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슬픈 날이야, 오죽하면 달팽이가 붙을까

시 필사, 이원하

by 정연주

하도리 하늘에

이불이 덮이기 시작하면 슬슬 나가자

울기 좋은 때다

하늘에 이불이 덮이기 시작하면

밭일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

혼자 울기 좋은 때다


위로의 말은 없고 이해만 해주는

바람의 목소리

고인 눈물 부지런하라고 떠미는

한 번의 발걸음

이 바람과 진동으로 나는 울 수 있다


기분과의 타협 끝에 오 분이면 걸어갈 거리를

좁은 보폭으로 아껴가며 걷는다

세상이 내 기분대로 흘러간다면 내일쯤

이런 거, 저런 거 모두 데리고 비를 떠밀 것이다


걷다가

밭을 지키는 하얀 흔적과 같은 개에게

엄살만 담긴 지갑을 줘버린다

엄살로 한 끼 정도는 사먹을 수 있으니까

한 끼쯤 남에게 양보해도 내 허기는 괜찮으니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


검든 돌들이 듬성한 골목

골목이 기우는 대로 나는 흐른다

골목 끝에 다다르면 대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

거미가 해놓은 첫 줄을 검사하다가

바쁘게 빠져나가듯 집 안으로 들어간다


시. 이원하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중에서



풍수에는 바람이 포함된다. 어디선가 봤는데, 경지에 오른 사람만이 바람을 읽는단다. 바람은 스스로 모양을 만들지 않기 때문으로, 예부터 땅이 좋은 곳에는 나무를 한 그루 심곤 했단다. 좋은 바람이 지날 때 그물이 되라고. "위로의 말은 없고 이해만 해주는 / 바람의 목소리"라는 문장을 보니 떠오른 이야기다. 여기서의 바람이 형체없는 바람인지, 아니면 '바라다'의 바람인지 모르겠다.


어떤 일은 시간이 흘러도 비밀로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그런 일들은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매일 곱씹기 마련이다. 그때마다 시간은 너무 느리게 때로는 너무 빠르게 흐르고, 긴 꼬리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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