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서는 그저 새해의 인사를 전하고자 합니다. 올 한 해도. 여러분 모두 살아내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브런치스토리라는 이 공간에 글을 올리는 것에 회의가 든 적도 한동안 있었습니다. 누구라도 내 글을 읽어주기를 바라면서도 이것이 단지 인터넷에 아무렇게나 배설된 활자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되어버리는 것이 싫다는 양가적인 감정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차츰 글을 잘 읽었다고 말씀해주시는 분들이 생기고. 때론 아프게 읽었다고. 때론 그럼에도 위로가 되었다고 전해주시는 그 한 마디에 저 역시도 위로를 받고. 그런 것들이 별 대단한 것은 아닐지라도. 이 언어들이 그 무엇도 아닌 따뜻함으로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그로써 내 내면이 아닌 타인의 내면과 상호작용을 하는 법을 익히며 정말 나밖에는 모르던 이 속 좁은 울타리도 조금은 넓어졌으면 좋겠다고. 다만 그런 바람으로 계속해서 쓰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어둡고 음울하고. 때론 불편할지도 모를 그런 이야기들만 주구장창 해서 읽어주시는 분들께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생각도 종종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제대로 끝맺지 않으면 앞으론 그 어떤 것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사람이 될 것만 같아서 여기에 따른 죄책감은 그저 제 이기심으로 덮어버리곤 했습니다. 여전히 속이 좁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여정을 무사히 마치면. 새로 쓰게 될 이 다음의 이야기가 조금은 더 밝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중학교 이 학년 때 교육청에서 주관하는 글짓기 대회에 출품한 적이 있습니다. 대체로 학교 대표로 한 명이 나가는 출품작인 경우에는 삼 학년 학생들에게 기회를 준다고 하는데 어째서인지 그 해에는 이 학년이었던 저를 부르셨습니다. 올해는 네가 한 번 써봐라. 일단 평소에도 무척이나 따르던 국어 선생님께서 그렇게 맡겨주시니 강아지처럼 설레어서 쓰고 싶은 대로 열심히 써서 냈습니다. 그런데 그 글을 읽어보시고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은 단 한 문장이었습니다. 이건 에세이가 아니다.
잘 썼다. 못 썼다. 그런 게 아니라 이건 그냥 에세이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글의 형식은 에세이여야 했는데요. 소설도 아니고 뭔가 거짓으로 꾸며낸 게 있지도 않은데 대체 왜 에세이가 아닌 걸까. 다시 읽어보니 아차 싶긴 했습니다. 에세이라기보다는 무슨 연설문 내지는 웅변 같은 뉘양스. 그 옛날 그리스의 광장에서 또박또박 소리치면 딱 어울릴 것 같이 몹시도 과격한 어조였습니다. 그때의 저는 지금보다도 훨씬 더 독기와 오기만 가득해서 내 딴에는 진심을 담아 쓴다는 것이 그만 나도 모르게 그런 문체를 만든 것이었습니다. 약간 풀이 죽은 저는 좀 힘을 빼고서 새로운 글 한 편을 다시 써보았습니다. 그 글을 읽고서 선생님이 하신 말씀은 이번에도 단 한 문장. 이걸로 출품할 테니 그렇게 알아라. 그게 다였습니다. 그리고 그 글은 대회에서 장원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이대로 끝났었더라면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한 제 열망이 이 지점에서 완전히 끝났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진짜 이야기는 이 다음부터입니다. 대회의 결과가 나온 지도 한참이 지난 어느 날 국어 수업시간. 선생님께서 우리 반 아이들 전원에게 어떤 프린트물을 돌리셨습니다. 오늘 수업은 이 지문으로 하겠다. 그리고 그 프린트물의 지문은 에세이가 아니라고 매몰차게 까였던 그 첫 번째 글. 바로 제가 쓴 글이었습니다.
그 글의 내용이 어떠했는지 세세하게 떠오르지는 않지만 무엇을 주장하려고 했었는지만은 아직도 분명히 기억이 납니다. 어린 나이의 학생들이 소위 비행청소년이 되는 것. 그리고 학교폭력의 수위가 갈수록 높아지는 건 비단 아이들만의 잘못이 아니다. 아이들은 결국 어른들을 보고 자라는 것이고 따라서 아이들이 엇나간다면 그건 이 사회에서 어른들이 온당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독기와 오기만 가득해서 웅변을 해버렸다는 게 무슨 뜻이었는지 대충 이해가 가시겠지요. 저는 내심 글의 주제가 그러했기 때문에 선생님께서 더욱 탐탁치 않아 하셨던 게 아닐까 하는 방자한 의심까지도 품었더랬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선생님은 그 수업시간에 반 아이들 모두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글은 비록 에세이라는 형식에는 맞지 않아서 지난 대회에는 출품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너희 또래 아이들이 한 번쯤 읽어볼 가치가 있을 것 같다고 판단했다. 이 글을 쓴 사람 역시 지금 이 반에 같이 있으므로 너희 또래다. 그러니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읽어보고 여기에 대한 생각을 말해보자.
그리고 그 수업시간 내내 저는 저와 같은 반인 아이들이 제가 쓴 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와 원래 친했던 녀석들뿐만 아니라 그간 데면데면했던 애들. 심지어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아이들까지 모두 진지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며 자신들이 글을 읽고 들었던 생각들을 얘기했습니다. 이 아이들이 나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그것과는 별개로 적어도 내가 쓴 글에 담겼던 진심만은 여기 있는 모두에게 전해진 것이구나. 그때 저는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글이라는 것에는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힘이 있구나. 글은 사람이 쓰는 것이지만 때로는 사람보다도 더 큰 울림을 주기도 하는구나.
그러니까 이 힘과 울림을 더 올바르게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사람의 편에서. 사람을 살리는 편에서.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이 있다면 약한 사람의 편에서. 짓밟는 사람과 짓밟히는 사람이 있다면 짓밟히는 사람의 편에서. 다만 진심으로. 더는 아무도 짓밟거나 짓밟히지 않는 세상이기를 꿈꾸며.
아주 어릴 때부터도 누군가 꿈을 물으면 막연하게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대답하긴 했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한 직업으로서가 아니라 정말로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를 꼽으라고 한다면요. 그러나 이날 저는 단순히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을 넘어 무언가 사고의 차원이 확장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빅토르 위고가 말했듯이 사람의 사고는 한 번 다른 차원으로 확장되면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법인가 봅니다.
그래서 저는 여전히 글을 쓰고 싶은 사람입니다. 몸이 아플 때도 마음이 아플 때도 다만 글을 썼습니다. 많이 쓴 만큼 많이 지우고 또 많이 잃기도 했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썼습니다. 지워버린 언어도 잃어버린 언어도 언젠가는 더 큰 힘과 울림으로 다시 살아날 거라고 믿으며. 그리고 그 속에서 지워진 인연도 잃듯이 잊고 싶은 인연도 또 어느 세월엔가는 나를 더 단단히 뿌리내리게 해줄 밑거름이 될 거라고 믿으며.
그리고 앞으로의 시간들도 기어이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고자 합니다.
항상 제가 쓰러지지 않도록 등 뒤를 받혀주시는 모든 분께 다시 한 번 감사함을 전합니다. 그리고 저 또한 그런 따뜻한 온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 역시. 새해를 핑계 삼아서라도 간절히 바라보고 싶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밴드의 가장 좋아하는 노랫말을 덧붙이며 이 새해 인사를 마무리할까 합니다. 내년에는 부디 상처받기 쉬운 우리의 삶도 몸을 지키기 위한 방법을 찾아낼 수 있길 바라며. 그럼에도 아직 잃어지지 않은 모든 희망을 응원합니다.
許されない僕等が 許されるための手段
용서받지 못하는 우리가 용서를 받기 위한 수단
傷つきやすい僕等が 身を守るための方法
상처입기 쉬운 우리가 몸을 지키기 위한 방법
僕は歌で 君はなにで?
나는 노래로, 너는 무엇으로?
僕は歌で 君はなにで?
나는 노래로, 너는 무엇으로?
ひび割れたイノセンス イノセンス 追いすがる不安振りきる為に
금이 간 이노센스, 이노센스, 바짝 따라붙는 불안을 떨쳐내기 위해
僕は歌う つまりそれが 僕の兵器でありアイデンティティー
나는 노래해, 즉 그것이 나의 무기이자 아이덴티티
(amazarashi, Bakudan no tsukurikata)
글의 제목은 위에 덧붙인 노랫말의 제목과 같습니다. 아마자라시의 폭탄을 만드는 방법.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사람을 그린 노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