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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수 Jul 25. 2018

무서운 이야기

이 와중에 에어컨이

 에어컨이 사망했다.
 10년도 훌쩍 넘은 저 에어컨에 기대어 그래도 여름이 되면 온 식구가 마루에 옹기종기 모여 티브이도 보고 책도 읽고 밥도 먹고 잠도 잤었다. 순식간에 공기를 차갑게 하는 능력이야 좀 떨어지긴 했지만. 틀어놓으면 거실 한곳만 좀 냉랭해지는 정도이고 방문은 열어놔봤자 그 안까지 냉기가 미치진 못했다. 방문을 닫아놓고 틀거나. 방문을 열어놓을 때는 제습 기능만 좀 받는 정도의 기대치의 에어컨.

 어제부터 갑자기 더운 바람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좀 지나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나오곤 했는데 한참을 틀어도 뜨뜻미지근한 바람. 아. 당황. 우짜지.
 실외기 쪽에 가보니 반응이 없다. 멈췄다.
 술 먹고 늦게 들어온 신랑은 샤워하고 마루에 벌렁 누웠다가 "왜 이리 더워?" 하길래 에어컨이 맛이 갔다고 알려주었다. 가뜩이나 더위를 많이 타는 사람이 술까지 먹고 벌겋게 드러누워 있으니 보는 사람마저 더 덥게 느껴져 선풍기를 들고 안방으로 피신했다.

 동네 엄마들 커뮤니티 방에 들어가 조회를 해보니 에어컨 고치자고 신고를 하면 빨라도 일주일이 지나야 기사분이 오신다고 했다. 혹시 사볼까 싶어 매장에 가보면 배달되는데 3주 정도가 걸린다 하니 그 정도 시간이면 입추가 지날 시간인데다가 이제 내년 초면 전세도 만기인데 또 어디로 쫓겨날지도 모르는 상황에 돈을 들여 설치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닌지라.
 한마디로 망한 거다. 더워도 너무 더워 에어컨을 주구장창 키고 살았는데 이를 우짜지.

 오늘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아이도 짜증, 애비도 짜증, 나도 짜증이 나서 이거 정말 큰일 났구나 실감이 났다. 회사에 나가야 하는 신랑은 긴팔 와이셔츠를 입고 주룩주룩 땀을 흘리고 있어 딱해 보였다. 그래도 어쩌랴. 돈을 벌어오시게. 이 집안의 유일한 돈줄이라네.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타서 손에 쥐여주고 땀 닦을 손수건을 챙겨 출근을 시켰다.
 며칠 전에 신랑이 나한테 그랬던가.
 "뭐 해 먹고살지 생각 좀 하고 살아야 하는데.."
 뭐 혼잣말처럼 자주 하는 말이고 나는 언제나
  "좀 기다려바바.. 내가 생각 좀 해보께.. 투자 좀 하고 나를 키워봐."
 하며 말도 안 되는 객기를 부리곤 했었는데.
 요 근래 '무언가 되어야 한다' 라든가 '뭘 해볼까' 하는 의식 따위가 어쩐 일인지 싹 사라져서 나는 나를 내려놓고 무의욕의 상태로 있는지라.
 "아 몰라. 나는 당신만 믿고 있을래. 아무것도 할 게 없어. 나는 당신을 믿고 집에서 빈둥거리며 늙어죽을 테다!" 했더니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본다.
 뭐야. 그 눈빛은. 나를 정말 믿은 게냐. 내가 당신의 노후를 책임져주리라 기대했던 거냐. 기대를 버리시게.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 능력도 없으며 아무 의욕이 없어졌다네...


 지난번 여행 후 긴축경제 모드로 살고 있다. 카드 사용한도가 턱턱 쌓여가는 문자 보기가 싫어서 갖고 있는 현금으로 몰래 살고 있었다. 왜 몰래냐고 하면. 글쎄. 카드사 몰래? 누구 몰래. 누가 뭘 몰라. 바보 아냐 하겠지만. 어찌 됐든 카드 한번 쓸 때마다 바로 들어오는 그놈의 문자 내역이 영 껄끄럽고 거슬렸다.
 여행 가기 전에 챙겨놨던 현금이 20만 원 정도 있었는데 어느새 그건 다 없어졌고.
 슈퍼에서 장 보는 비용 말고는 절대 카드를 쓰지 말자 했었는데 저 돈은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나는 다시 서랍 속 지갑을 뒤져 지난번 남은 미화 75달러와 지지난번 여행에서 남은 엔화 8000엔을 찾아 환전했다. 합이 16만 원이 조금 넘었고, 책도 좀 갖고 나가서 팔았더니 대략 다시 20만 원 정도의 현금이 채워졌다.
 현금을 쓰면 좀 덜 쓸까 싶어 그리 맘을 먹은 거지만.
 내가 나 혼자 살거나 신랑과 둘이서만 살아도 얼마든지 아껴 쓸 수 있겠는데. 문제는 방학을 맞이한 중학생 사춘기 소녀이신 딸이 계시다는 점이다.
 옷사줘옷사줘를 며칠 외치길래 모른 척을 하고 있다가 마침 에어컨도 고장 나고 방학도 했는데다가 요즘 학원에도 열심히 다니고 있으니 간만에 원하는 걸 해주마 하고 데리고 나간 게 실수였다.

 집에서는 더워서 그랬는지 입맛도 잘 없다던 딸이 간만에 부대찌개가 먹고 싶다 하여 시원한 쇼핑몰 식당코너에 가서 소시지까지 추가하여 2인분. 다 먹고 나니 입이 매운데 달달하고 시원한 게먹고 싶으니 폴 바셋을 가자 하여 그린티프라프치노에 아이스크림까지 얹어 후식을 잡수시고. 지하상가에 가서는 그래도 좀 저렴이 티셔츠 두 개와 반바지를 하나 득템했으나. 더위를 피하고자 들어간 서점에서 책을 세 권이나 사는 바람에-그렇다면 나도 두 권- 지갑이 금세 가벼워졌다.
 이제 그만 집에 가자. 버스 타고 집에 들어오는 길에 왜 엄마는 수박을 사주지 않는 거냐며 따지길래. 무겁고 음식물 쓰레기가 너무 나와서. 들고 가기 귀찮아서. 부담스럽고 무겁고 힘든 과일이야. 수박은.
 내 말 따위 무시하고 슈퍼에 가서 수박 한 통을 사게 하더니 끙끙거리며 집까지 들고 오게 만들었다.
 오자마자 수박을 해체해서 통에 담으라길래 나도 땀 흘린 김에 아예 미리 해놓고 씻자 싶어 집에 있는 커다란 통은 다 끄집어내어서 수박을 썰어 담았다.

 아차. 에어컨. 고장 난 에어컨.
 AS 신청을 하기 위해 사이트에 접속하니 일주일 뒤에나 방문 스케줄이 잡힌다.
 그래 그럴 줄은 알았지만. 이 더운 여름에 도대체 어떻게 버텨야 할지 막막하기만 한 심정.



 집에 가만히 앉아있으면 제일 싫은 게 자꾸 지난 일들이 떠오른다는 점이다. 그것도 아주 쪽팔린 기억들이 주로 떠올라 나 혼자 한숨을 쉬거나 머리를 쥐어 뜯게 되어서 이 쓸데없는 잡념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뭔가를 하며 움직여야 하는 건가, 뭔가를 계속 읽어야 하는 건가 자주 머리를 흔들게 된다.
 나는 왜 그렇게 생각 없이 말한 적도 많고, 생각 없이 행동한 적이 많았는지. 그때 그 말들은 누군가에게 상처였겠구나. 왜 그렇게 생각이 짧았을까... 등등의 생각들을 뒤늦게 하며 혼자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한숨이 쉬어지는 일상이 이어진다. 그리곤 당연히 좀 우울해진다.
 그래도 버티자. 나가면 돈이다. 나가면 돈이야..를 중얼거리다가도. 나가야 잡생각이 들 나고 나가야 좀 숨이 쉬어지니 이게 자꾸 악순환이다.

  오늘 오전엔 딸아이가 숙제를 하고 학원에 가야 하는데 집이 더워도 너무 더워 도저히 선풍기 바람으로는 몸이 식혀질 것 같지 않았다. 땀 흘린 김에 화장실 청소를 뚝딱 해치우고 샤워한 뒤 아이를 데리고 동네 카페에 갔다. 샌드위치랑 음료를 시켜 점심 식사 겸 끼니를 채우고. 아이는 숙제를 나는 책을.
 한 시간쯤 뒤 버스 타러 가는 아이와 인사를 하고 나는 그대로 남아 책을 읽는데. 웬걸. 무슨 약속시간이라도 된 건지 줄줄이 동네 아줌마들이 모여드는 통에 순식간에 카페가 북적거리며 시끄러워졌다.
 집에 가면 찜통이지만 카페 사장님도 돈 버셔야지 싶어 가방을 챙겨 상가에 들러 장을 보고 집에 들어왔다. 아.. 바로 찜통.
 선풍기 바람도 뜨겁고 몸이 서서히 뜨거워지는 느낌.
 의욕 싹 사리지고 맘이 사악해지는 느낌.
 집안 온도계를 보니 32도.
 혹시나 싶어 에어컨 실외기 위에 정성스럽게 얼음주머니를 놓고 에어컨을 다시 켜봤으나 별 반응이 없다. 완전 갔구나. 옆에 있을 땐 시원찮아도 뭐 이만하면 됐지 하며 지냈는데. 이리 갑자기 망가져버리니 어찌나 아쉬운지. 이번 여름만 잘 나고 그렇게 갈 것이지. 몇십만 원 들여 고치기도 애매하고 새로 사기도 애매한 이 시점에 하필.



이렇게나 더운 와중에 재미나게 읽은 책 세 권.

 내일은 다시 아이를 데리고 서점에 가야겠다.
 달리 방법이 없다.
 우짜지.
 오늘은 또 어떻게 잠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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