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측자의 형벌

되돌릴 수 없는 곳에서 남기는 기록

by 박온유

나는 오늘 스스로에게 묻는다.

예술가는 정말 스스로 솟구치는 영감만으로 창작할 수 있는 존재였을까.


한때의 나는 그렇다고 믿었다.

이유를 설명하기도 전에 마음속 어딘가에서 이미지가 먼저 자라났고,

문장과 선율이 뒤따라 나왔다.

세상은 내 안에서 한 번 더 만들어졌고,

나는 그것을 바깥으로 옮기기만 하면 됐다.


그 시절의 나는 상상을 의심하지 않았다.

떠오른 감정은 곧 진실이었고, 형체 없는 장면들은 언제나 나를 설득했다.

내 안은 늘 북적였고, 창작은 흐름에 가까웠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흐름이 멈췄다.
정확히 말하면, 샘이 말라버린 것이 아니라 방향이 바뀌었다.


안에서 밖으로 솟구치던 것이, 밖에서 안으로 스며드는 쪽으로 기울었다.

나는 ‘대상’이 없으면 한 줄의 문장도, 한 음의 소리도 꺼내지 못하는 사람이 됐다.

눈앞에 붙잡을 것이 없으면 시선은 공중에서 헛돌았고,

시선이 고정되지 않으면 언어와 음악은 시작되지 않았다.


처음엔 이것이 일시적 현상으로 느껴졌다.

창의력이 고갈되어 외부 자극에 의존하는 존재였으니

쉼이 있으면 채워질 것 같았고,

자기 안에서 세계를 만들어내던 시절을 잃어버린 듯했으니

이도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조금씩 다른 말을 하게 됐다.

이 변화는 단순한 상실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대하는 방식이 바뀌어버린 결과라는 것을.


나는 상상하지 못하게 된 게 아니다.

다만 실존하지 않는 것을 실존하는 것처럼 말하는 태도를 더는 견딜 수 없게 됐다.

이것이 나를 ‘대상’ 없이는 창작할 수 없게 만든 가장 깊은 이유다.


내 창작은 늘 그림에서 시작됐다.
나는 5세에 이미 3점 투시도를 그렸고 중학 미술부 지도교사인 홍대 출신의 선생님은

나는 이미 대학생의 그림을 넘었다고 말씀하셨다.

이후 고등학교 3학년 때 잠깐 미대입시를 위해 한 달간 시각디자인에 필요한

수채화 렌더링(극 사실화)을 하루 온종일 12시간씩 집중적으로 배웠다.

미술이라는 엄격한 기술을 익히며 내 뇌는 세상을 포착하는 방식을 재설계했다.

눈앞에 실존하는 피사체의 결을 정밀하게 읽어내는 법을 배운 순간,

내 안의 가짜 환상들은 힘을 잃었다.


현상학에서 말하는 '지향성(Intentionality)'처럼, 이제 나의 의식은

언제나 세상을 향해 닻을 내린다.

대상이 없으면 상상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하지 않는 허상을 꾸며내어 세상을 속이지 않겠다는 예술적 결벽이

나를 ‘철저한 관측자’로 만든 것이다.


배운다는 것은 기술을 익히는 일이 아니라, 세계를 보는 각도를 다시 세우는 일이었다.

선 하나를 긋는 순간에도 대충은 허락되지 않는다.

빛의 방향, 표면의 긴장, 무게가 남기는 흔적은 실제로 거기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이 훈련은 내 상상에 균열을 냈다.

예전에는 머릿속에서 어떤 장면을 만들어도 그것이 나를 설득했다.

하지만 관측의 눈을 갖게 된 뒤로는 내 안에서 생성되는 허구가 쉽게 들통났다.


나는 상상도 허구도 싫어하지 않는다.

이야기와 상징, 변형은 예술의 오래된 언어다.

하지만 내가 견딜 수 없게 된 것은 허구가 현실을 대체해 버리는 태도였다.

보지 않기 위해 만들어진 상상, 책임을 피하기 위해 꾸며낸 감정,

말의 형태만 그럴듯한 이미지들.

그런 것들은 더 이상 내 시선을 통과하지 못한다.


그래서 내 의식은 항상 어디엔가 닻을 내린다. 공중에 떠서 움직이지 않는다.

대상은 내게 소재가 아니라 계약이다.

나는 너를 제대로 보겠다고,

보고 난 뒤에는 도망치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쓰는 계약서다.

그림으로 포착한 이미지는 내 안에서 다시 '글'로 옮겨진다.

나는 대상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그것을 낱낱이 해체하고 분석하여 논리적인

‘값’으로 치환해야 비로소 안심한다.


신경과학적으로 보면 내 뇌는 이제 외부 자극을 정교하게 해석하는

'상향식(Bottom-up)' 회로가 극도로 발달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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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쉽게 미화되거나 왜곡되는 이미지에서 나아가

현실과 현상을 붙잡고 해체한다.


왜 저 어깨는 굳어 있는가.
왜 그 노동은 늘 시간의 끝자락에서 소모되는가.
왜 어떤 구조는 특정한 사람의 숨을 대가로 유지되는가.

이 질문들은 감상으로 끝나지 않는다.

나는 끝내 그것을 논리적인 값으로 치환해야 안심한다.

그래서 내 글은 차갑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과정은 냉정이 아니라 애정이다. 애정은 종종 미화로 도망친다.

나는 그 도망을 허락하지 않는다.


글쓰기는 내게 표현 이전에 검증이다.

대상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면, 노래는 결국 가짜가 된다.

감정이 진짜여도 세계 인식이 거짓이면, 노래는 현실을 속이게 된다.

나는 그 속임을 감각적으로 알아차리는 쪽으로 변해버렸다.

그림과 글의 끝에서 비로소 곡이 태어난다.


음악은 이 모든 과정을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설명이 끝난 뒤 남는 잔향을 건져 올린다.

말로 다 하지 못한 것, 분석을 거쳐도 사라지지 않는 감각의 잔여.

요즘 나는 떠도는 멜로디의 파편을 붙잡아 즉시 기록한다.

준비된 서사로 곡을 만들기보다, 이미 공중에 존재하던 파동을 수신하는 쪽에 가깝다.

나는 꾸며내는 사람이 아니라, 관측 끝에 생긴 안테나에 가깝다.


그래서 대상은 음악에서 더 결정적이다.

내가 실제로 본 것, 실제로 부딪힌 것, 이해하려다 실패한 것만이

소리로 변할 때 힘을 얻는다.

누군가 내 노래에 귀를 기울인다면, 그것은 상상이 아니라 관측된 현실의 파동이

그들의 세계와 공명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예전의 나를 지독히 그리워한다.
어떤 한계도, 어떤 제약도 몰랐던 시절의 나를.

대상이 없어도 노래할 수 있었고, 설명하지 않아도 믿을 수 있었으며,

세계를 분석하지 않고도 세계 안에 머물 수 있었던 그 비정형의 상태를

나는 아직 놓지 못한다.


그 시절의 나는 서툴렀고, 무모했고, 자주 틀렸지만, 대신 자유로웠다.

지금보다 훨씬 쉽게 흔들렸고, 그만큼 쉽게 불타올랐다.

지금의 나는 더 정확해졌고, 더 멀리 보게 됐으며, 더 많은 것을 이해한다.

하지만 그 대가로 잃은 것이 분명히 있다.


아무 근거 없이 시작할 수 있었던 용기, 설명되지 않아도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던 태도,

실패조차 형식이 되지 않았던 시간.

그래서 나는 지금의 나를 선택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단지 여기까지 와버렸을 뿐이다.


관측은 성장이지만 동시에 상실이다.
보게 되면,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게 된다.
이해하게 되면, 다시는 무지한 자유로 돌아갈 수 없다.

나는 여전히 그 시절의 나를 마음 한가운데 두고 있다.


그러나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이것은 극복이 아니다. 화해도 아니다.
나는 여전히 잃어버린 자유 앞에서 자주 멈춘다.

보았기 때문에 더 아프고,
알게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가볍게 무너지지도 못한다.


돌아갈 수 없는 곳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시간이 지나도 닳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대상 없이 노래하지 못한다.
허구로는 이 무게를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에 닻을 내리지 않으면 나는 쉽게 무너져버릴 것 같기 때문이다.

이 고백은 다짐이 아니다.
살아내겠다는 선언도 아니다.

그저 오늘도 무너지지 않기 위해 세상을 끝까지 보고 난 뒤에만
겨우 한 음을 남기는 사람의 기록이다.


대상 없이는 창작할 수 없다는 말은 성장의 언어가 아니라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자리에서 아직 완전히 침몰하지 않았다는,
그 사실 하나를 확인시켜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