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곡이 가장 침입하기 쉬운 자리
자화상은 셀프 사진보다 훨씬 더 과장된다.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다.
카메라 앞에서는 멈출 수 있다.
이 정도면 괜찮다, 하고 셔터를 누른다.
하지만 캔버스 앞에서는 멈추지 못한다.
손이 한 번 더 가고, 한 번 더 망설이고, 결국 한 선을 넘는다.
조금 더 부드럽게.
조금 더 정돈된 얼굴로.
조금 더 “지금의 나”보다 괜찮은 쪽으로.
이 자화상은 실제 인물과 닮아 있다.
하지만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보다
10%, 아니 20%쯤 더 왜곡돼 있다.
더 예쁘게.
흥미로운 건, 이 왜곡이 의도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예쁘게 그려야지’라고 결심하지 않아도
손은 이미 그 방향을 알고 있다.
무의식은 늘 먼저 움직인다.
자화상은 있는 그대로의 얼굴을 그리는 작업이 아니다.
자신을 어떻게 기억하고 싶은지,
어떤 상태로 남기고 싶은지를 드러내는 작업에 가깝다.
그래서 남자든 여자든 크게 다르지 않다.
누구나 조금 더 잘나 보이고 싶고
조금 더 괜찮아 보이고 싶다.
그 욕망이 자화상에서는 유난히 솔직해진다.
이 눈빛은 실제보다 조금 더 온화하고
이 피부는 현실보다 조금 더 맑고
이 분위기는 기억보다 조금 더 안전하다.
사진이 사실을 기록한다면
자화상은 욕망을 기록한다.
그래서 자화상은 거짓말처럼 보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진보다 더 진실에 가깝다.
이 왜곡은 자기애의 증거라기보다는
자기 포기의 반대편에 있다.
아직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는 신호,
아직 이 얼굴로 살아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허락을 내리는 방식에 가깝다.
그래서 자화상은 늘 조금 예쁘다.
조금 과장돼 있고
조금 덜 사실적이다.
그리고 아마 그 미묘한 과장만큼 이
사람이 스스로를 계속 살아가게 만드는
아주 작은 여지인지도 모른다.
자화상은 나르시시즘의 산물이 아니라
사람이 자신에게 남겨두는
최소한의 생존 공간일지도 모른다.
이 그림이 그렇게 보인다면
그건 그림이 솔직해서가 아니라
그걸 바라보는 당신 역시
이미 같은 왜곡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