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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율 Apr 27. 2024

다시 펼치며

[일전의 편지] 프롤로그


외상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외딴 나라에 난민으로 들어서는 것과 같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겨우 발 디딘 땅에서조차 환대는 환상일 뿐이고 갑옷도 없이 악어 우리에 던져지듯 처음 들어본 언어를 익히고 살아가는 방법을 새롭게 습득해야만 한다. 그 날마다의 순간마다 외상은 내 눈앞에서 가장 도드라지게 피어나는 꽃으로 되살아나고 그것은 설령 기억의 모습으로 저물어갈지라도 결코 과거가 될 수는 없다. 마침내 열매를 맺고 그것을 떨치게 되기 전까지는. 그러나 나의 열매는 아직 햇빛을 다 보지 못했고 이것은 극복의 완성이 아니라 가능성일 뿐이다. 이 시리고 서럽고 외로운 뿌리가 자신의 언어를 되찾을 수 있을지는 과거가 아닌 미래에 달렸음을 잊지 않는다면.

     기억의 언덕에 묻힌 시는 그때 다시 쓰일 것이다. 그것이 앞으로의 비탈길까지도 밝혀줄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정표였다면.


이 년 전 여름으로부터.


추신.


이 년 전 나는 정신과 처방약을 처음 복용하기 시작하며 거의 날마다 글을 썼다. 그것은 절반은 당시 상황의 특수성에 대한 순수한 실험정신에 의한 것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살아남을 미래의 나 자신을 위한 한줌 자비와도 같은 배려의 일환이었다. 그 참다운 배려심에 입각해서 그 글들은 대체로 편지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그것을 이제와 다시금 전해받는 현재의 나 역시도 추신을 쓰는 마음가짐으로 화답하려고 한다. 적어도 그것이 필요할 만큼은 이미 충분히 망가져버린 기억임을 헛헛하게 인정하며.

     과거가 가장 마주하기 힘든 모습이라면 오늘 나의 몰골을 애써 들추어보는 일 따윈 얼마나 무의미할 것인가를 생각하면 정말이지 아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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