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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연주 Sep 04. 2020

우리가 만나는 곳이 꼭 그 집안은 아니잖아

엑스 형님들과의 저녁식사

엑스 형님, 그러니까 내 남편 형제들의 엑스 와이프들과 1년에 두세 번 다 같이 모여 저녁을 먹는다. 우리 부부를 제외하고 자식들이 모두 이혼한 상태라 아버님은 유일한 며느리인 나에게 가끔 전화를 걸어 고맙다고 하신다. 남편은 삼 형제인데 엑스 형님은 총 셋이다. 큰 아주버님이 두 번 이혼했기 때문이다. 큰 아주버님은 굉장한 로맨티시스트다. 결혼 후에도 늘 새로운 여자를 만나고, 이혼 후에도 연애 생활을 이어나갔다.


나는 큰 아주버님의 1차 불륜 전쟁 중에 결혼을 하고, 큰 아주버님의 2차 결혼을 앞둔 채 돌잔치를 했기 때문에 아주버님의 엑스 와이프와 예비 와이프, 두 분과 동시에 연락해야 했다. 이때만 해도 두 사람은 나를 통해 서로의 상태를 체크했다.


“식까지 올린대? 정말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것들. 식장은 어디야?”

“이태원 해밀톤호텔이요. 오시려고요?”

“내가 가줘? 나 가도 뭐라 할 사람 한 명도 없을걸? 안 가는 게 축복이고 저주이지.”


그 무렵 아주버님의 예비 와이프는 나에게 무척 다정하게 굴었는데, 은근히 맏며느리의 정체성을 드러내곤 했다.


“돌잔치라는 게 결혼보다는 간소하지만, 그래도 친인척이 다 모이는 거잖아요. 제가 곧 이 집의 맏며느리가 될 텐데, 그런 자리에 결혼 전이라고 참석을 안 하는 것도 송구하고, 뭐 그러네요.”

“저야 오시면 대환영이죠.”

“그런데, 우리 그이 이혼한 거 모르는 분들도 계시죠? 혹시 그분이 오시는 건 아니죠? 하기야, 이혼하면 동서들하고도 다 남남이죠.”


그녀의 기대와 달리, 나는 종종 큰 아주버님의 첫 번째 엑스 와이프와 연락하고 지냈다. 음식 솜씨가 좋아서 가끔 반찬을 보내주셨다. 큰 아주버님의 두 번째 엑스 와이프도 음식 솜씨가 뛰어났는데, 나눠 먹는 걸 즐겨하시진 않으셨다.


두 사람을 숙박업에 비유하자면, 한 사람은 한옥 게스트하우스 안주인, 다른 한 사람은 호텔 컨시어지에 가깝다. 첫 번째가 표정이 차갑지만 궁금해하면 스탭밀도 나눠주는 사람이라면, 두 번째는 늘 미소를 띠고 있지만 선을 넘지도 넘어오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는다.


비슷한 상대와 사랑에 빠진다는 이론이 우세하지만, 두 사람은 말투도, 복장도, 삶의 가치관도 전혀 달랐다. 게다가 두 번째 결혼도 파경으로 이끈 현재 동거인은 사용하는 언어부터 다르다. 외국인이다. 어쨌든 한 남자를 두고 서로를 깊이 증오했으나, 지금은 그저 같은 한 남성을 증오-동정하는 여성으로 만나는 중이다. 물론 개인적인 연락까지 나눌 사이는 아니지만.


작은 아주버님과 작은 형님(엑스 와이프)은 애초에 안 맞는 커플이었다. 학생 때 알던 사이였고 학교를 졸업한 뒤 우연히 만나 사귄 지 얼마 안 되어 임신과 함께 결혼했다. 아주버님은 도전하는 사람이었다. 형님은 안주하는 사람이었다. 자주 말하는 단어도 달랐다. 아주버님이 사업, 요트, 주식이라면, 형님은 유기농, 택견, 생활비였다.


결혼을 포함한 모든 계약이 그렇듯, 각자 주고받고자 하는 게 달라지면 효력은 급격히 줄어든다. 법적으로 20년의 결혼생활이었지만, 두 사람이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은 우리 부부의 결혼식이 유일했다. 명절에도 아주버님은 울릉도로 스킨스쿠버를 간다거나 양수리로 요트를 타러 가느라 얼굴 보기 힘들었다.


왜 두 사람의 결혼은 20년이나 유지되었는가. 작은 형님 말로는 누구도 먼저 이야기 꺼내지 않아서라고. 이미 분리된 일상이 익숙해 이 상태를 꼭 정리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고. 그런데 왜, 갈라섰냐면 작은 아주버님 역시 로맨스가 원인. 비록 짝사랑이었지만. 아주버님은 짝사랑의 유일한 걸림돌이 본인의 결혼 상태라고 믿었던 듯싶다.


사실 큰 아주버님의 두 번째 이혼과 작은 아주버님의 이혼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두 분의 형님과 나는 종종 모여 술을 마시곤 했다. 주로 큰 형님(아주버님의 두 번째 와이프)을 위로하는 자리였다.


큰 형님의 법원 절차까지 마친 후 우리는 후암동 시장에서 만났는데, 큰 형님은 3개월 사이에 살이 15kg이나 빠졌다. 큰 형님은 당시 편의점에서 알바를 시작했다며 이십 대처럼, 이십 대 시절의 원피스를 입고 오셨다. 군살 없는 큰 형님은 무척 아름다웠다. 다이어트엔 마음고생이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범한 척했던 큰 형님이 갑자기 울면서 온갖 방언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평소 말이 없는 작은 형님과 당황한 나는 딱히 대꾸할 말이 없어 듣고만 있었다. 듣고만 있었는데 그만 저 대목에서 대폭소가 터지고 말았다.


“내가 선녀 옷을 주는 게 아니었어.”


큰 아주버님은 재혼 이후 급격히 머리숱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몇 번의 명절 후,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었는데, 바로 큰 아주버님의 머리숱이 압도적으로 풍성해졌기 때문이다. 가발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문제는 가발을 쓴 뒤 2년이 채 못되어 바람이 난 것. 큰 형님이 말하는 ‘선녀 옷'은 가발이었다.


눈물이 날 정도로 웃었다. 작은 형님도, 나도. 큰 형님도 우는지 웃는지 나를 가리키며 “너도 조심해"라고 한 마디 했다. 헤어질 때 두 사람은 “최 씨 집안 남자 놈들 다 하자가 있다"라고 외쳤다. “우리끼리 뭉쳐야 해. 알코올 중독자들의 모임처럼 만나서 우리는 풀어야 할 게 있다”라고 떠들어 댔다.


나는 그 모임에 들어와야 할 멤버를 한 명 더 알고 있었다. 바로 큰 아주버님의 첫 번째 와이프 말이다. 그래서 1년 전, 우리 네 사람은 처음 다 같이 만났고, 저녁을 먹으며 메인으로는 최 씨 집안 남자들에 대한 험담과 조롱을, 디저트로는 생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를 제외한 세 사람 모두 전업주부였으나 이혼 후 각자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 첫 번째 엑스 큰 형님은 반찬가게를 하시고, 두 번째 엑스 큰 형님은 편의점을 하신다. 두 분 모두 이혼 시 받은 재산을 시드머니로 사업을 일군 케이스다. 역시 여자가 목돈 만질 기회는 이혼뿐인가 보다. 엑스 작은 형님은 간호조무사로 일하고 있다. 회사 다니는 게 싫어 결혼했다면서, 50대 사회생활이 가장 신난다고 말씀하신다.


이렇게 혼자 잘 사는 분들께서 왜 그렇게 남편이 싫었는데 이혼이 늦었냐고 물으면 공통의 답변.

“안 해봐서. 두려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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