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지 않고 일한다는 핑계로 맘이 바빠 브런치에도 글이 뜸해지고 책 읽는 시간도 줄었다. 아이는 계속 학년이 올라 이제 엄마가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나는 이번만, 한 번만 더를 외치며 아이를 설득해 왔다.
아이는 이제 고3이 될 것이고 나는 드디어 선심 쓰듯 이제 엄마가 곁에 있을게. 너의 밥을 챙겨주마 외치며 집에 들어앉았다.
실은 일이 재미있었다. 점점 올라가는 월급도 쏠쏠했고 조금씩 새로운 일이 늘어가며 새로운 일을 접할 때마다 긴장과 다시 집중해야 하는 시간의 연속이었지만. 나는 내가 만든 서류가 돈이 된다는 사실이 신기했고, 내가 이렇게 새롭게 다른 커리어를 쌓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아이는 알아서 해주기를. 어차피 공부는 본인이 하는 거니까. 학원도 과외도 싫다며 인강을 듣고 학교만 열심히 다니는 아이를 내심 믿고 싶었다. 오로지 관심 있고 잘하는 과목은 수학인데 수학학원 하나 다니는 게 너무 감사해서 - 그마저 안 다니면 학원을 한 개도 다니지 않는 고등학생이 될까 봐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었다.
사실 지켜보고 있었다는 건 거짓말이다. 나는 내 일에 집중하느라. 데려와 보니 별로인데 라는 말을 들을까 신경이 곤두서 있곤 했다. 그게 그렇게 대단한 일도, 엄청난 책임이 따르는 일도 아닐지언정 나는 이 일이 재밌고 소중했다. 집에 와도 온통 일 생각이 머리에 둥둥 떠다녔으니까.
고3 올라가는 딸아이의 성적은 역시나 크게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1 처음 본 모의고사 성적이 제일 좋고 꾸준히 떨어지는 양상이었고, 내신도 이미 저 세상으로.
유일하게 좋아하는 과목인 수학만큼은 1등급이 나왔고 모의고사에서도 만점을 받거나 전교 1등을 찍기도 했다.
자 이 아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수학만 잘하는 아이.
나머지 과목은 싹 다 건질만한 게 없고. 내신도 모의고사도 등급이 너무나 들쑥날쑥이여서 평균을 내는 것조차 불가능할 지경이다.
막연히 믿어왔던 근거도 그 수학이었다. 수학을 잘하니까 언젠가 다른 과목도 올라오겠지. 공부머리가 없는 건 아닌 것 같으니 달리기 시작하면 잘 될 거야... 는 정말 오산이었다.
암기과목을 안 하는 게 아니라 하긴 하는데 잘 안 되는 거라는 걸 받아들인 게 고2 때였다.
그건 다른 영역이랄까. 그러니까 수학과 암기는 다른 뇌를 쓰는 거처럼 멀고 먼 다른 세상의 것이었다.
여학교에서는 특히 모두가 싫어한다는 물리를 기어코 선택하더니-과학 중에 과목을 선택해야 한다- 전교에서 채 20명도 되질 않아 내신등급조차 나오질 않고 절대평가가 된단다.
왜 하필 물리야. 물리 어렵잖아.
엄마 물리는 암기보다 수학이야. 풀면 돼.
나는 이 아이가 엄마의 무지와 무심함으로 영영 나락으로 떨어질까 끔찍하게 무서워지곤 했다.
아무리 달래도 다른 학원을 가지 않겠다고 고집하는 아이 때문에 신랑을 붙잡고 펑펑 운 적도 있었다.
나 때문에 쟤가 4년제 대학을 못 가게 되면 어떡하지.. 내가 뭘 몰라서 여태 방임하고 있었던 거여서 아이가 영영 실패자의 길로 가게 되어 버리면 어떡하지. 나 때문에. 정보력 없는 엄마 때문에.
2월 집에 들어와 앉은 나는 유튜브로 입시공부를 시작했다.
하루, 이틀,.. 삼일째가 되자 감이 잡히기 시작했고. 유뷰브로 얻은 정보로 앱을 깔고 학원을 검색하고 우리 아이에게 가장 적합할 전형을 찾아다녔다.
학원에 전화를 걸어 상담을 하고. 아이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설득했다.
학원을 등록하며 수업료를 이체하고 그 주말에 첫 수업을 들으러 갔다.
혹시나 혼자 보냈다가 길을 헤매거나 외로울까 봐 전철을 타고 같이 이동을 하고,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근처 카페에서 나는 나름대로 내 공부를 하고 끝나는 시간 맞춰 학원 앞에 가서 아이와 함께 집에 돌아왔다.
자. 이번엔 최저를 맞춰야 하니. 한두 개 과목을 끌어올려보자.
앱을 열어 선생님을 물색하고. 그중 후기가 좋고 인상이 좋은 분을 골라 면접을 봤다.
임시수업을 진행한 뒤 아이의 의사를 물어 4-5개월 수업을 같이 하기로 했다.
그 뒤로도 계속 유튜브를 보고. 본 걸 또 보고. 정보가 될 만한 사이트를 메모하고. 아이를 격려하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밥.
그놈의 밥.
내가 일하는 걸 서운해했던 이유가 됐던 그 밥을. 열심히 차려주는 중이다.
아이 혼자 방학에 집에 있으면. 느지막이 일어나 내가 차려놓은 밥을 쓱 쳐다보고. 내키면 먹고 먹기 싫음 침대에 뒹굴거리며 딴짓을 하다. 배고파 기운 빠지면 배달앱을 뒤적여 당기거나 당기지도 않은 밥을 시켜 먹었다. 그럼 벌써 훌쩍 오후 2-3시가 되어 있었고 그제야 독서실에 가는 패턴의 반복이었다.
엄마 밥.
밥을 더 이상 시켜 먹기도 싫고. 엄마가 해 놓고 가는 밥은 식었어.
엄마가 갓 차려준 밥을 먹고 싶어.
나는 일터에서도 그놈의 밥 때문에 발을 동동거렸었다. 밥을 먹어야 일어날 텐데. 밥을 먹어야 독서실에 가는데. 아이는 유난히 뜨신 밥에 예민하고 매번 다른 메뉴로 따끈하게 먹고 싶어 했다.
엄마는 말이야. 처음 일했을 때보다 급여가 몇 배는 올랐고. 자격증도 따고 공부도 더 해서 일의 폭을 넓히면 또 다른 새로운 일을 하게 될지도 몰라. 이게 재밌고 좋아. 이제 엄마나이에 이 일이 끊어지면 엄마는 영영 일을 못하게 될까 초조함이 생기기도 해.
아이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하지만 엄마가 집에 있는 이 짧은 며칠 동안 아이가 너무나 좋아하는 게 느껴져서 내 초조한 맘은 꾹 눌러버리기로 했다.
끼니마다 차려지는 따뜻한 엄마밥을 행복해했고.
유튜브로 얻은 정보나 학원설명회에서 들은 정보를 들려주면 예전과 다르게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저 홀로 불안한 세상에 있다가 미흡하나마 엄마가 정보를 수집하러 돌아다니니 그게 좀 안심이 되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사실 오랜 기간 일을 하다 쉬게 된 기념으로 아이와 함께 잠깐 일본여행을 가겠다고 신랑에게 얘기했었는데. 평소와 달리 정색을 하며 '정신 차리라'는 말을 조용히 읊조리길래. 꽤나 기분이 상해서 며칠을 쫓아다니며 신랑을 괴롭혔다.
그래. 애는 나 혼자 키우지.
그래. 일은 너도 하고 나도 했는데. 정보는 너도 없고 나도 없는데. 나만 정신을 차려야 하는구나.
그래. 애를 내가 어서 데리고 왔나 보다.
그래. 전남편에게 애를 주고 올걸. (초혼입니다..)
볼 때마다 빈정거리긴 했으나 정신이 번쩍 들긴 했는데. 이 와중에 신랑은 출장이 잡혀 - 출장이긴 하나 암만 봐도 이건.. 반이상이 놀러 가는 건데- 일주일씩이나 두바이를 가게 됐다는 얘기를 했다.
그래. 나는 정신 차려서 입시정보 들으러 대치동에도 가고. 애 밥도 끼니마다 따뜻하게 대령하는데.
그래. 너는 두바이에 가는구나.
그래. 고3아빠는 출장도 빼줘야 하는 건데 대표님이 그걸 모르시는 겐가.
그래. 대표 전화 대봐라. 내가 경력단절될 갱년기 고3엄마의 위력을 보여주마. (대표 외국인이라 대화 안됩니다..)
신랑은 출장가방을 싸면서도 계속 내 눈치를 보며 본인도 스트레스 받는다고 중얼거렸지만. 이내 떠나버린 출장지에서 두바이의 기름장수 같은 기름진 사진들을 보내오며 한껏 행복한 눈치다.
니 돌아오기만 해 봐라.
아니다. 실은. 신랑이 없으니 한결 수월하고 가벼운 이 느낌은 무엇인지.
빨래도 들 나오고 늦게 들어와 술국 찾는 이도 없고. 어지르는 사람도 없고 주말 내내 퍼질러 자거나 티비를 보거나 끊임없이 간식을 찾거나 끼니마다 아이와 다른 밥을 찾는 이가 없다.
이제 나이 많아서 해외지사는 못 나가겠지.. 아쉽네.
2월 중에 아이 밥해주고 학원 세팅해 주고.
과외 선생님도 구했고.
나는 내 공부하고. 하고 싶은 게 무얼까 찾아보면서 당분간은 여유로울 작정이다.
허당 엄마라도 믿고 기대고 싶은 아이의 맘에 작은 위로라도 줄 수 있다면 당연히 쉬어야겠지 다짐을 해본다.
이러다 또 어디서 일이라도 들어오면 울렁울렁 거리며 아이를 설득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