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정말 어쩌죠.
어느 날 싸하게 내 하나뿐인 인생의 앞날이 두려워질 때가 있다.
이제껏 살아온 날들에 대개는 운이 좋아 그럭저럭 좋은 쪽으로 잘 걸어왔지 했던 생각이 한순간에 확 뒤집어져버리는 순간 같은 날이 오는 것이다.
날 때부터 우리 집은 가난하지 않았고, 그럭저럭 삼 남매가 아주 풍요롭진 않아도 주말마다 외식도 하고 놀러도 다니면서 가끔 메이커 옷도 얻어 입고 과외도 종종 받으며 그렇게 자랐다. 최선을 다하진 않았으나 이제 생각해보니 내 노력에 비해 좋은 학교에 들어갔고 그때는 몰랐으나 이제는 너무나 들어가기 힘든 직장에도 들어갔었으며 무던한 신랑 만나 결혼해 나 닮은 딸도 하나 낳았다.
무수히 많은 맘고생을 시킨 시댁 얘기만 빼고 나면 그럭저럭 난 큰 고생은 모르고 지내온 운 좋은 이가 아니었나 생각하곤 했었다.
하지만 인간이란 건 어느 순간 가까운 누군가의 눈부신 발전을 엿보며 멈춰져 있는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것 같다. 내가 날 스스로 멈춰져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으나 사회적으로 멋지게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으며 쭉쭉 뻗어나가는 주변의 누군가를 지켜보노라면 어쩔 수 없이 지난날의 그 순간들의 선택에 회의가 들곤 하는 것이다.
일 년에 한 번 만나는 동기가 직장에서 승진을 했다며 근사한 한 턱을 쏘길래 나와 또 다른 퇴직 동기는 정말 진심으로 축하를 하며 맛나게 밥을 얻어먹고 들어왔다. 동갑치 딸들의 생활들을 비교하고 학원정보와 사춘기, 호르몬, BTS, 볼 빨간 사춘기 등의 정보를 공유하기도 하고. 사춘기 소녀들이 좋아하는 게 코인 노래방, 버블티, 올리브 영, 지하상가, 화장품이라는 놀라운 공통점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리곤 물어본다.
"그래, 연봉은 많이 올랐어?.. 오... 부럽다."
"실적은 이번 달에 얼마야?,.. 아.. 그렇지. 그 연봉이 공짜가 아니지... "
승진한 동기의 연봉은 너무나 부럽지만, 그녀의 실적 골은 놀라울 정도로 높아져만 간다. 저걸 사람이 한 달에 할 수는 있는 거냐.. 가능은 한 일인 거냐.. 우리끼리 격려의 말을 늘어놓지만. 아니. 그녀는 그걸 거뜬히 다 하고도 골을 넘겨 실적을 남기는 스타일이라 이번 연도에도 세일즈 실적 왕으로 드레스 입고 참석하는 배를 타러 간다. 그것도 외국으로.
대기업에 다니는 그녀의 남편까지 이번에 나란히 승진을 했단다. 임원으로.
첫째 딸은 안 시키려고 해도 스스로 욕심이 많아 찾아서 공부를 하는 스타일로 강남에서도 내노라하는 학원에서 공부를 열심히 잘 따라가고 있다. 결혼 초에 빚을 많이 지고 산 아파트는 이제 재개발에 들어가 잠시 이사를 나가 있지만, 강남 어느 곳의 그 아파트는 로또보다 높아진 금액으로 그녀에게 돌아올 것이다.
오. 를 연발하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햇빛이 쨍한데도 바람이 불어 으슬으슬 추웠다.
맛나게 얻어먹은 밥은 다 소화가 되어 버렸고, 한두 시간 뒤에 하교한 딸이 그놈의 사춘기 호르몬을 잔뜩 내뿜으며 짜증을 부리기 시작할 땐 나는 대놓고 좀 우울해져 버렸다.
그녀의 연봉은 부럽지만, 그 연봉이 공짜가 아니라는 걸 안다.
내가 그때 희망퇴직을 안 했더라면 난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난 이미 퇴사 후까지 하혈을 할 정도로 스트레스 만땅 상태였다.
그녀의 남편은 학벌 스펙이 뛰어나다. 물론 능력도 뛰어나겠지. 대기업 임원에 오르자면 오를만한 사람이 오르게 되는 것이다.
그녀의 딸의 학업에 대한 욕심은 타고난 것이다. 그녀의 딸은 그녀를 닮았다. 내 딸은 나를 닮고.
그 강남의 아파트에 빚이 많은 걸 알고 있었다. 결혼 초부터 꾸준히 갚고 또 갚기를 반복하다 드디어 최근에야 재개발이 결정되었고, 또 집값이 뛰었고 해서 엄청난 이득을 챙겼으나 그건 1-2년 만에 얻은 행운이 아니다. 오랫동안 그녀는 빚을 갚았고, 그 집이 맞벌이 부부의 소득을 쑥쑥 흡수해버리는 그런 거였다. 그저 그 동네에서 나고 자란 그녀가 익숙한 동네에 집을 얻어 그렇게 다시 살던 터에 집을 얻게 되는 그런 과정이었다. 투기도 아니었다.
그녀의 넉넉한 친정에서 집사라고 돈을 보태주실 때 역시 넉넉한 시댁에선 모른척한다는 게 너무 분하다는 정도가 그녀의 시댁에 대한 불만이었다.
남편은 다정하고, 둘째 딸도 애교스럽고.
살림이나 양육보다야 일하는 게 낫다면서 이 연봉을 위하여 스트레스는 감내해야 함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그녀였다. 그러니 여태 남아 그 일을 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난 뭐가 억울할 수 있단 말인가.
혹시라도 그녀가 어떤 말 못 할 고민거리라도 내게 속삭였다면 그렇지, 인생이 그렇지.. 누구나 고민이 있는 거야 하며 홀가분해했을까 싶어 겁이 났다. 남의 불행이라도 보고, 감사해하며 살아야지.. 하며 안심하고 싶은 그런 못된 마음.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부러운 동기를 만나 그 하루 씁쓸하고 초라했을 뿐이다.
다음날은 마침 날이 쨍하고 공기도 맑아 삼청동 어딘가를 돌아다니다 혼자 사진도 찍고 달콤한 단팥죽을 먹었다. 삼청공원 흔들의자에 앉아 바람에 눈처럼 흩날리는 벚꽃을 보며 황홀했다. 그다음 주말엔 서촌에 가서 딸아이와 자주 가는 옷 가게에 들려 이쁜 원피스와 잠바, 봄 바지를 사 입히고 돌아왔다.
지난 알바 마지막 월급이 들어온 날엔 우리 불쌍한 삼룡이 갖고 싶다던 드라이버도 하나 바꿔주고, 딸아이 먹고 싶다던 파닭도 하나 배달시켰다. 그간 미뤄뒀던 중고책을 팔아넘기고 그 돈으로 더 많은 책들을 사들고 들어왔다.
법륜스님의 강의를 듣고 울고 웃다가 먹방을 보며 잃었던 입맛을 되찾기도 했다.
알바기간 동안 늘어났던 몸무게 3킬로는 도로 빠졌고 소화불량은 여전하지만.
다시 게으르고 멍한 시간들에 놓여있음에 감사해한다.
나는 내 실재 모습보다 자존감이 턱없이 높은 게 아닌가 가끔 날 의심한다. 실재의 난 부지런하지도 않고, 뭔가 생산적이지도 않으며 항상 멍하거나 무기력하기만 한데 어쩌자고 자꾸 뭔가가 되어 있지 않은 나를 보며 슬퍼지곤 하냔 말이다. 근거없는 자존감에 우쭐대다 어느 날엔 예고도 없이 후드득 떨어져 바닥에 머리를 찧고 있다.
스스로 이것 좀 잘하면 참 좋을 텐데.. 하는 쓸데없는, 아니 어쩌면 쓸데없지 않을 3가지를 생각해냈는데 이걸 얼른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선, 운전.
다음, 엑셀.
언제나 영어.
이 3가지만 잘하면 세상 잘난척하며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