랑이겠네요. 내가 양보해야지 했다. 이 좋은 봄날에 바람도 살랑살랑 불고 새 옷도 사고 가슴 벌렁거릴 연애를 하며 한껏 행복해진다면 얼마나 세상이 아름다울까. 내가 모르는 선에선 그래 니가 행복하다면 나도 괜찮지 않을까 쓸데없는 수긍을 한다. 그래. 난 이만큼이나 널 사랑하고 있는지도 몰라. 사랑해도 사랑하지 않아도 난 널 사랑한다고 믿고 있으마. 부디 월급은 꼬박꼬박 내게 보내고 넌 너대로 난 나대로 행복하자꾸나. (실제로 그가 어떤 상태인지 저는 모릅니다. 근데 뭐 막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저 행복하길 바랍니다)
지난 주말엔 근사한 경험을 했었는데 그걸 글로 풀어내려니 몇 가지 맘에 걸리는 일이 있어 망설이고 있다. 뿌듯하고 행복한 경험이었어서 아마도 또 누가 말리더라도 주절대며 자랑하고 말겠지만.
오늘은 또 책을 읽다 문득 내가 학창시절에 이건 정말 전교에서 내가 제일 잘했다!고 할 만한 걸 기억해 냈는데 혼자 어찌나 뿌듯하던지 자존감이 막 어깨위로 솟아올랐다.
오늘은 뭐 너무 좀 들뜬 분위기라 이다음에 분위기 좀 다운시켜서 겸손한 마음이 될 때쯤이나 좀 우울해서 자존감 막 떨어질 때쯤 다시 시도해 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