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책장을 덮고, 약봉지를 뜯으며

by 박온유

열한 살, 나는 이미 세상의 모든 동화를 읽어치웠다.

그리고 열두 살, 아버지의 서재에서 만난 파우스트와 데미안은 내게 너무 일찍 가르쳐 주었다.

삶이란 결코 아름답기만 한 동화가 아니라는 것을.

신이 빚어낸 이 세계에는 구원보다 절망이 더 짙게 깔려 있다는 것을.


나는 너무 빨리 늙어버린 아이였다.

친구들이 아이돌과 떡볶이에 열광할 때, 나는 매일 밤 기도했다.

내일 아침에는 눈을 뜨지 않게 해달라고.

천국이 있다면 제발 나를 빨리 데려가 달라고.

중학교 교실 창밖을 보며, 고등학교 야자 시간의 적막 속에서,

내 일기장은 온통 죽음을 향한 구애(求愛)로 채워졌다.


그렇게 위태롭게 이어지던 줄타기는 서른하나,

가장 찬란해야 할 나이에 끊어졌다.


우울, 공황, 불면, 섭식장애... 이름 붙일 수 있는 모든 불행이 내 몸을 덮쳤다.

정신병동의 하얀 천장을 바라보던 6개월, 그리고 세상과 단절된 채 방 안에 웅크려 보낸 1년.

그 시간 동안 나는 책 속의 활자가 아니라,

내 살을 파고드는 고통을 통해 비로소 진짜 '지옥'을 읽었다.


이제 나는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다. 회사를 다니고, 사람들과 웃고, 밥을 먹는다.

겉으로 보기엔 완벽한 '정상인'의 연극을 하고 있다. 하지만 무대 뒤편의 나는 여전히 매일 약을 삼킨다.

이 약이 없으면 나는 하루도 버티지 못한다는 사실을, 나는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인슐린이 필요한 당뇨 환자처럼, 나는 그저 '삶'이라는 것을 소화하기 위해 약간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일 뿐이다.

어린 시절 내가 읽었던 수많은 고전들은 결국 '고뇌하는 인간'의 이야기였다.

이제 나는 나만의 고전을 쓴다.

괴테도 헤세도 써내지 못한, 오직 나만이 쓸 수 있는 이야기.

죽고 싶어서 안달이 났던 그 아이가, 기어이 살아남아 오늘을 버텨내는 이 지독하고도 아름다운 생존기를.


나는 아직 치유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내일도, 약 한 줌과 함께 나는 살아낼 것이다.

이것은 그 치열했던 전쟁의 기록이다.

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